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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저수첩

쓸쓸한 듯 아니 쓸쓸한 rhee494(1단)

타이젬 소사이어티의 힘, 타이젬 마니아

2008-07-24 오전 9:28:49 입력 / 2008-07-24 오전 9:32:03 수정

S#1. 귀차니즘 VS 훈수
비 내리는 광주 충장로 밤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바람까지 거세 우산을 쓴 처녀들이 몹시 곤혹스러워했다. 전남 영암군 바둑 테마파크를 취재하고 올라오는 길에 하룻밤을 머물기 위해 광주로 들어오던 참이었다. 요즘 첨단지구나 상무지구가 신흥 유흥가로 비약하면서 도심 공동화 현상이 빚어져 충장로의 네온사인은 광채를 잃어가고 있는 듯했다.

숙소를 정하고 담배를 사기 위해 내려왔다. 충장로 초입 골목길에 가게가 보였다. 편의점이 대세를 이루는 시대에 어이없게도 충무로 한복판 담배 가게는 70년대 풍의 구멍가게였다. 담배 한 갑을 청했는데 주인이 일어서질 않고 손짓으로 취향대로 고르라며 진열장을 가리킨다. 담배를 고른 뒤 만원권을 내미니 그가 귀찮은 표정으로 일어나서 호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장사할 마음이 없나 보군. 그러니 이 좋은 자리의 가게를 이 모양으로 방치하는 거지.’
입안으로 그런 뇌까림이 굴러다닌다.
거스름돈을 건넨 뒤 주인은 다급히 자리에 앉아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였다.
딱- 친숙한 바둑 돌 소리가 울렸다.
“아아, 대국 중이세요?”
목을 길게 빼고 모니터를 살피니 아주 낯익은 타이젬 화면이 보였다. 그 순간 주인장이 보여준 권태로운 귀차니즘이 깡그리 용서되고 말았다.

“네, 중국 사람하고 두는데 이 친구가 사람 열 받게 해부네요.”
“왜요?”
“아, 만방인데도 돌을 안 던징게 환장해불겄네요. 이런 씨 발라먹는 수박 같은 쉐이가.”
“하하, 가끔 그리 끈질긴 도사견들이 있죠.”
“이 쉐이가 이 따구로 두면서 시간은 허벌나게 짧게 설정해불고 사정없이 초읽기 공격을 썰어붕께 꼭지가 돌아불겄네요.”
아하, 그래서 담배 한 갑 찾아줄 여유가 없었던 거로군!

“맨 아래 도움 요청 아이콘을 클릭하세요. 그럼 운영자가 와서 해결해줄 겁니다.”
“워메? 뭐 그런 방법이 있당가요? 운영자를 들멕이는 거 보니까 타이젬을 좀 아는갑소 잉?”
“아다마다요. 타이젬 리더스 회원인데.(엇흠 ^^)
“와따, 귀한 양반이시구만. 무쟈게 방가불구만이라우.”
내가 그의 귀차니즘을 조건 없이 용서했듯이 그 또한 나의 주책없는 훈수를 영광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타이젬 소사이어티의 힘 아니겠는가? 그런 우연으로 만난 오늘의 유저가 바로 rhee494(1단)이다.


S#2. 모르는 걸 어찌 하랴?
rhee494.
아이디의 작명취지는 간단하다.
앞의 ‘리’는 전주 이씨를 의미하고 뒤의 숫자 ‘494’는 담배가게니까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서 ‘사구 또 사’라는 아주 소박한 뜻을 담고 있다.

걸쭉한 남도사투리를 구사하는 중년의 이 사나이. 기보를 보니 무려 8천판에 육박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무료회원’이라는 점. 무료회원이라 해서 정회원과 차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아무래도 무료회원은 대국신청을 하기가 불편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8천판을 두었다면 도인(道人)의 경지에 다다른 기객이리라.

“돈을 어떻게 내는지 알아야 회원이든 뭐든 해먹지라우. 오래 전에 친구가 인터넷바둑을 두라고 컴퓨터에 깔아줍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루에 기본 열 판 정도 그냥 두고 있당게요. 바둑사이트의 행정적인 것이나 요령 같은 건 하나도 모르고 뒤져라 바둑만 두지라우. 하하하”
정회원을 어떻게 가입하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이것 저것 물어보니 쪽지 사용법도 모르고 채팅은 더더구나 해본 적 없으며 오로지 대국 기능과 음방 기능만 안다고 했다. 홈페이지의 뉴스 같은 콘텐츠 역시 전혀 몰랐다가 최근에야 대국실의 뉴스 배너광고를 눌러 얼떨결에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했다니 더더욱 존경스러워진다.

