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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철녀' 루이와의 대화

돌이켜보는 루이의 바둑인생과 그와의 인연

2007-01-29 오전 11:29:44 입력 / 2007-01-29 오후 2:15:39 수정

1월 26일 루이나이웨이는 여류명인전 결승에서 이다혜를 2:0으로 물리치고 ‘또 한 번’ 우승을 차지했다. 지금까지 몇 차례나 우승을 차지했을까? 아마 기억하는 팬들이 많지 않을 것이요,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조혜연과 박지은이 루이의 느슨해진 수비망을 뚫고 깃발을 꽂은 것이 몇 차례일지 헤아리는 것이 낫다.

이창호가 우승하는 것보다는 지는 것이 더 뉴스가 된다는 시절이 있었다. 그렇듯 여자 바둑계는 루이가 지는 것이 뉴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자바둑계는 큰 뉴스가 없다.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세계여자바둑계를 호령하던 80년대 중반이니 근 20년 가까이 여류랭킹 1위에 올라있는 루이는 철녀(鐵女). 루이의 바둑인생와 그와의 인연을 돌이켜본다.


바둑을 죽도록 사랑하는 철녀
철녀 루이는 올해 우리나이로 45세가 된 아줌마 기사이다. 그러나 루이는 아쉽게도 아줌마라는 단어에 대해 생소하다. 루이가 바둑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연구생이다. 수준이 연구생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늘 연구하는 태도가 ‘학생급’이라는 뜻이다.

루이가 처음 한국에서 안착을 했을 때는 너도 나도 스파링을 청했다. 그때 9단 루이와 같이 연습 대국하던 연구생도 프로가 되었다. 그 후 그 연구생프로의 모습은 기사실에서 보기 힘들어졌다. 그래도 루이는 10년 전이나 다름없다. 강산이 변할 때까지 한결같은 루이의 향학열에 경외심마저 생겨난다.

루이는 죽도록 바둑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한국을 아직은 모르니 ‘갈 데가 없으니까 바둑밖에 둘 수 없겠지’ 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사실 ‘10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는 말은 잘 못되었다. 오히려 지금이 루이로서는 더 적극적이 되었다. 공부를 같이 할 사람을 찾아 다녀야 하니까 말이다.


1988년 즈음 - 월간바둑의 추억
루이의 첫 닉네임은 마녀(魔女)였다. 필자는 루이를 86년 즈음에 처음 만났다. 나중에는 제 손으로 만들게 되는 월간바둑을 통해서였다. 당시 중국여자바둑계에서는 세계교체가 일어나고 있었다. 익히 알다시피 네웨이핑의 첫 부인인 콩상밍이 지는 해였다면, 바로 25세가 되는 루이는 뜨는 해였다. 곧장 그해 루이는 여자기사로는 최초로 9단이 된다. 아직까지 여자기사중에 최초로 9단이 된 사람이 콩상밍이라고 생각하는 마니아가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바둑은 베일에 가려있었다. 88년 즈음 미수교국인 중국의 기보를 직수입한다는 것은 난해한 일이었다. 다만, 그즈음 네웨이핑이 역사적인 일중 수퍼대항전에서 3년 연속 대역전승으로 인해 중국바둑의 관심이 증폭된다. 따라서 월간바둑에서는 일본을 통해 중국소식을 해외기보라는 형식을 빌어서 소개해왔던 것이었다. 루이는 86년에 중·일수퍼전에서 1장, 87년엔 2장, 88년 무려 5장으로 점프한다. 그녀가 중국에서 5위안에 속하는 강타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추억의 바둑이 있다. 월간바둑 해외기보2 /제2기 중국기왕전 본선 8강전으로 제목은 ‘魔女에 혼난 중국2인자 마효춘’이다. 오늘 다시 뒤척여보니 90년도 7월호에 소개되었던 내용이다. 당시에 정말 쇼킹했다. 중국의 여자바둑이 세다는 소리는 익히 듣고 있었지만, 일단 본격기전에서 8강전에 올라갔다는 것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녀가 8강에서 머물 위인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루이는 82년~85년 4년 연속으로 중국전국바둑선수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다. 그러다 86년부터 내리 4연패를 차지하며 쿵상밍·양휘·화쉐밍 등 쟁쟁한 전통의 3인방을 밀어내고 여류바둑계를 평정하기 시작한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전국바둑선수권은 남여 단체전 개인전으로 치러진다. 86년 당시엔 중국의 프로대회가 전국선수권·신체육배·국수전 등 3개 기전밖에 없을 때였으므로 전국선수권은 꽤 권위가 있는 대회였다. 또한 당시 신체육배에서 차오다위옌·류샤오광을 꺾고 마샤오춘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월간바둑에 실렸던 바둑내용은 기억이 없으나 졌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오래된 일이라서 기보내용이 기억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보보다 필자의 기억을 사로잡아 버린 사진 한 컷 때문이다.

