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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저수첩

격투기 9단, 시골숙녀

오스트리아 이민, 타이젬 통해 향수 느껴

2008-05-04 오전 11:01:05 입력 / 2008-05-06 오후 4:26:27 수정

S#1. 유럽에서 띄우는 노래

5월 3일 새벽 3시. 타이젬 대국실 음방목록에 '시골숙녀'라는 타이틀이 떠올랐다. 입실자는 30명 남짓. 방송 중인 화면에 이마가 훤칠한 열혈남아 음방장이 소주 팩을 들고 인사를 건넨다. 대화창에 정겨운 인사들이 주르륵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알프스 산자락입니다. 오늘 어떤 모임에 나갔다가 한국 소주를 얻어왔는데 여러분들 이렇게 만나니 감회가 새로워 음주방송을 좀 할까 합니다."

호남사투리가 걸직한 중년 사내의 별명은 산적으로 통했다. 그런데 잠시 후 화면 뒤쪽으로 화사한 자켓을 입은 여성이 등장해 안주 쟁반을 내민다. 그러자 대화창에 '연어님, 안녕~'하는 인사들이 올라간다. 그녀가 활짝 웃더니 남편 옆에 마련된 또 다른 컴퓨터에 앉아 채팅을 시작한다.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남편은 마이크로 타이젬 기우들과 대화하고 아내는 부지런히 친구들과 자판으로 대화한다. 남편의 아이디는 '시골숙녀' 4단, 아내는 '연어' 7급이다. 부부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거주하는 재외동포인데 타이젬을 통해 향수를 달래는 중이라고 했다.

방송 도중에 남편은 소주 두 병을 가볍게 비웠다. 안주는 유럽의 빨간 무로 만든 깍두기와 백김치. 고춧가루가 떨어져 아무래도 싱겁다며 투덜거린다. 음방에 찾아온 기우들은 우리 노래를 유럽까지 신청해 듣는 게 좀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쪽에서 들려줘야 할 노래를 머나먼 이국 동포들에게 신청해 듣고 있으니 좀 미안하지 않느냐는 거다. 소주 기운이 얼큰하게 돌았는지 음방장은 노래보다 멘트를 많이 날리고 있었다.

"매콤한 김치가 먹고 싶습니다. 타이젬 기우님들 한국에 들어가면 꼭 얼굴 뵙고 한 잔 나눕시다."

정에 갈증이 난 대사들이다. 대화창의 기우들도 그들 부부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S#2. 오스트리아의 격투기 대부

'시골숙녀' 4단은 아이디의 이미지와 다르게 아주 터프하고 시원시원한 중년의 사나이다. 오스트리아에 체류한 지 23년 째. 그는 1986년, 단돈 1만원만 들고 오스트리아 비엔나 행 항공기에 탑승했다. 36시간 동안 비행했고, 거처를 정하지 못해 공원에서 9일을 노숙했다. 이민 초보자들 누구나 그렇듯 몇 년 간 말도 통하지 않는 오스트리아에서 죽을 고생을 했다.

그래도 헌신적인 아내(연어 7급)의 내조와 활달한 성격을 밑천으로 비엔나에 '윤 체육관'을 차리고 태권도와 합기도, 요가를 가르치는 종합격투기 사범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훗날 도장은 8개로 확장됐고, 그는 오스트리아 태권도 국가대표 팀 감독으로 선임돼 각종 세계대회에 출전했다. 무려 12년 간 감독 생활을 했으니 그 나라에서는 그야말로 격투기 마스터 입신 9단으로 통했다.

오스트리아에 태권도를 확실하게 보급하고 난 뒤, 그는 현지에서 카지노 사업 면허를 따내 사업가로도 맹활약하고 있다. 40대 후반이라 컴맹에 가깝지만 타이젬을 통해 바둑을 즐기고 기우들과 대화하면서 조금씩 인터넷 문화를 익혀가는 중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도 하기 전에 컴퓨터를 켜고 타이젬 아이콘을 누른다는 시골숙녀 4단. 거기서 음악도 듣고 조국 소식도 듣는다. 일이 없는 시간은 대부분 타이젬과 함께 한다. 아내 연어7급 또한 타이젬 마니아다. 미모에 온화한 성격 때문에 오히려 남편보다 발이 넓다는 소문이다.

