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일인자 박정환, 새 시대를 열어라!
중국 1위 커제 격파하고 한국 팬들의 염원을 푼 박정환
2016-04-24 오후 9:58:29 입력 / 2016-04-25 오전 8:29:46 수정
▲ 한국1위 박정환(왼쪽) 앞에 중국1위 커제가 고개를 떨궜다(상하이-이영재 기자).
박정환이 해냈다.
'바둑올림픽' 응씨배 8강전에서 펼쳐진 한국1위 박정환과 중국1위 커제의 피할 수 없는 외나무 다리 혈투. 승자는 부동의 한국 일인자 박정환이었다.
중국 바둑계의 뉴스메이커 커제가 지난 1년 동안 '세계 3관왕'에 오르며 연일 화제를 몰고 다녔을 때, 일각에선 그 책임을 박정환에게 돌리며 비난의 화살을 쐈다.
그 때마다 박정환은 아픈 마음을 감추며 "더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다수의 팬들이 박정환의 이름 뒤에 갖다 붙이는 다소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바로 '국내용'이다. 하지만 기억하는가. '국내용'이라는 별명의 원조가 이창호라는 사실을.
기자는 박정환이 올해 초 조한승의 도전을 물리치고 국수전 2연패 달성에 성공했을 때, 인터뷰 기사를 통해 이창호도 '국내용'이라는 비판을 듣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던 적이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고 싶은 말은 똑같다. 박정환에게 필요한 건 질책과 비난이 아니라 따뜻한 격려와 진심어린 응원이라는 것이다.
비공식 대회 포함 통산 140회에 달하는 우승 기록을 갖고 있고, 메이저 세계대회에서만 17번이나 우승하며 세계를 평정한 '바둑의 신' 이창호에게 국내용이 웬 말이냐고 반문한다면, 아쉽지만 그대는 '열혈 바둑 팬'을 자청하기엔 내공이 부족하다.
▲ 박정환(승)-커제. 국후 짧게 소감을 교환한 커제(오른쪽)는 목례를 하며 예의를 갖춘 후 돌을 쓸어담았다.
1975년생인 이창호는 1988년 제8기 KBS바둑왕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을 세운다. 스승 조훈현이 1988~1989년에 벌어졌던 초대 바둑올림픽 제1회 응씨배에서 우승을 하고 금의환향한 직후였던 1990년, 이창호는 국수전, 최고위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보은'을 한다.
본격적인 '사제 전쟁'이 시작된 1991년, 이창호는 명인전, 최고위전, 대왕전, 왕위전, 제왕전, 박카스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일인자로 발돋움한다. 그리고 1992년, 동양증권배에서 '이중허리' 린하이펑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며 최연소 세계챔피언이 됐다. 이어서 1993년에도 같은 대회에서 조치훈을 꺾고 2연패에 성공한다.
여기까지는 '바둑의 신' 다운 흠 잡을 데 없는 성적표. 하지만 그 다음을 보자. 이창호는 1993년 국내에서 국수전, 명인전, 대왕전, 기왕전, 패왕전, 국기전, 기성전, 배달왕전, 제왕전, 비씨카드배, 박카스배, SBS배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숨이 찰 만큼 많은 기전을 독식했다. 또한 그 해에 90승을 거두며 통산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운다. 일 년에 90판을 두는 프로기사도 손에 꼽을 정도인데, '90승'을 거뒀으니 당시 이창호가 얼마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대망의 1994년. 이창호는 국내 16개 기전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고, '13관왕'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통산 최다관왕에 오른다. 열 세번을 나눠서 우승하기도 어려운데, 동시에 13관왕이라니. 가히 인간의 능력을 뛰어 넘은 성적이다.
1995년에도 별로 다를 건 없다. 국내 11개 기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독보적인 일인자 위치를 고수했기 때문. 그런데 왜 세계대회 얘기는 없냐고? 이창호는 1993년 동양증권배 우승 이후 무려 3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세계 무대에서 침묵했기 때문이다.
