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짜릿하고 극적인 승부'를 꼽자면 단연 이 바둑이다.
조훈현이 중반 어이없는 실족으로 99% 졌던 바둑, 그래서 관전하던 기자들조차 "조훈현 패배, 한국 전원탈락"이라는 기사를 송고할 정도로 절망적인 바둑이었는데…. 조훈현의 끈질긴 추격전에 흔들린 뤄시허는 실책을 연발하더니 끝내 자멸의 길로 들어선다. 너무나도 극적인 반집 역전승.
국후 조9단은 "백이 99가지 이기는 길을 외면한 채 딱 한 갈래 지는 코스로 접어든 들었다"고 술회할 정도였느니…. 기적같은 역전승을 일궈낸 후 조훈현에게는 '귀신이 돕는 승부사'라는 별명이 새로 붙는다.
자칫 중국 돌풍에 전멸할 뻔한 한국바둑의 자존심을 살려준 한판이기에 조9단의 역전승은 더더욱 빛났다. 이 승리에 힘입어 조훈현은 바둑팬이 뽑는 2002 MVP에 오르는 영예까지 안는다.
하이라이트(뤄시허의 자멸극)
백이 절대 유리한 바둑이었으나, 중앙에서 △들을 떨구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많이 좁혀진 형세. 그러나 아직 역전에는 어림없다. 좌상귀에 백의 꽃놀이패가 남아있기 때문. 그런데, 뤄시허는 그 패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대세를 그르치는데….
공배을 메운 백2가 일단 손해수. 그리고 자기 집을 메운 백6이 웃지 못할 마이너스 끝내기. 이렇게 팻감을 없애놓은 다음 백10으로 패를 들어가면 백은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한 것인데, 이는 중대한 오판이었다. 이후 백은 소원대로 패를 이기고 ●들을 때려잡았지만, 패의 대가로 ○들을 죽인 데다 그전에 손해본 것도 상당해 결국 반집을 지고 만 것.
참고도(백의 필승코스)
애당초 자기집을 메우는 우를 범할 것이 아니라 백1로 지켜두는 것이 필승코스였다.
그러면 정말로 갑갑한 쪽은 흑. 백A의 시한폭탄 때문에 종당에는 B~D 등을 모조리 해결해야 하는 부담이 커서 결국 백승으로 끝날 운명이었다.
전인미답(前人未踏) '세계대회 싸이클링 히트'를 놓고 조훈현과 유창혁이 맞붙은 LG배 결승은 2002년 상반기 최대 빅카드였다.
두 기사 모두 현존하는 5대 세계대회(삼성화재배, LG배, 응씨배, 후지쯔배, 춘란배) 가운데 유독 안아보지 못한 LG배 우승의 외나무다리에서 맞닥뜨린 것.
결승1국을 내준 조훈현 9단이 2, 3국을 연승해 역전시키자 다시 4국에서 유창혁 9단이 반격하는 용호상박의 명승부 끝에 결국 영예의 세계대회 싸이클링 히트의 영예는 '일지매' 유창혁에게 돌아갔다. 특히 그동안 LG배에서 세번이나 준우승의 분루를 삼켰던 유창혁으로서는 ?전4기'에 성공하며 '준우승 징크스'에서 깨끗이 벗어나는 승전보여서 '기쁨 두배'였으리라.
하이라이트(유창혁의 기민한 찬스포착)
초반 우하 전투에서 횡재해 크게 우세했던 흑이 중반이후 낙관무드에 젖은 나머지 어느새 형세불명의 혼전이 된 상황. 백1로 젖히자 흑도 만만치 않게 되었다.
그런데 흑2에 무심코 백3으로 받은 수가 긁어부스럼의 패착. 백4가 놓이는 바람에 흑10의 끼움수가 성립한 것이다. 흑20까지 뜯어먹어서는 일거에 흑승 결정!
참고도(형세불명)
흑2로 달릴 때 먼저 백3으로 젖힐 자리였다. 그러면 흑도 지금은 흑4·6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는데, 그때 백7·9로 처리했으면 안전했던 것.
92년 SBS배로부터 시작된 한국바둑의 '단체전 불패신화'. 진로배 5연속 우승을 거쳐 그 후신 농심배에서도 드디어 3연패(覇)에 성공하며 ?연속 V'를 달성한다.
단체전 9연속 우승에는 이번에도 이창호의 철벽마무리 솜씨가 단연 빛났다. 한국1대 중국2의 불리한 상황에서 한국팀의 마지막 주자로 나선 이창호 9단은 중국 2장 창하오(常昊) 9단을 꺾은 데 이어 주장 저우허양(周鶴洋) 9단마저 격파하는 원맨쇼를 연출하며 한국의 역전 우승을 이끌어냈다.
특히 그동안 자신에게 3연승하며 '新이창호 천적'으로 기세등등하던 저우허양에게 첫 승을 거두며 '천적 징크스'에서 탈출하는 바둑이었기에 이창호 9단으로선 의미가 더욱 컸다.
하이라이트(저우허양의 실족) 시종 흑이 우세한 가운데 진행된 바둑. 백이 열세 만회를 위해 강수로 버틴 끝에 지금은 좌중앙에서 긴박한 승부패(▲)가 발생했다. 이 장면이 사실은 흑이 결정타를 날려 바둑을 끝낼 찬스. 그런데, 저우허양은 승리를 목전에 두고 도리어 실족하고 마는데….
백1로 팻감을 썼을 때 흑2로 불청한 것이 패착. 백3으로 끊어잡는 순간. 승부의 저울추가 기우뚱했다. 저우허양 9단은 흑4로 중앙을 키워 충분하다고 생각한 듯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백9·11로 솔솔 깎아 들어가자 흑은 상변 쪽이 갑자기 엷어지지 않았는가. 결국 A까지 백차지가 되어 백승이 확정되었다.
참고도(놓친 흑의 필승코스)
백1의 용패(用覇)에는 일단 흑2로 받아야 했다. 바로 흑4라는 절호의 팻감이 있기 때문.
팻감이 부족한 백은 5로 불청할 수 밖에 없는데, 흑6이면 백대마(○) 전체가 살 길이 없지 않은가. 이랬으면 흑이 반면 10집은 남는 바둑이었으며, 이창호 9단이 즉시 돌을 던지려고 했다는데….
결국은 이창호가 돌 던지기 직전에 저우허양이 '뻑'을 하는 바람에 한국과 중국의 운명이 바뀌었으니, 실로 천국과 지옥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