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사신기
와호장룡-이창호vs창하오④
2008 라이벌 열전! 기왕사신기
2009-01-01 오후 4:48:32 입력 / 2009-01-01 오후 5:53:01 수정
| 2008년 삼국의 고수들이 총출동해 파란만장한 승부의 드라마를 연출했으나 정상 8부 능선의 윤곽을 보면 4인의 강자가 포착되었으니 그들은 이창호, 이세돌, 구리, 창하오. 타이젬 간판 김종서 작가가 올 한해 바둑계 승부의 드라마를 황해대전(한·중 4인방의 시대), 유아독존(이세돌vs구리), 첩혈쌍웅(이창호vs이세돌), 와호장룡(이창호vs창하오), 19로의 風車 등 5개의 스토리로 나눠 화려한 필체로 구성됐다. 타이젬에서 준비한 강력한 연말·연시특집은 12월 29일 부터 1월 2일까지 차례로 연재된다.
와호장룡 - 이창호 VS 창하오 와호장룡(臥虎藏龍) 주윤발이 출연했던 영화제목이다.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누워있는 호랑이, 숨어있는 용이다. 피치 못할 사연이 있어 강호에 나오지 못하고 전설의 영웅들이 은신처에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형상이다. 눕거나 숨거나 늠름한 영웅의 기세는 아니지만 비장한 복선이 감지되지 않는가? 한때 산천초목을 뒤흔들었던 청룡과 백호가 새로운 강자들에게 밀려 계곡으로 추락했으나 눈빛만큼은 아직 정상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놈들! 주작과 현무(이세돌과 구리) 우리들의 비급이 널리 노출되어 급습을 당했다만 아직 천하쟁패는 끝나지 않았다.(이창호와 창하오) 기왕사신기 1화로 잠깐 리와인드해본다. 1988년 본격적으로 중원을 쟁탈하기 위한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륙과 반도, 그리고 열도의 영웅들이 출전했다. 치열했던 전쟁은 장장 1년에 걸쳐 지속됐으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절반씩의 패자들이 눈물을 머금고 철군했다. 그 전국시대에 가장 위세를 떨쳤던 열도(列島)군단을 진압해버리고 천하를 반분(半分)한 영웅들이 조훈현과 네웨이핑. 그들은 20세기와 천하를 걸고 대결했다. 그리고 용호상박(龍虎相搏) 엎치락뒤치락 명승부를 펼친 끝에 깔끔한 마침표를 새겼다. 조훈현, 바둑황제 등극! 반도는 열광했고 대륙은 침통했으며 열도는 그냥 썰렁했다. 최후에 한칼을 맞은 대륙의 수문장 네웨이핑은 승부의 마침표를 쉼표로 돌리고픈 한 마디를 날린다.
조훈현 : 어라, 희한하네? 나도 새끼를 인공포육 중인데 어쩐담? 원한이 대를 잇겠구만. 이 대목까지 모두 기억하시리라. 그때 네웨이핑은 가는 곳마다 후계자(창하오)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조훈현은 후계자(이창호)를 치켜세우지 않았다. 스타일의 차이도 있겠지만 이창호는 벌써 이유식을 끝내고 육식을 시작한 타이틀홀더였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세상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후계자들은 자연스럽게 대륙과 반도의 수장이 되어 세기말부터 부딪히게 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대결에서 네웨이핑의 호언장담은 조훈현의 미소에 또 한 번 녹아버리고 만다. 청출어람. 양웅의 제자들이 올 곧게 성장해 명승부를 펼쳤으나 시쳇말로 게임이 되지 않았다. 데자뷰라고 했던가? 언젠가 보았던 그림을 다시 보듯 창하오는 스승의 아픔을 대물림하게 된다. 세계대회 23관왕에 국내대회 110회 우승을 기록한 이창호가 절대지존으로 천하를 누빌 때 창하오는 발판이나 부교 역할을 감내해야 했다.
