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지기 위한 기록이지만….
기록은 깨어지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결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이전에는’ 깨어질 것 같지 않는 공고한 것이 있다. 바둑은 기록경기가 아닌지라 그나마 세워진 몇몇 기록은 수십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소중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조훈현의 최연소 입단(9세), 통산최다타이틀 획득(157개), 휴지사와 슈코의 최고령 타이틀 획득(66세) 등이 그것이다.
지난주 또 하나의 타이틀이 주인을 찾아갔다. 제5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결승에서 이창호가 목진석을 따돌리며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이창호는 올 초 십단전 우승에 이어 올 들어 두번째 우승을 거머쥐며 통산 136번째 타이틀을 획득했다고 한다.
157:136-.
웬만한 마니아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스코어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개인 통산타이틀 획득수이다. 157은 ‘바둑 신(神)’ 조훈현이 40여년을 넘게 일궈낸 역사이며, ‘바둑신동’ 이창호가 스승의 재주를 넘나들며 20년간 이룬 역작이 바로 136이다.
과연 뛰어넘을 수 있을까?
이창호가 득세하던 20대일 때만 해도 금세 가능했을 기세였지만, 과연 동력이 떨어지고 있는 지금, 막판 스퍼트로 20여개의 추가 타이틀 획득이 가능할 지 관심이다. 과연 이창호는 조훈현의 대기록 157을 경신할 수 있을 것인가. 한다면 언제쯤 가능한 것일까.
경신할 수 있다 쪽이 더 많다. 일단 야구로 치자면 조훈현은 9회 초 공격까지 마친 셈이다. 이제부터는 이창호가 9회말 공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록경신을 바라볼 수 있는 단초라도 마련하는 것이다.
일단 이창호는 아직 30대 중반의 ‘희망’이 있는 나이이고 나이 50대 중반인 조훈현이 추가로 타이틀을 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도 인간사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니, (과거 후지사와가 66세에 타이틀홀더가 된 바도 있으니) 조훈현에게 1번 정도 기회는 더 올 수도 있다고 보자. 그래도 21~22개만 추가하면 대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이니 조훈현의 활약상이 변수가 되지 않을 전망이다.
21~22개의 격차라는 것은 편하게 생각해서 이창호가 1년에 5개씩 추가한다고 보면 5년 내에 따라 잡을 수 있는 차이다. 이창호 역시 전성시절을 넘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염세적인 시각을 갖는다고 해도, 1년에 2~3개 씩 추가한다면 10년 정도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견도 아직은 소수이지만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10년 동안 이창호가 여전히 2,3위의 랭킹정도는 유지해야 한다는 가정하의 일이라는 것이다.
“조훈현 시대에 그가 이창호에게 쓰러질 것이란 사실을 몰랐듯이 이창호도 이세돌에게 밀리는 시대이다. 언제 어떻게 몰락할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밀려난다는 것은 한순간이다.”라고 모 프로기사는 지적한 것도 무시 못 할 얘기들이다. 한마디로 지금은 ‘급변’하는 시기임으로 20여개의 차이가 된다고 해도 장담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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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후면 40줄에 드는 나이
불과 5년전 만 해도 시기가 문제일 뿐 새로운 기록 경신은 당연시 되어왔다. 이창호는 기존의 조훈현의 강점에다가 과(科)가 다른 ‘끝내기’라는 부분을 업그레이드해서 나타난 ‘미륵불’이었다고 때문에 ‘40년 역작’이라는 157을 쉽게 넘을 것이라고 맹신했었다.
나이 40은 되어야 인생의 참맛을 알아서 바둑도 정점에 이른다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한 견해는 헌책방에서 힘들게 찾아낸 ‘사카다 전집’의 서문에 적혀있는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얘기해준다. 린하이펑이 득세하고 난 다음부터 40대 맹장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차라리 “인생 40 이후는 리바이벌로 사는 것”이라고 표현한 서봉수의 말이 좀 더 실감난다.