공짜로 타이젬을 몇 년간 즐겼던들 누가 뭐라 할까?
후미진 고수3방에서 때로 희희낙락하고 때로 울분에 못 이기면서도 무려 8천판의 기보를 남겼으니 조훈현 국수의 세계기록 2,500국이 부럽지 않으리라. 순박하지만 열혈기객이라서 정이 가는 인물이다.

유저수첩에 소개하고 싶다고 정중하게 청해본다.
“뭐라고라? 나 같은 놈 취재해서 어따 쓴다요? 공짜로 바둑 훔쳐두는 위인인디 쪽팔려불구만.”
“아닙니다. 494님 같은 분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타이젬 마니아라고 생각합니다.”

필자 나름대로 묘한 마음의 떨림이 있어 끝까지 우겨 허락을 받았다.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 조건부 타협안이 들어온다.
“글이야 어찌 쓰시든 괜찮은디 사진은 쪼께 곤란하구만이라우. 내 몽타주가 공개되믄 빚쟁이들이 급습할 수도 있응께 고것만 봐주씨요.”
우여곡절 끝에 구멍가게 앞 빈자리에 플라스틱 의자를 놓고 마주 앉았다. 맥주를 사양하니 큼직한 콘 아이스크림을 권한다. 그도 사양하면 그냥 가라 그럴 것 같아 마지못해 핥는 시늉이라도 냈다.


S#3. 바둑이라도 없었으면 어찌 살았을까?
rhee494(1단)은 40대 후반의 남도 사나이다. 기개가 충만해 사회적 불의를 보면 혀를 깨무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나이 어린 사람들이 담배를 사러 오면 반드시 주민등록증을 검사하기 때문에 자주 고객과 말다툼을 하는 편이다. 막말로 싸가지없는 인간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먹부터 날리는 바람에 파출소 출입을 동사무소보다 많이 하는 편이다. 담배가게로 3년 동안 벌어들인 수입을 주식에 베팅했다가 깡통을 차고 전전긍긍하는 중이라고 한다.

전남도청이 이전해버리는 바람에 충장로 상권이 허물어져 죽을 노릇이라고 푸념한다. 자신의 개인 경제가 황량한 것은 그래도 참겠는데 정치 쪽이나 사회 쪽으로 뭐든 비틀어지고 꼬이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대화 도중에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튀어나오고 플라톤의 ‘국가론’이 인용된다. 그런 비유의 구사가 예사롭지 않아 보여 학력을 취조했더니 명문대 사회학과 출신임을 밝힌다. 고교 졸업 후 8수 끝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고시 4수는 실패, 언론사 시험 3수도 실패해 서울 생활을 접고 낙향했다는 것이다.

비어있는 구 전남도청 청사와 썰렁한 충장로를 보면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것 같아 씁쓸하다는 494(1단).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아서 가게 천정에 판자로 다락방을 만들어 침식하며 쓸쓸한 나날을 견디는 48세의 노총각.

“바둑이라도 없었으면 워떠케 살았을지 깜깜하지라우.”
그는 무지무지한 장고파라고 했다. 그 누구와 두어도 제한시간을 다 소모하고 꼭 초읽기에 몰린다. 그런데도 하루에 열 판을 둔다면 거의 하루 종일 타이젬에 붙어있다는 증거 아닌가?
틀림없이 타이젬은 언제나 쓸쓸한 그를 조금이라도 덜 쓸쓸하게 위로해 준 시간여행의 여객선으로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 역시 하루도 거르지 않고 타이젬에 접속해 ‘동시접속자 수’의 그래프를 일정하게 지지해 준 기여자일 테고.

(rhee 1단님의 자유로운 영혼을 방해하는 일인지도 모르나 필자는 오늘 타이젬 1년 정회원권을 끊어 보내드릴까 한다. 좀 더 편하게 1만 판의 대국을 즐기시라고.)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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