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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는 李를 기다린다

李와 李의 2008년 빅매치를 기대하며-이창호 부활 청신호 15연승 중

2008-01-28 오전 11:40:07 입력 / 2008-01-28 오후 3:30:28 수정

작년 말 기준으로 국내외 타이틀 획득 수는 이세돌이 6개, 박영훈, 이창호가 3개씩이었다. 당연히 새해엔 이세돌을 정점으로 박영훈과 이창호가 따라붙는 형국으로 전망하였다. 단순하게 타이틀 개수를 가지고 '뻔한 예측'을 한 것이 아니라, 작년 하반기에 이창호 박영훈 두 고수의 스퍼트가 볼만했기 때문에 기대를 잔뜩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먼저 '이세돌 정벌'에 나선 박영훈은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삼성화재배에서 큰 데미지를 입었다. 박영훈은 워낙 끈적끈적한 기사여서 다시금 또 정벌에 나서겠지만, 당분간은 허리샅바를 앗긴 장사 신세를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제 눈길은 이창호에게로 돌아간다. 이창호는 현재 아무것도 가진 것은 없다. 세계무대에 올라있는 것도 없고 세계대회 예선도 당분간 예정된 것이 없다. 그러나 올해는 올림픽이 열리는 해이다. 따라서 춘란배, 도요타덴소배, 응씨배 등 격년 또는 4년마다 열리는 대회도 모조리 치러지는 세계대회 풍년이다.


▲ 지난해 8월에 열린 왕위전 시상식. 당시 이창호 9단은 왕위전을 지켜내며 무관위기에서 벗어났다. 상패를 받고 있는 이9단.

부진 늪 헤치고 이창호 컨디션 조절 중
최근 3년간 보여준 것은 없다. 성적만 가지고 보면 실망이다. 그러나 이창호는 그 기간 동안 심신을 단련했다. 건강악화로 그간 시달렸던 몸도 이제 추스렸다. 부담 많은 일인자의 권좌에서도 본의 아니게(?) 내려왔다. 이제는 홀가분하다는 말이다. 당연히 이창호도 다시금 힘을 쓸 것이고 명예회복을 벼를 것이다.

더욱이 2008년 들어서는 12전 전승을 달리고 있다. 그간 목진석, 안조영, 조한승, 이영구 등 쟁쟁한 고수들을 이기고 잊혀져갔던 '손맛'을 살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이세돌의 아성에 도전할 다음 타자는 이창호가 될 것이란 전망은 어렵지 않다.

도전이라고 했다. 이세돌은 상대가 이창호라면 자신에게 '도전한다'는 말이 상당히 거슬린다고 했다. 그러나 심정적으로는 분명 이창호는 이세돌의 아성에 도전하게 될 것이다. 도전이 되었든 대결이 되었든, '그날'을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창호는 아직 그가 이세돌에게 패하지 않았음에도 이세돌이 일인자라는 '이상한 구도'를 바로 잡아야 한다.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다
이세돌은 일인자이다. 이세돌은 이창호를 이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창호가 일인자인가? 참으로 이상한 구도 속을 살아가고 있다. 분명 이세돌은 현역 최다관왕으로서 일인자이다. 그러나 이세돌은 이창호에게는 우위를 보여준 바가 전혀 없다. 오히려 역대전적에서는 그에게 밀리고 있다.

3~4년 전 이창호가 일인자로 군림할 때에도 이세돌은 "최철한이 이인자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그가 성적으로는 분명히 이인자이거늘 최철한이 더 위라고 말한 것은, 일인자를 가끔이라도 꺾는 최철한이 이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고 자신은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는 책망이었다. 이세돌은 '이창호를 잘 이기는 최철한'을 몹시 부러워했다.

일단 일인자(이창호)를 이긴 적이 없는 일인자(이세돌)를 일인자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세돌은 바로 그 점을 의식하는 듯하다. 사실 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조남철을 이긴 김인이나 김인을 이긴 조훈현. 그리고 조훈현을 이긴 이창호가 대를 이어 한국바둑계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창호를 이긴 이세돌'이라고 하게엔 무언가 야릇한 느낌이 든다.

물론 과거에는 도전기로 치러지는 대회 방식이어서 구(舊)일인자와 신(新)일인자가 독대하여 자웅을 겨루는 형식이 참으로 많았다. 오죽했으면 조훈현 이창호 간의 20변기니 15번기이니 하는 뉴스를 심심찮게 보았다. 그런데 요즘은 대회가 속기전으로 치러지고 번기(番棋)수도 무척 짧아졌고 토너먼트 형식이 많아졌다.

따라서 구 일인자와 신 일인자의 구도로 억지로 집어넣기가 매우 곤란한 면이 있다. 이세돌로서는 그것이 불만인 것이다. 그래서 언제고 '빅쇼'를 벌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과거 2001년과 2003년의 LG배 세계기왕전처럼 말이다.