5년 후라면 이창호도 40줄에 들어선다. 나이 40은 새롭게 타이틀을 노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나이이다. 유창혁도 그랬고 요다노리모토도 그랬으며 마샤오춘도 그랬다. 40줄에 들어서 타이틀 구경은 거의 가물에 콩 나는 수준이었다. 물론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등 불세출의 기사들은 40대에도 가능은 했다. 이창호도 그들과 나란한 기사라고 했을 때 40대에도 딸 수 있는 가능성을 열려있다. 그러나 나이 40에 타이틀을 따내는 횟수가 30대 20대와 같지 않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여건이 과거와는 달라졌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전성 시절도 다르다. 조훈현이 가장 타이틀을 무섭게 쌓아가던 80년대에는 따낼 수 있는 타이틀 숫자가 훨씬 적었다. 1년에 평균 7~8개씩 실적을 올린 적도 있다. 전관왕에 올랐을 때 9개밖에 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창호가 득세하던 90년대에는 타이틀전도 늘어나서 그만큼 딸 기회는 많아져 96년에는 국내타이틀만 12개까지 수확한 적도 있다. 세계대회까지 생긴 90년대에는 한 해에 따낼 수 있는 기회는 20개가량으로 늘어났다.
또한 지금은 세계타이틀이나 국내타이틀이나 따낼 수 있는 확률은 비슷하다. 어차피 둘 다 선수권전이며 국내나 국외나 강자가 즐비하다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일례로 박영훈·이세돌·최철한· 조한승 등을 꺾어야 국내타이틀도 따낼 수 있으며 바로 그들이 외국의 강적으로 무찔러줘야만 세계대회 우승도 가능한 것이다.
라이벌들이 많아짐으로 해서 절대자가 전성기가 짧아진다는 점도 주목거리다. 따라서 조훈현이 30년을 전성시절로 보냈지만 이창호는 지금까지 십수년 정도, 좋게 봐줘도 20년밖에 전성기가 아니었다는 점도 명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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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의 전성 시절에는 서봉수가 유일한 라이벌로 타이틀 1,2개는 평균적으로 거머쥐고 있었다. 하찬석 김희중 정도가 당시에 힘을 썼으며 그러다가 후반부에는 유창혁·이창호가 득세했다. 조훈현을 이겨간 상대가 서봉수·하찬석·유창혁·이창호·루이나이웨이 등 고작 5명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창호는 타이틀전에서 이겨간 기사는 조훈현·서봉수·유창혁·목진석·이세돌·강동윤·최철한 등이며 세계무대로 눈을 돌리면 더더욱 그 수가 늘어나 10명은 훌쩍 넘기고 만다. 그만큼 대등한 기사수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정보가 빨라지고 대회방식의 변천도 한 요인
또한 바둑기술에 대한 정보가 오픈된 시절을 산다는 것도 이창호에겐 불리한 요인이다. 서봉수는 과거 조훈현의 쓰는 정석도 몰라, 오랜 기간 동안 실전에서 해결을 해야 했다고 푸념한 적이 있었다. 과거에는 하나의 정석을 알면 그것을 깨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요즘은 신형정석이 두는 순간 중국 일본에서 공동연구가 되는 때. 비기(秘技)가 드물어지고 설사 있다손 쳐도 수명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선수권전․ 속기전이 많아진다는 것도 기록을 염두에 두는 이창호에겐 불리한 것이다. 요즘 와서는 TV 인터넷 등의 발달로 팬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인지, 도전기를 펼치는 전통적인 기전이 별로 없다. 국수전·왕위전·기성전 등 극히 소수이다.
따라서 한번 타이틀을 따내도 이듬해에는 곧장 계급장을 떼고 백의종군을 해야 한다. 반면 도전기 시절에는 도전자가 선택되면 그 도전자만 이겨내면 되기 때문에 타이틀을 딸 확률은 곧장 50퍼센트가 되는 기득권을 누려온 것이다.
갈수록 속기화가 되기 때문에 열심히 두어 좋은 기보를 남기는 전통적인 방법과는 거리가 있다. 감각적이고 도전적인 바둑이 득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승자만 가리면 될 뿐이어서 적게 실수하는 편이 이기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대국방식이 계속 되는 한 타이틀을 줄줄이 따낸다는 것은 요즘을 사는 이창호에게는 불리한 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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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지켜보자
조훈현은 1974년부터 마지막 타이틀을 따냈던 2003년까지 30년간 157개이니까 1년에 5.2개 정도이다. 이창호는 1989년에 첫 타이틀을 딴 후 2008년까지 20년간 136개이니까 1년 평균 6,8개이다. 분명 이창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2인자로 내려앉은 최근 수년전부터는 급속한 하락을 경험한 바 있다. 이러한 변화된 신분이 이창호의 상승세를 얼마나 더 지속시킬 지 관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34세인 ‘20세기말의 절대자’ 이창호가 조훈현을 넘을 수 있을 것인지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새로운 기록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달성되는 것이라면 이토록 눈여겨 볼 가치도 없을 것이다. 과연 이창호가 조훈현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보시는지, 넘어선다면 언제쯤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는지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