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월 6일 김포공항. 1층 입국장 게이트가 열리고 ‘바둑황제’ 조훈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30여 대의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뜨렸다. 동시에 와아- 함성이 터졌고 1백여명의 환영객들이 황제를 에워쌌다.
한 사람의 바둑인이 이처럼 성대한 환영을 받아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아내 정미화씨는 북받쳐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남편의 손을 꼭 쥐었다. 중국 원정길을 동행해보았던 그녀는 마지막 결전장인 싱가포르에 따라가지 않았다. 피를 말리고 영혼을 태우는 현장이 너무나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녀는 용인의 사찰에서 날마다 천 팔십 배(拜)를 올렸다.
‘부처님, 남편이 후회없는 바둑을 둘 수 있게 평정심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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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승리를 기원하는 예불이 아니었다. 육체의 건강과 정신의 평정을 염원했다. 그러다 보면 승리는 자연스레 따라오는 고차원적인 기도였던 것이다.
남편의 손은 뜨거웠다. 그렇지 않아도 깡마른 체구의 그가 그날 따라 유난히 말라보였다.
“고생했지야?”
아내와 아이들 뒤에서 부모 조희아(규상에서 개명) 옹과 박순애 여사가 짧게 물어왔다. 그동안 어떠한 바둑시합의 결과를 놓고도 이렇다 저렇다 평을 하지 않았던 어른들이셨다.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체질의 조훈현이지만, 이 날은 속내를 활짝 드러내놓고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귀빈실에서 가진 기자회견.
결승 5번기에 대한 소감, 새로운 국제 룰에 대한 견해 등을 기자들이 물어왔다.
황제는 모처럼 자상하게 모범답안을 냈다.
회견이 끝날 무렵 한 기자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언제쯤 일선에서 은퇴할 생각인가? 그리고 이창호 이외의 또 다른 후진양성을 위한 계획은 없는가?”
이제 막 정상에 오른 바둑황제에게 은퇴시기를 묻는 당돌한 발언.
그러나 그 질문은 정상 등극 이후의 국내바둑 판도를 나름대로 예측한 기자의 예리한 후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황제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바둑두는 것 자체가 내 직업이고 소명이기 때문에 일선에서의 은퇴는 전혀 생각해 본 바 없다. 지금 이창호 3단을 내제자로 키우고 있는데 내 자신이 현역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후진양성은 나중에 생각하고 싶다.”
1989년 9월에 남긴 그 인터뷰는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02년 겨울까지도 아직 그대로 유효한 상태이다.
공항에서 종로의 한국기원까지 조훈현은 꽃가마를 타고 이동했다.
‘장원급제’를 축하하는 환영의 카퍼레이드.
길거리의 시민들은 세계바둑을 제패한 37세의 아름다운 청년 조훈현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시인 박재삼은 헌시를 지었고,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정치인들의 축하메시지가 쇄도했다.
한국기원 5층 건물 전체 벽면에 경축 플래카드가 걸렸고, 각 신문마다 1면 전체를 바둑황제 조훈현에 대한 찬사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정부에서 나라의 명예를 빛낸 공로를 높이 사 문화훈장을 수여키로 결정하자 조훈현은 우선 순위로 조남철 선생이 먼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꽃을 피운 자신보다 파종(播種)을 한 선생의 공로가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나란히 청와대로 가 훈장을 수여받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우리 바둑계, 문화와 스포츠 어느 쪽으로도 편입되지 못하고 장르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했던 바둑, 일본에서 활약하는 조치훈의 소식에 따라 울고 웃던 한국바둑이 마침내 자력으로 쟁취해낸 세계제패의 대쾌거-
조훈현이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 보여준 독무(獨舞)는 세계바둑계의 시선을 한반도로 돌리기에 충분했다.
이후 모든 대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출전 엔트리 수도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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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도 긴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고 집으로 돌아온 조훈현은 모처럼 제자 이창호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누구나 마주하면 세계제패에 대한 축하인사를 먼저 건네건만 돌부처와도 같은 창호는 꾸벅 고개만 숙였다.
이제 열 다섯의 여드름투성이 청소년.
스승은 씨익 웃으며 창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목례와 손길은 결코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다.
한국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입술을 열어 표현하진 않았으나 창호는 응씨배 결승대국 중계방송을 지켜보며 애타게 스승의 승리를 기원했으리라.
당시 3단이었지만 무패의 연승행진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던 창호는 이미 정상급 실력을 인정받은 상태였고, 계산이 정확하고 빠르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고수로 대접받고 있었다.
“창호야. 이젠 네가 해줘야 한다.”
조훈현은 익살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자기 몫은 다했다는 홀가분한 어조-
그러나 그 한 마디에 실로 깊은 의미가 함유되어 있었다.
제자가 어린 나이에 절륜의 무공을 떨치며 고단자들을 연파해도 좀처럼 칭찬한 적 없는 스승이었고, 남들이 입을 모아 창호의 기량을 높이 평가해도 아직은 멀었다며 자꾸만 제자를 품 속 자락에 감추었던 스승 아니었던가.
그처럼 평가에 인색했던 스승이 비록 장난스럽긴 했어도 어쨌거나 정식으로 제자에게 임무를 떠맡긴 것.
필자는 그 발언이 ‘후계자 책봉식’이었다고 감히 주장한다.
스토리 서두에 언급한 바 있듯이 응씨배 결승에서 패퇴한 녜웨이핑은 세계바둑인들을 향해 중국바둑의 잠재력을 은근히 과시했었다.
자신을 몰락시킨 조훈현과 다시 응씨배에서 만나려면 4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 시간은 녜웨이핑에게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깜짝 놀랄만한 후계자가 있다. 앞으로 주목해달라.”
녜웨이핑이 자랑한 제자는 다름아닌 창하오(常昊).
그의 예언에 걸맞게 창하오는 현재 세계바둑계의 거봉으로 우뚝 솟았다.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당부한 몫이 바로 현재의 판도에 비춰진다.
이창호는 스승이 건넨 바통을 한 손에 굳게 움켜쥐고 당당하게 선두를 질주함으로써 황제의 ‘황태자 책봉’이 옳았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옥좌에서 한발 물러난 상왕이 아직도 국제전에 기사로 출전해 제자의 앞길을 막는 적군들과 처절한 육박전을 펼침으로써 다소 짐을 덜어주는 상황이 흥미롭지만…^^)
해외원정에서 돌아온 황제는 가을부터 국내 기전의 타이틀을 방어하느라 곤욕을 치러야했다.
응씨배 대전(大戰) 때문에 이월된 전쟁의 스케줄이 폭주했다.
전선(戰線)은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사방에 형성되었다.
기왕전에서 서봉수가, 대왕전과 기성전에서 유창혁, 그리고 최고위전에서 제자 이창호가 도전장을 던져왔다.
전방위에서 몰려오는 치열한 도전.
전천후로 임해야 했던 처절한 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