이창호의 메이저 세계대회 세 번째 우승은 1996년에 와서야 이뤄졌다. 이미 1991년부터 일인자의 반열에 올랐고, 1993년부터는 자타공인 명실상부한 한국 최강자였던 이창호가 세계대회를 휩쓸기까지는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국내 무대에서 '13관왕'이었던 이창호가 세계 대회에선 번번이 고배를 마시자, 일각에선 '모험을 좋아하지 않고 안정을 추구하는 이창호가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야 하는 시합에선 힘을 내지 못하는 것'이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비행기 징크스'를 내놓기도 한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스승 조훈현을 이기는 방법만 연구하다보니 조훈현에게만 강한 것 아니냐'는 헛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 건곤일척의 승부였던 제8회 응씨배 8강전 한중 1위간 맞대결. 박정환(오른쪽)이 커제를 제압했다.
박정환은 어떤가. 1993년생인 현 한국 일인자 박정환은 2006년에 입단한 후 2007년 마스터스 챔피언십에서 생애 첫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며 타이틀 홀더가 된다.
2009년엔 제4기 십단전과 제14기 천원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2관왕에 오른다. 이세돌이 확고한 일인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던 이 시기에 박정환은 2009 바둑대상 신예기사상을 수상하며 존재를 알린다.
이 때는 이미 이창호 시대와 달리 국수전을 제외한 국내의 모든 기전이 선수권전으로 바뀐 시점이었고, 대회 숫자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줄어들어 '13관왕'은 불가능해졌다.
2010년에 박정환은 한중통합천원전에서 천야오예를 2-1로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고, 바둑 역사상 가장 큰 승부 중 하나였던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남자단체전, 혼성페어 두 개 부문 금메달을 목에 건다. 이 공로를 인정 받아 9단으로 승단한 박정환은 17세11개월의 나이로 '입신'이 되어 이 부문 최연소 기록을 세운다.
그리고 2011년, 제24회 후지쓰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박정환은 드디어 세계타이틀 홀더가 된다. 국내에서 정상급 선수 중 한 명임은 확실했으나, 여전히 일인자는 이세돌이었던 시점이다.
2012년엔 GS칼텍스배, KBS바둑왕전 맥심배에서 우승하며 국내 3관왕에 올랐고, 2013년엔 한국 일인자의 '사명' 중 하나인 농심배 주장 출전-우승 공식을 이어 받는다. 당시 중국 두 명, 한국은 박정환 혼자 남은 상황에서 까다로운 상대 셰허와 장웨이제를 연파하며 일궈낸 우승이었다.
2014년에 박정환은 드디어 한국 1위로 올라선다. 그리고 지금까지 28개월 연속 한국 일인자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이 기간 동안 박정환은 2015년 LG배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대회 통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박정환은 이창호와 달리 한국 일인자가 되기 전부터 세계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국내 최강자가 된 2014년 이후에는 비공식적으로 '우승트로피 갯수가 아니라 점수로 따질 경우, 박정환이 세계랭킹 1위'라는 분석도 여러 차례 나왔다.
비록 세계대회 우승은 아직 두 번 뿐이지만, 박정환은 거의 모든 세계대회에서 8강 혹은 4강에는 늘 올라갔다.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창호의 '흑역사'를 자꾸 들춰내 죄스러운 기분이 들지만, '13관왕'이던 이창호가 세계대회에만 나가면 본선 1회전, 2회전에서 '광탈' 하던 게 무려 3년이다.
큰 실패를 맛본 사람만이 크게 성공할 수 있다. 굳이 이창호가 '국내용'이라는 비판을 받던 20여 년전 이야기까지 꺼내며 하고 싶은 말은, 현재 한국 일인자인 박정환에게 질타보다는 따뜻한 격려와 진심어린 응원의 한 마디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혹시 아는가. 한국 팬들의 응원을 받고 힘을 낸 박정환이 이창호 이세돌의 뒤를 이어 세계 무대를 평정하게 될지. 어쩌면 10년 후에는 지금 커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박정환이 '세계일인자'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창호가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를 평정하기 바로 직전이었던 1995년, 동양증권배와 후지쓰배를 양 손에 거머쥔 마샤오춘이 '세계일인자'였다는 사실을 지금 아무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TYGEM / 이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