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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 위 소년은 이렇게 어른이 됐다

2021-03-01 오후 2:07:35 입력 / 2021-03-06 오후 8:09:18 수정

꼭 같은 시간에 소년은 두 살 터울 형과 함께 기차에 올랐다. 평택에서 서울을 왕복하는 기차는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5천 번을 오간 기찻길에는 끝없는 꿈이 펼쳐졌다. 

승객이 없는 기차 한 량은 소년들의 작은 놀이터였다. 앞뒤를 오가며 숨바꼭질을 했고, 어느 날은 큰대 자로 누워 잠을 자다 정거장을 놓쳐 안내원이 깨워줬다.

북적이는 승객에 소란한 날엔 형준은 손에 쥔 책을 읽었다. 모든 것에서 앞서던 형을 올려다보던 소년도 자연스레 종이와 친해졌다.

바둑도 그랬다. 형을 따라 19로 매력에 빠져들었고 하루 종일 신비로운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부모는 꿈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기숙사 생활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소중했다. 어머니는 형준·성준 형제가 원하는 것을 하길 바랐다. 자유로운 직업을 얻게 하고 싶었지만 ‘그만 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타의에 의해서 그만 두는 것은 오랫동안 좋지 않은 기억에 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소년은 꼬박 10년을 함께한 기찻길에서 어른이 됐다. 켜켜이 쌓인 시간은 형제에게 6개월 간격으로 흑백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입단이다.

 

 

▲놀라운 간접 경험을 하게 해주는 무한한 힐링의 공간 책. 안성준은 못 가본 공간 사이에서 번쩍 손을 흔들었다.

 

 

#인생의 큰 축복
숱한 상상력과 자유로운 발상이 발현되는 유년시절을 보낸 안성준의 성품은 바둑판에도 나타났다. 바둑에 답이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자유롭게 상상하려고 했다. 물론 실패도 많았다.

예전 바둑은 창의, 창조, 독창성이 필요했다. 지금은 데이터 시대로 변했다. 바둑도 자연스럽게 그런 과정을 갈 수 밖에 없다. 인공지능을 보면서 인간의 약함을 보기도 하지만 강인함도 느낀다. 인공지능을 바라보며 생각을 고쳐나가고, 이해하는 과정을 보며 인간의 강함을 다시 느끼고 있다”

책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바둑인들이 함께하는 독서토론 모임에 가입을 하고 지식을 쌓아 나갔다. 대회가 없는 날이면 모임으로 향했다.

 

 

 


독서토론은 인생에서 뺄 수 없는 큰 축복이었다. 편향적으로 글을 읽게 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토론을 위해 다양한 책을 읽었던 과정들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면서 바둑도 다르게 보였다.

책은 다양한 경험이 부족했던 안성준을 못 가본 세상에 데려다 주는 놀라운 간접 경험을 하게 해줬다. 책은 무한한 힐링의 세계였다.

철학이나 인문학은 어려워서 부족함을 많이 느끼지만 차근차근 읽어보려 했다. 실존 인물이 나오는 역사책을 좋아하는데 저자의 성향에 따라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각도로 쓴 책도 읽으려고 한다. 최근에는 ‘로마인 이야기’와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꺼내 들었다. 역사 속 인물들은 입체감이 느껴지고,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승과 패를 반복하는 쉽지는 않은 직업이다. 시간이 지나면 승부 앞의 긴장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하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책에서 찾아가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다. 현대사회의 성과주의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의식을 확장시키는 느낌이 좋았다.”

 

 

▲책이 사람을 알아 본 것인지, 사람이 책을 알아본 것인지. 가장 좋아하는 책 '피로사회'를 수많은 책들 속에서 찾아낸 안성준.



생각이 확장되던 시기에 형 보다 먼저 국내대회(물가정보배) 우승컵을 안았다. 김지석을 상대한 안성준이 2대0 스코어로 우승하리라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평생 기억에 가져갈 첫 번째 사건이다. 얼떨떨했다. 형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축하 문자가 쏟아졌다. 우승을 한 것이 맞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 다음에도 우승 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찾아올 줄 알았는데, 쉽게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어렵다는 글쓰기에도 과감히 도전했다. 에세이를 쓴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해보자고 결심했다. 글을 처음 쓸 때에는 마음속에 쌓여있던 감정이나 생각을 표출하며 약간의 청량감을 받았지만, 의도했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 글과 어딘지 어색한 문장을 볼 때마다 쓴 웃음이 나오곤 했다. 글쓰기는 바둑과도 비슷하다.


나에게 글쓰기는 언제나 힘들고 버겁다. 그래도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점차 발전하지 않을까.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라’ 는 니체의 말처럼 부끄러움을 넘어 나를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쓰기의 말들’ 안성준 에세이-

 

 


▲예능프로그램 ‘문제적남자’ 출연. 도전이라는 마음가짐을 통해 평생을 가져갈 추억이 생겼다. 

 


경험의 소중함은 안성준의 태도를 바꿔놓았다. 새로운 것을 대할 때 ‘왜 해야 하지?’라며 거부부터 했는데 ‘한 번 해볼까? 재밌을 것 같다. 해보고 안 좋으면 안하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예능프로그램 ‘문제적남자’에도 출연을 결심했다. 바뀐 태도는 평생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했다.

“중국에서 바둑을 둘 때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1주일간 식사를 거의 못한 적이 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은 중국 음식이 그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 도전, 경험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긴 날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딤섬집에서도 가지딤섬을 보고 기름기 있는 음식은 잘 먹지 않는다고 하다가 ‘도전’을 외치며 집어 든다. 맛을 음미하더니 ‘역시 먹어봐야 안다. 맛있다’라며 다시 젓가락이 향했다.