긴 머리에 이마부분만 싹둑 자른 머리형에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사진이었다. 안경너머로 보이는 루이의 눈매는 정말 ‘마녀’처럼 보였다. 물론 중국에서 직수입한 사진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잡지나 ‘슈칸고’에 나온 사진을 복사 인쇄한 것이니 흐릿흐릿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 지금처럼 안경알을 압축하는 기술이 없었기에 안경알이 두꺼워질 수 밖에 없었다.


1993년 즈음 - 싱가폴의 추억
루이는 88년 세계최초의 여자 9단에 오른 다음 92년 잉씨배에 당당히 출전한다. 그 대회에서 유일한 관상용 ‘꽃’이 될 것이라는 세인의 예상은 여지없이 깨진다. 무려 4강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요다노리모토와 함께 당시 일본의 희망이었던 고마츠히데키. 동양증권배 2회 연속 우승에 빛나는 이창호. 남편 장주주를 꺾고 올라온 양재호를 연달아 꺾고 4강에 오른다. 파죽지세로 올라가던 루이는 ‘미학’ 오다케히데오에게 1:2로 분패하여 결승진출이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그 정도만으로도 세계는 놀랐다. 앞으로는 깨기 힘든 기록이 달성되고 만 것이다. 여자기사 세계4강 진출이 또 언제 일어날 것 같은가.


▲ 잉씨배 준결승에서 오다케히데오(오른쪽)과 복기를 하고 있는 루이. [사진-월간바둑]

당시 해외대국 징크스가 있었던 18세의 이창호는 ‘여자’ 루이에게 지고 난 다음, 비오는 도쿄의 아카사카거리에서 부친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이제 바둑 안 둘래요.”라며 울먹였다. 훗날 일인자가 된 후로도 이창호는 루이에게 자주 패하게 된다.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이듬해인 93년 처음으로 루이를 만난다. 80년대 중반부터 그녀를 ‘흠모하던’ 필자가 처음으로 실물로 대했을 때 뛰는 가슴을 달래느라 혼났다. 바로 그 잉씨배 결승전을 앞두고 싱가폴에서 우칭위엔 선생과 함께 루이가 참관단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같이 동석했던 기자도 사실 루이를 가까이서 대한 것이 처음이라 궁금한 것이 많았다. 우칭위엔 선생의 80회 생일을 맞아 기자단에게 호텔 밖으로 초대한 다음 중국전통차를 다정하게 대접하던 그때 그 모습이란… ‘마녀’라는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기억이 새롭고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얘기도 했었다. 인사말 정도이지만 한국어도 몇 마디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99년 즈음 - 國手에 오르다
99년 3월 드디어 한국바둑계가 전향적으로 루이부부를 받아들인다. 일본 착륙을 먼저 시도했으나 일본 여자 기사들이 자신의 ‘밥그릇’이 빼앗길 것을 우려해서 루이의 일본행을 반대했다. 반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우리의 젊은 여자 기사들의 태도는 달랐다.


▲ 루이와(왼쪽) 남편 장주주의 모습.

