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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소송

바둑판은 말이 없다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는 윤9단의 마음에 들어있다

2008-04-19 오후 7:53:18 입력 / 2008-04-19 오후 8:50:08 수정

지난주 바둑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억대 바둑판 소송사건이 윤기현 9단의 기자회견을 거치면서 오히려 여론의 악화를 불러일으켰다.

바둑팬들의 분노는 모든 바둑사이트 게시판을 통해 들불처럼 활활 번지는데 책임 있는 한국기원 관계자, 그리고 바둑기자들이나 논객들은 강 건너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분위기다.

사실 관계가 항소심의 확정판결을 통해 정확히 밝혀질 때까지 말조심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침체된 한국바둑계를 위한 침묵일까?
환멸이다. 이미 농익은 환부의 고름이 터져버린 상태인데 시간이 지나 아물기만 바라는 속수무책 최하의 방편이다.

일본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전설의 바둑판을 소재로 ‘고스트 바둑왕’이란 작품을 만들어 바둑 붐을 일으키곤 했는데 우리는 실존하는 진귀한 바둑판의 증여 문제로 바둑계 전반에 찬물을 끼얹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언젠가 한 TV프로그램에서 프로기사 친필 사인이 담긴 바둑판의 감정가를 형편없이 비하하는 장면이 방영되어 바둑 팬들의 심기를 어지럽혀 놓았던 일이 떠오른다.
프로기사들에 대한 경외심을 기본으로 품고 바둑을 좋아하는 팬들은 프로그램에 등장해 ‘이 정도의 바둑판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라고 평하며 가수 김장훈의 바둑판 가격을 낮게 후려친 전문가를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그 전문가는 천만 바둑 팬들에게 백배 사죄를 했었다.

 

그런데 그 일은 이번 억대 바둑판 소송사건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사건의 전말은 주지하다시피 바둑판의 소유자가 절친한 원로기사에게 판매를 부탁하며 건넸는데 배달사고(?)가 터진 것이다.
‘내가 증여받은 바둑판을 내가 팔았는데 왜들 잔소리냐?’
윤기현 9단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입장은 이렇게 압축된다.

한국기원에 모였던 기자들은 속 시원한 문답도 해보지 못하고 10분 정도에 걸친 일방적인 주장만 듣고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듯 원로의 뒷모습만 응시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윤9단의 생각은 아주 간명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2개의 바둑판을 받았는데 1개는 증여 받았고 1개는 판매위탁을 받았는데, 증여받은 바둑판은 일본 쪽에 1천만 엔에 팔았으므로 본인 소유고, 위탁 받은 바둑판은 구매자를 찾지 못했으므로 다시 돌려주면 그만 아니냐는 말씀이다.

그래서 부산지법에서 내린 ‘1천만 엔 지급’ 판결에 승복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윤9단은 부산 쪽 지인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해줄 것이라며 자신의 억울함을 계속 호소하는 중이다. 그러나 과연 부산 바둑 팬들 중 어떤 사람이 그의 항소심에 분연히 나타나 증인이 되어줄지 의문스럽다.
필자가 듣고 보기로 부산 바둑계의 전반적인 공기는 이 번 사건에 관해 바둑사이트의 분위기보다 훨씬 냉정하고 단호하기 때문이다.

다시 2004년의 상황을 되돌려 보자. 부산에서 삼원섬유라는 회사를 일구어 자수성가한 김영성 씨는 한국기원 이사와 부산바둑협회 본부장을 맡아 그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한국바둑의 후원자로 활동해 왔었다.

프로기사들이 부산에 내려오면 정중하게 환대했고, 숙식은 물론 거마비까지 챙겨주는 인심을 베풀었고, 이붕배 바둑대회를 비롯해 다양한 바둑이벤트를 끊임없이 기획하고 주최했던 바둑계의 은인이었다.
고가의 세고에 반과 오청원 반을 70년대에 구입한 이유도 바둑문화에 대한 애착때문이었으리라 추측된다. 그 후로 오래 간직해왔던 두 개의 명반을 그는 세상에 내놓게 된다. 그 동기가 억대 바둑판 사건의 미스터리를 푸는데 핵심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윤기현 9단의 설명으로는 이렇다.
“30년 지기의 친구가 찾아와 하나는 네가 갖고 하나는 팔아서 가족에게 전해 달라.”
이 대목에서 ‘증여와 판매위임’으로 2개 명반의 존재가 나누어진다. 윤기현 9단이 강조하는 사실이 바로 이 대목이다. 자신이 틀림없이 세고에 반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기현 9단의 사실여부를 떠나 그 발언은 자충수일 수밖에 없다.

김영성 씨가 바둑판을 맡길 때 어떤 의도를 지녔을까? 추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04년 김영성 씨가 바둑판 2개를 윤9단에게 맡길 때 세고에 반은 깔끔했으나 오청원 반은 흠집이 나 있는 상태였다.
부산에서 수리할까 싶었으나 워낙 고가의 바둑판이라 아무래도 서울이 낫겠다 싶어 그대로 사람을 시켜 전달했었다.

그러면서 ‘바둑판 2개를 보내는데 그 중 하나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잘 수리하고 1개는 팔아 1억 원쯤 내 가족에게 전해주고 1개는 당신이 가져라.’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평생 바둑을 사랑했던 그가 최고의 가보로 보관해왔던 바둑판을 윤9단에게 건넸던 것은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벗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30년 지기 벗에게 유언을 남기면서 유산 상속의 의중을 밝힌 게 아닐까? 그렇다면 바둑판을 처분하고자 하는 주된 명분은 틀림없이 1억원 정도 가족에게 전해달라는 것이다.