어찌 하늘은 한 시대에 두 영웅을 내셨단 말인가! 그들의 대결은 1997년~2000년 4년 내리 한.중 천원전을 통해 시작되었다. 매년 3번기로 치러진 천원전에서 이창호는 97년 딱 한 판을 내주고 모조리 완봉승을 거두어버렸다. 그리고 2000년 잉창치 배 결승에서 3:1로 제압. 그때까지 16판을 두어 14승 2패였으니 라이벌이라고 하기에 함량미달의 상대였다. 그러나 창하오는 이듬해 제6회 삼성화재 배 준결승전에서 이창호를 만나 마침내 2:1 승리를 거두었다. 이창호가 그때까지 세계대회 번기 승부에서 처음 당한 패배였다. 드디어 창하오 시대가 도래했다고 중국 언론이 목청을 드높이려는 타이밍인데 이게 또 무슨 날벼락인가? 조훈현 : 어쩌다 한 번 이창호를 이겼다고 천하를 얻었다 생각하면 곤란하지. 나까지 넘어야 왕관을 쓸 수 있다네. 창하오 : 에이, 우리 사부님은 뒷전으로 물러나 후진양성 중이신데 어르신께서도 이젠 쉬실 때가 됐잖나요? 그랬었는데 창하오는 백발이 희끗희끗한 라이벌의 스승 조훈현에게 어이없이 무너져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그러면서 준우승만 여섯 번 기록하는 만년 2인자로 중원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중국 언론은 그런 창하오에게 성장 판이 닫혀버린 천재라고 질타했고 그러는 사이 6소룡 10소호로 불리는 강호들의 전쟁에서도 자꾸 치어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창하오 : 물론 괴로웠습니다. 세계대회만 나가면 준우승을 하는데다가 이창호와는 만나면 만날수록 전적의 격차가 벌어졌으니까요.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국내기사들과의 시합에서도 지는 일이 많아지고 국제대회에서 만나는 다른 기사들과의 성적도 좋지 않아졌습니다. 다행인 것이 그 당시에도 자신감을 잃지는 않았어요. 결국 마지막에 기회를 잡았죠. 바로 잉씨배에서의 우승이에요. 정말 한때는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할지 몰랐을 때가 있었습니다. 특히 이창호 9단과의 승부를 생각하면 말이죠. 천만 다행히도 그 슬럼프의 기간이 아주 길지는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이창호에게 당하고 당했지만 창하오는 묵묵히 뒤를 밟았다. 10년 동안 위창호의 그림자만 따라왔노라 겸허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5회 잉창치 배에서 최철한을 꺾고 대망의 챔피언이 된 것이다. 위빈 : 창하오는 진정한 바둑 인입니다. 고통스러운 세월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집과 기원만 왕복했어요.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린 게 있다면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준 일 정도밖에 없을 겁니다. 바둑을 너무나 사랑한 창하오가 최근 상승세를 타는 건 당연합니다.
잉창치 배를 차지한 창하오는 여세를 몰아 2007년 삼성화재 배에서 이창호를 2:0으로 제치고 우승했고, 2008년 초 농심 배 단체전에서 파죽의 4연승으로 중국에 우승컵을 바쳤다. 또 춘란 배에서도 결승에 올라 이창호와 숙명의 라이벌 전을 준비한 상태. 이쯤 되면 창하오를 와호장룡에 비유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창호와 창하오의 라이벌 스토리라 균형을 맞춰야 하겠지만 창하오의 아픈 이야기만 적어도 이창호의 존재는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창하오 : 중국은 15년 전 진로 배 때부터 단체전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창호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항상 한국의 마지막에 이창호란 벽이 있었지요. 이창호는 지는 법을 몰랐어요. 개인전과 달리 단체전에서 이창호는 무서운 집념으로 승부에 임했어요. 책임감의 무게가 달랐기 때문이겠죠. 결국 이창호를 이기지 못 하면 중국은 한국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겁니다. 농심 배를 끌어안고 창하오가 감격스럽게 내뱉은 고백이다. 결국 이창호를 극복해 낸 주역은 창하오였다. 구리가 중국의 선두주자라고 하지만 단체전에서 승부를 결정지은 해결사는 바로 창하오였던 것이다.
호사가들은 창하오의 부활을 두고 ‘와신상담(臥薪嘗膽)’이니 ‘절치부심(切齒腐心)’이란 표현을 쓰지만 정작 창하오는 손을 가로 젓는다. 창하오 : 그런 표현 가당치 않습니다. 저는 이창호를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솔직히 그와 대국할 때는 승부를 겨루기보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기분으로 임하고 했어요. 고수의 바둑을 즐기고 향유 하는데 즐거운 일이지요. 그러니 그런 고사성어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요. 이것이 창하오의 마음이다. 그는 이창호의 부진을 염려하고 건강을 걱정해주는 진정한 친구다. 이창호의 스승인 조훈현을 선생님으로 칭하고 한국의 바둑 팬을 사랑하는 친한 파 중국기사다. 이창호 역시 창하오를 아끼고 그리워한다. 둘은 닮았다. 기풍도 그렇고 성품도 그렇다. 남방장성 기념대국에서 둘은 보란 듯이 4패 빅의 우정 어린 기보를 남겼다. 누가 마음먹었으면 승부가 어찌 되었을 거란 짐작이 난무했지만 어차피 승부와 관계없는 기념대국인데 굳이 따져 무엇 하랴? 와호장룡, 한때 잠깐 열을 식혔던 두 영웅은 기축년(己丑年)에 풀섶을 툴툴 털고 일어나 다시 한 번 천하를 뒤흔들 것이다. - 황해대전(한·중 4인방의 시대)① - 유아독존(이세돌vs구리)② - 첩혈쌍웅(이창호vs이세돌)③ - 와호장룡(이창호vs창하오)④ - 19로의 風車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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