94,96,97년 보해배 세계여자바둑대회를 우승한 다음 LG배 세계기왕전에서 8강에 들기도 한 ‘여자 이창호.’ 루이. 막강한 그녀를 한국리그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정말이지 모험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한국여자프로의 실력 향상을 위한 것이었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도 아직까지 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중국 일본의 어느 기사보다도 밀리지 않는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원동력 중 절반 이상은 막강한 ‘가정교사’ 덕분이다.

예상대로였다. 아니, 예상을 빗나갔다. 애초 여류기전을 독식하리라던 예상은 그대로였지만, 이창호·조훈현·유창혁·최명훈 등이 건재한 국내바둑계에서 루이가 설 땅은 별로 없을 것이란 예상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전통의 국수전에서 대뜸 이창호를 꺾고 도전자로 나선다. 당시 이창호의 패배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92년보다 강성해진 이창호가 또 ‘여자’에게 당한다는 것은 큰 뉴스였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전신(戰神) 조훈현마저 1:3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한국으로 건너온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서 한국의 자존심인 ‘이국수’ , ‘조국수’를 물리치고 루이국수가 탄생한 것이다.


▲ 국수전 결승에서 조훈현(오른쪽)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한 루이. [사진-월간바둑]

물론 전력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여자기사에게 ‘뽄대’를 보여주겠노라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이 가장 중요한 패인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깨에 힘이 들어간 이창호, 조훈현을 이기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루이가 국수라니… 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 이휘호 여사가 친히 전화를 걸어 격려해주었다고 하니 얼마나 센세이션이었는가.


2007년 즈음 - 여류타이틀 독식
04년 여류국수전에서 조혜연에게 패할 때까지 13개 국내외 기전에서 13번 우승한 철녀 루이. 타이틀 획득을 1년도 그른 적이 없다. 대식가이자 성실파이다. 20년을 한결같은 향학열은 주변 사람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모범적인 기사이다. 이런 루이를 보면 남의 나라 사람이란 생각은 전혀 없다.

여류명인전 이다혜와의 대국이 끝난 뒤 실수가 많아 아쉬웠는지 오랜 시간 바둑을 검토하는 루이. 진정으로 한판 한판에 최선을 다하고 복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필자와는 대구에서 벌어진 여류명인전1국 때와 이번 2국에서 많은 얘기를 나눴다.

자주 이기는 비결에 대해 “운이 좋았지요. 제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좋은 바둑을 두는 것밖에 없지요. 팬들에게 감사해요.”
요즘 왜 한국기원에서 얼굴을 자주 볼 수 없냐고 하자, “기사들이 기원에 안 나와요. 그래서 도장에 나가서 공부해야(리그전) 해요.” 연구생, 프로가 섞여서 진지하게 리그전을 해서 얻은 승률은 60퍼센트란다.

특히 기억에 남는 여자 기사 한 명을 꼽으라고 하니 곧장 조혜연의 이름이 나온다. 루이는 조혜연과 여류국수전 결승에서 4번을 만나 루이가 3번을 이겼다. 최근 조혜연이 5연패를 당하고 있어 근 1년 동안 루이에게 이겨보질 못하고 있다. “혜연이와 복기하면 참으로 기분 좋아요. 혜연이는 좋은 친구지요.”

2000년 국수전을 우승했을 때나 07년 여류명인전을 우승했을 때나 루이는 항상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근원적인 낮추기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루이는 그토록 사랑하는 바둑을 둘 수 있도록 기회를 준 한국바둑계에게 자신은 ‘운이 좋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국민누님’ 루이의 휘호는 ‘꿈 몽(夢)'자가 쓰인다. 꿈을 꾸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인 것이라고. 루이에게는 끝없이 배우고 연마하겠다는 의미가 곧 꿈이라고 한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창호와 루이의 공통점은 끝없이 겸손하고 한없이 노력하는 기사라는 점이다. 일인자가 되어 본 기사들의 공통점이련가. 그녀의 순수함과 바둑열정은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TYGEM / 진재호 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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