▲ 2003년 2월 25일에 열린 LG배 결승 제1국 모습. 이세돌 9단(당시 3단)은 이창호 9단을 꺾고 먼저 1승을 챙겼다.

5차례 도전기 중 이창호가 4번을 이겨
도전기 및 결승에서 이세돌이 이창호를 이긴 적인 단 한차례뿐이다. 통산 5번을 만나 2003년 LG배에서 그를 3:1로 이긴 것 밖에 없다. 따라서 이세돌이 모든 기사는 다 물리쳤어도 이창호만은 자신의 손으로 물리쳐본 적이 드물다는 얘기이다.

2000년 이후의 전적만 살펴보자. 이세돌은 2000년 1승1패를 한 다음 2001년 6승3패로 밀렸다. 바둑왕전 0:2로 패했고 LG배에서 통한의 2:3 역전패로 마감하였다. 2002년은 3승4패로 선방했으나 역시 왕위전에서 2:3으로 패했다.

2003년 설욕의 기회가 또 찾아왔다. 5승1패를 기록했고 LG배에서 3:1로 승리한 것이 가장 컸다. 이 시점에서부터 이세돌이 이창호를 극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2004년 2승6패로 다시 이창호가 앞선다. 역시 왕위전에서 0:3으로 이긴 것이다.

이후 꼭대기에서 마주친 적은 없다. 이창호의 쇠잔함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세돌과의 전적에서만큼은 2005년 이후에도 5할을 기록하며 대동소이한 성적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창호의 힘이 더 빠지기 이전에 이세돌은 그를 꺾어야 하는 난제를 떠안고 있다. 바로 정면 대결해서 그를 이기는 것이 꿈이다.

이창호의 부활 원년
2007년 이슈 가운데 하나는 윤준상이 이창호를 꺾고 국수에 오른 것이다. 뤄시허에 이어 창하오에게도 삼성화재배 타이틀을 내줘 2년 동안 좋지 않게 새해를 시작한 이창호는 아무래도 심한 내상을 입은 듯했다. 왕중왕전도 강동윤에게 내줬다.

불안하게 새해를 시작했지만, 농심배 주장으로 쿵제, 구리를 이김으로써 농심배를 찾아왔고, 중환배 우승을 차지하는 등 좋은 성적도 거뒀다. 건강악화설이 그를 괴롭혔지만 예전 컨디션을 되찾은 듯, 다행히 왕위전은 지켜내며 무관은 피했다. 연말에는 바둑왕전을 따내며 한 해를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드디어 찾아온 2008년, 이창호는 12전 전승을 기록하고(작년 말부터 따지면 15연승) 예년과 전혀 다른 시작을 보여주며 1위 탈환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왕중왕전 백호왕전에서 이창호는 6연승. 이후 명인전에서 4승을 추가했고 이 기간 중에 열린 십단전 결승에 올라 목진석에게 선승을 올려 또 하나의 타이틀 추가에 청신호를 밝혔다.


▲ 바둑대상 시상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창호 9단. 이날 "이세돌 9단에게 겁을 좀 주어야겠다."고 말해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청중에게 박수 갈채를 받았다.

 

고수들의 선문답 "한 수 배우고 싶다."
지난 4일 바둑대상 시상식에서 우수기사상을 받은 이창호가 단상에 올라 "이세돌에게 겁을 좀 주어야겠다."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한창 잘나가는 이세돌에게 제동을 걸어주어야 하겠다는 뜻이다. 인기상으로 다시 한 번 단상에 올라갔던 이창호는 방금 한 말이 확대재생산될 것을 우려해(?) "농담이었다."며 특유의 유연함으로 넘어갔다. 그 광경을 본 필자는 '다시 힘을 낼 것이니 팬이여 기다려주시라!'는 뜻으로 들렸다.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한 다음 이세돌은 이에 대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창호가 나에게 도전하는 입장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아직은 이창호가 일인자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오히려 "올해는 이창호과 결승에서 만나 한 수 배워보고 싶다."고 전했다. 이쯤 되면 고수의 선문답치고는 서로에게 직설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01, 2003년 그리고 2008년
시간이란 것이 본디 아날로그한 것인데 인간이 편의에 의해 디지털화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을 잘라놓고 나니 좋은 점도 상당히 많다. 다시금 맘을 고쳐 잡으며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21세기의 시작인 2001년에는 이창호와 이세돌이란 두 거성이 만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03년은 이세돌이 비로소 대등하게 나가는 시기였다. 2001년 2003년의 LG배가 역사에 남는 대국이 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무승부인 상태로 중단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올해 부디 이창호가 멋지게 부활하여 이세돌의 상대로서 등장하기 바란다. 이세돌이나 이창호나 그런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랄 것이다. 팬들도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즐거움 아닐까 한다. <진재호 바둑평론가>

TYGEM / 진재호 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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