두 번째 기억에 남는 사건은 가장 빛나는 순간과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경험한 2017년이다. 삼성화재배 16강에서 커제를 이기고 가장 기쁜 순간이 왔다. 기쁨을 절제하려고 노력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다음날 8강에서 퉁멍청에게 유리했던 바둑을 놓치며 슬픔이 찾아왔다.

기쁨을 24시간도 채 누리지 못했다. 찰나의 감정이 오고 간 날 침대에 누워 한참 동안 감정을 추슬렀다. 군대에 가기로 결심했다. 바둑 인생 전반기 마감 같은 느낌이었다.

 

 

▲칼바람이 매섭게 불던 날 온기를 불어 넣어준 홍콩에서 온 딤섬 맛집. 기름기가 많아 보인다며 먹을까 말까 고민했던 가지딤섬은 딱월한 선택이었다. 

 

 

#터닝포인트
군 생활 2년은 승부의 공백이었다. 안성준은 지쳐있었다. 입대하고 1년 동안 바둑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터닝포인트를 위해 찾은 군대는 값진 경험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사람들 하고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방법을 배웠다.

잠시 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은 긍정적이었다. 전역을 하고 성적을 못 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답답했지만 담담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한 다음부터는 바둑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우연히 TV에서 바둑리그를 보게 됐다. ‘너무 두고 싶다. 내가 저기에 있었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바둑을 두고 싶은 생각이 강해졌다.

“쉰다고 해서 바둑 실력이 확 주는 것이 아니다. 열정이 없는 상태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바둑이 하기 싫다고 느껴지면 그때부터 안 좋아지는 것 같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당장에는 손해 같이 느껴질 수 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달라질 것이다”

 

 

▲안성준의 바둑 인생 전반기와 후반기 사이에는 군 생활 2년이 있다. 터닝포인트였다.

 

 

지금 세상도 그 때와 다를 바 없다. 왜 공부하는지도 모른 체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경우 보통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에 갇혀 나라는 존재를 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안성준 에세이-

 

2020년 바둑 인생 후반기를 시작한 안성준은 조급함을 담담함으로 변화시켰고 복귀 1개월 만에 응씨배 본선에 올랐다. 또 KBS바둑왕전에서 준우승을 하며 9단으로 승단했다.

 

 

#긍정적인 열등감
형제 기사는 늘 비교 대상이었다. 형은 늘 앞섰다. 많이 알았고, 운동도 그랬다. 바둑만은 이기고 싶었다. 꾸준히 하다 보니 성적이 상승했고, 형에 대한 열등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한 기사에서는 안형준-안성준 형제를 두고 '형만 한 아우 없다'는데 바둑계의 사정은 좀 다르다고 표현을 하기도 했다.

기찻길 인연은 여행으로 이어졌다. 스포츠 관람을 좋아하는 형제는 캐나다 여행을 함께 했다.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 붙어 다녔고 대화 할 시간도 많으니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가장 잘 통하는 친구가 됐다. 어렸을 때 ‘우리 형’이라 불렀지만 자연스레 호칭은 ‘안형’이 됐다.

“그래서 더 편하다. 라이벌이자 넘어야할 벽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면으로는 형을 이기고 싶다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디든 함께 할 사이좋은 친구가 된 것 같다”

 

 


▲바둑의 길을 선택한 순간부터 늘 함께 하는 '우리형' 안형준. 이제는 누구보다 친한 친구가 됐다.



6개월 먼저 입단한 형은 동생을 향해 ‘조언을 많이 해줬다’고 했지만 정작 동생은 “조언해달라고 한 적은 없고 일방적으로 조언하지 않았을까 싶다. 제 기억에 형한테 도움을 별로 안 받았다.”고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찐’한 친구라는 말처럼 느껴진다.

부족한 것들이 많아 열등감이 있지만 오히려 이 단어가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다. 부족함을 느끼고 발전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니 열등감은 긍정적으로 발현된다.

슬럼프가 올 때면 ‘살면서 계속 겪게 될 일인데 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하면서 한 발 뒤에서 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성적이 좋아진다. ‘거봐, 별거 아니었네?’라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일이 많아졌다. 안성준의 성적은 크게 기복이 없고, 꾸준한 것이 장점이다.

 

“목표를 이루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행복은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학대해서는 안 되고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자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마크툽’ 안성준 에세지-

 

 


▲사람들은 많은 대화를 하지만 내면이 아닌 바깥 모습을 이야기하곤 한다. 안성준은 내면과 외면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고마워, 바둑아
소심하고 겁 많고,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소년은 바둑을 하면서 당당해졌고, 프로가 되고 좋은 성적을 내고 인정도 받았다. 바둑한테 늘 고맙다.

안성준은 바둑을 통해서 받은 것들이 많다. 신예기사상을 받고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 따뜻한 사람으로서 바둑계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소감을 전했는데 이 마음은 지금도 변치 않는다.

“사람들은 많은 대화를 하지만 그 안에 무의미한 말들도 많다. 내면이 아닌 바깥 모습을 이야기하곤 한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밖에서 보여 지는 내가 같은 모습이고 싶다. 나로 인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으면 한다. 나를 보고 사람들이 뭔가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기찻길 위 소년은 이렇게 어른이 됐다.

 

 

 

 

 

※정통바둑매거진 월간바둑에 타이젬 정연주 기자가 기고한 프로의 힐링캠프 '기찻길 위 소년, 이렇게 어른이 됐다'를 옮겨왔습니다.

TYGEM /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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