 

벗에게 증여한다는 사실 이전에 처분을 의뢰하는 간절한 당부가 선행한다는 의미다. 고인이 절친한 벗 윤9단에게 하나를 선물하고 싶었다면 그 것은 그런 번거로운 바둑판 판매위탁에 대한 중개료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나는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이것들을 보관하지 못하고 처분해야 하니 하나는 팔되 나머지 하나는 한국바둑계의 증인이나 다름없는 당신이 잘 간직하시오’ 라는 감성적 당부로도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30년을 거론하는 우정과 의리로 볼 때 윤9단은 당연히 어떤 것을 먼저 처분했을지라도 유족에게 판매대금을 전달하고 나머지 하나는 잘 보관하겠다고 인사하는 게 순리라고 본다.
인정 상 고인과의 의리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바둑 팬들의 분노는 당연하다.
윤9단은 하늘에서 고인이 슬퍼할 거라고 토로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진행된 바둑판에 얽힌 스토리는 고인의 유언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고인의 유족에게는 팔리지 않은 오청원 반이 되돌아갔을 뿐이고, 윤9단은 1천만 엔을 손에 쥐었다.

그 1천만엔은 엄밀히 말해서 불로소득이다. 친구를 잘 둔 덕에 생긴 거금이다. 30년 우정에 대한 보상이다. 그래서 그 돈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인가?
바둑 팬들은 도저히 그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우정에 대한 보상은 돈보다 역시 우정으로 되돌려줘야 하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둑판 문제는 소송으로 번질 일도 아니었고, 혹여 당사자 간에 미묘한 감정적 마찰이 있었다 해도 윤9단이 대승적으로 풀어야 옳았다. 윤9단은 개인이기 이전에 입신의 명예를 지닌 한국 바둑의 공인이므로.

항소심에서 증여 사실을 입증한다한들 천만 바둑 팬들이 고개를 끄덕거려줄까?
여러 가지 정황상으로 이 사건은 이미 인정으로 해결할 수 없어 법의 잣대를 빌리게 되었고, 그러한 이상 윤 9단의 실추된 명예는 되찾기 힘들어 보인다.
재판으로 번지기 전, 양측이 합의를 도모했었는데 합의금으로 윤9단이 제시한 액수가 500만원이었다고 한다. 바둑판 가격의 5%에 불과했으니 유족들이 발끈할 수밖에.

자, 이 뜨거운 감자 ‘억대 바둑판 소송사건’을 한국기원은 도대체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4월 14일 한국기원 기자회견장에 윤9단과 동석한 한상열 사무총장은 ‘유족들이 생계비 치료비가 없다고 한 것은 오보다.’라고 밝혔다.
그 뒤를 이어 윤9단은 ‘이붕배가 2006년까지 지속되었다.’고 주장했다. 유족들의 생활이 어려워 바둑판 반환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허구임을 강조하는 뉘앙스가 짙다.

이붕배를 지속했으니 유족 측 경제가 그리 어렵지 않다는 주장을 감히 어떻게 한국기원을 대변하는 사무총장과 프로기사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차하면 생겨났다 걸핏하면 폐지되는 바둑대회의 을씨년스런 추이를 볼 때 이붕 배는 아주 소중한 자산일 수밖에 없다.
고인의 애틋한 바둑 사랑을 유족과 부산바둑 인들이 힘을 합쳐 사후에도 유지해 온 그 노력을 어떻게 ‘경제적 여유’로 환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한국기원은 공식적으로 윤9단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뜻인가?

김영성 씨가 별세한 이후에도 부산바둑인들은 국제5개도시 대항전과 부경바둑대회 등을 꾸준히 운영해오고 있다. 기업 홍보수단으로써 바둑이 큰 매력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오로지 제2의 도시 부산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힘과 뜻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랑스런 바둑지킴이들에게 격려나 지원을 해주지 못할 망정 이런 식의 씁쓸한 해프닝을 연출해보일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환멸이 무관심으로 이어져 많은 이들이 바둑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는 재앙에 다름아니다.

물질적인 가치보다 더 큰 바둑 팬들의 시선, 억대바둑판 사건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되 담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억대 바둑판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는 오직 윤9단의 마음에 들어있다. 이것은 결코 법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법은 1천만 엔에 해당하는 물질의 소유 여부를 판가름해줄지 몰라도 명예까지 지켜주진 않는다.
명예는 또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혼신의 노력으로 빚어가는 것이다.
이 대형악재로 잃게 될 한국바둑의 명예와 가치, 그리고 관심을 어찌 할 것이며, 증발해버릴 프로기사에 대한 존경심은 어디서 되찾아 올 것인가?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
이 악몽에서 헤어나 다시 꿈을 꾸고 싶다.
영원한 바둑계의 후원자가 30년 지기의 벗에게 2개의 바둑판과 함께 유언을 남긴다.
벗은 후원자로부터 바둑판을 받아 완벽하게 손질한 뒤 한국기원에 기증한다.
한국기원은 아담하게 바둑 박물관을 만들어 보관한다.
그리고 벗은 고인의 유족에게 바둑판 값을 개인적으로 성의껏 건넨다.
이런 아름다운 미담이 전설이 되어 두고두고 후세에 회자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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