유럽과의 시차 때문에 그들은 주로 새벽에 타이젬을 찾는다. 부부가 나란히 캠을 열고 기우들에게 표정을 보여준다. 다혈질의 남편과 애교 많은 아내의 대비가 묘하게 흥미롭다. 남편이 사회의 부조리에 흥분하고 타이젬에 간혹 암약하는 악플러나 스토커들의 횡포에 분노할라치면 아내는 뒷전에서 까르르 웃는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고 핀잔을 주면서 남편은 홧김을 빙자해 또 술 한 잔 꺾고 만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또 아내는 까르르 웃는다. 대화창의 기우들도 덩달아 웃을 수밖에 없다. 바둑 기력은 남편이 위지만 어쩐지 세상사는 내공은 아내 쪽이 윗길로 보인다.

S#3. 급기야 부부 각 방을 쓰다

알프스의 부부가 음방을 하는 도중 대화창에 정체불명의 숫자를 아이디로 쓰는 유저가 계속 딴지를 걸고 있었다. 우리끼리 통하는 유저수첩이니까 가감 없이 옮기자면-

"연어님, 엉덩이를 보여 줘!"

부부가 함께 방송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버젓이 마이크를 잡고 있는데 그 앞에서 노골적인 성희롱 공세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남편이 응수하지 않을 수 없다.

"숫자님은 왜 그러실까? 그런 거 봐서 뭐 해요. 숫자님 본심은 제가 잘 압니다. 우리 부부는 오스트리아에서 행수 병을 앓고 있으니 제발 여기서는 따뜻한 이야기만 나눕시다."

그래도 숫자 아이디는 줄기차게 '엉덩이'를 보여 달라고 채근한다. 보다 못한 기우들이 들고 일어나 숫자 아이디를 맹공하지만 그래도 철없는 심술은 그치지 않는다. 다행히 연어 7급이 그런 도발에 상처받지 않고 의연하게 미소로 일관한다.

꽤나 오랜 시간 음방의 게릴라는 좌충우돌하다가 제 풀에 지쳐 사라진다. 시골숙녀 4단이 비분강개한 어조로 인터넷 문화의 그늘에 관해 열변을 토한다.

"우리 부부한테 타이젬은 중요한 일상입니다. 그런데 간혹 저런 분들 때문에 마음 아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와 절친한 여성 음방장 몇 분이 저런 분들의 악의에 찬 장난 때문에 큰 상처를 입고 떠났습니다. 아무리 익명의 바다라 해도 타인에게 아픔을 주는 언행은 제발 삼갔으면 합니다."

두 병의 소주를 비운 그가 기우들에게 하소연했다. 절실하게 들렸다. 부부는 진실로 이 공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우리 부부, 오늘 같은 소동으로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대판 싸운 적 있습니다. 제가 새로 들어간 사랑가득  동호회에 같이 가입하자고 했더니 아 글쎄, 자기는 스카치 사범과 친하니 그 쪽 동호회에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솔직히 엄청 화가 났습니다. 제가 좀 단순하거든요. 하하하 부부 일심동체인데 각각 다른 동호회 활동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남편이 불 같이 화를 냈고, 그 날은 급기야 각 방을 쓰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이야기인즉슨, 사소하고 사소한 다툼이지만 그 다툼마저도 정겹게 보이는 시골숙녀와 연어 부부의 타이젬 항해일지를 여러분께 살짝 소개해 올린다. 고춧가루가 너무 그립다는 이 부부에게 정회원권이나 아바타 선물처럼 1Kg의 고춧가루를 보내실 분 어디 안 계시나요?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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