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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기객 권재룡] 고성 양산박①

프로를 열망하는 쳥년들에게 조건 없이 후원하는 의사 권재룡의 삶 소개

2009-04-02 오후 1:45:21 입력 / 2009-04-02 오후 3:50:36 수정

타이젬은 2009년부터 매달 특집기획으로 우리 바둑계에 보이지 않게 헌신한 은인(恩人)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발표하고 있다. 집필을 맡은 김종서 작가는 치밀한 자료조사와 현장답사를 통해 마치 방송 프로그램처럼 생생하게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간 인물들을 되살려 바둑 팬들에게 다시 한 번 은인들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모자이크하고, 떠도는 이야기들을 수집해 아름다운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재창조해내는 타이젬 스페셜은 바둑과 문학의 접목, 기억의 영상복원, 바둑문화의 기록과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앞으로도 계속 야심차게 진행될 것이다.

[낭만기객 권재룡]은 [기왕사신기][이붕전설][덕영비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리즈 작품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에 걸쳐 경남 고성읍의 한 병원 옥탑방을 무대로 프로 입단을 열망하는 청년들의 열정과 애환, 그리고 그들을 조건 없이 후원했던 의사 권재룡의 삶을 소개한다.

4월 2일(목) - 제1화 : 고성 양산박
4월 3일(금) - 제2화 : 30년 만의 귀환
4월 5일(일) - 제3화 : 옥탑방의 러브레터
4월 6일(월) - 제4화 : 달아 노피곰 도다샤
4월 7일(화) - 제5화 : 뿌리를 찾아서

S#1. 프롤로그 - 안개 바다에 서서

안개 자욱한 새벽 남녘바다에 섰습니다.
어렴풋이 선착장이 보였지만 수평선과 지평선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뭍과 바다는 안개를 통해 은밀한 숨결을 교환하고 있었지요.
몽롱한 망막을 스크린으로 70년대의 칙칙한 흑백영상이 슬로우 모션으로 가득 차오릅니다.

30년 전인가 봅니다.
이 곳 땅과 바다가 만나는 소읍에서 아름다운 바둑 이야기가 펼쳐졌다는데 그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막막했습니다.
땅 끝까지 왔으니 누군가를 찾아 떠나야하거늘 정처가 딱히 없어 이 바다에 오래도록 서성거릴 판이었습니다.
까마득한 그 시절 경남 고성읍의 한 병원 옥탑 방에서 바둑 영재들이 모여들어 양산박을 이루고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그 이야기에 매료돼 꼭 찾아가보고 싶었습니다. 찾을 길이 없어 그저 열망으로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게 [19로의 유목민]이었지요. 타이젬 소설 코너를 통해 틈틈이 원고를 채워갔지만 상상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그곳에서 바둑 혼을 키운 기사들과 후원자 권재룡 박사님을 욕되게 할까봐 중도에 소설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권박사님과 애독자 여러분께 빚을 지게 된 거지요.

그 부채의식은 이따금 편두통으로 관자노리께 혈관을 압박하곤 했습니다. 아마 5년 정도 시달린 듯싶습니다.
그다지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춘삼월 온기가 감돌자 무작정 남쪽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울산과 부산에 들러 관계자들을 만났으나 그 시절 동산병원을 기억하지만 위치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지요. 그러나 좁은 읍내인데 한 바퀴 돌면 찾아내겠지 하는 막연한 심정으로 고성까지 달려갔습니다.



S#2. 현장을 찾아내다!


이 건물이 바로 30년 전을 감안해 그린 고성 동산의원입니다.
다행스럽게 지금도 건물은 그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찾아간 비하인드 스토리는 다음 편에 소개하지요,^^)

1층은 권재룡 박사가 진료하는 병원이었고 2층은 입원실, 3층은 권 박사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살림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옥상에 팔각정 형태로 지어진 공간이 한국 최초의 바둑사관학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바둑도장이었습니다.

권 박사는 그런 이름보다 그냥 강호의 준걸들이 운집한 ‘양산박이라 칭하는 걸 좋아했다네요. 저 옥탑 방에서 무수한 바둑청년들이 함께 숙식하며 바둑을 연구했습니다.
그 면면들을 소개하자면-

[프로기사] 임선근, 이주용, 강만우, 박상돈, 김기헌, 장명한, 차수권, 김동면, 정대상, 조대현, 문용직, 양재호, 허장회, 임창식, 김일환, 황원준, 이기섭 등.

[아마추어 강호] 박수현, 박성균, 신영철, 유경남, 최기남, 제정제, 박영렬, 임동균, 이학용, 조병탁, 이상식, 강정길, 이수명.

이런 분들이 70년대 후반 19로의 사막을 떠돌다 경남 고성에 머물며 미래를 모색했습니다. 이 중에서는 세상을 떠난 분도 있고 잠깐 머물다 스쳐간 분도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한국의 바둑계 프로와 아마추어 양대 세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중견 바둑 인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지요.

저토록 많은 인걸들을 자신의 병원 옥상에 불러 모아 뒤를 봐준 은인 권재룡 박사를 이 따뜻한 봄날에 다시 만나보고 싶습니다.



S#3. 흑백의 기억


▲ 1970년대 후반 연구생들과 함께 옥상에서 포즈를 취한 권재룡 박사.

당시의 사진을 찾아냈습니다. 같은 시기에 합숙하면서 바둑 공부를 했던 옥탑 방 동기들입니다. 가운데 항일의병 복장 차림으로 앉아계신 분이 바로 권재룡 박사입니다. 편안한 인상이지만 범상찮은 기운도 느껴집니다.

저 파릇한 청년들 중에서 매년 프로 입단 자들이 탄생했지요. 정말 양산박으로 부를만합니다. 여러분께서도 낯익은 얼굴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저 모든 얼굴들을 식별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댓글로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타이젬 스페셜에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드리는 고액사은 퀴즈입니다.^^)

고성 양산박은 특별하게 정해진 규칙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누구나 올 수 있고 아무 때나 떠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호에 소문난 청년고수들이 제 발로 걸어왔고 아는 친구들을 불러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만들어진 겁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운집했기에 실전훈련을 쌓기 좋았고 최신정보들이 가득해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도 좋았습니다.



S#4. 환상의 바둑도장


▲ 청년 박수현과 권재룡 박사의 대국.

팔각정 옥탑 방 내부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한 장면입니다.
강1급 기력의 권 박사와 수제자로 통했던 박수현 씨의 대국 장면입니다.
마주앉아 무릎을 꿇고 수담을 나누는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대국자 뒤쪽으로 책장이 보이지요? 팔각정인 만큼 방 내부의 팔각 벽 모두 저렇게 책장이 둘러쳐져 있고 바둑서적이 가득 꽂혀 있었습니다.

권 박사는 틈틈이 바둑 선진국인 일본에서 다양한 바둑서적을 구입해 비치했고,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찌, 산케이 신문을 정기구독했다고 합니다. 오로지 신문에 게재된 기보를 통해 일본바둑의 정보를 얻기 위한 방편이었지요. 월간 기도 지와 바둑 지 구독은 너무나 당연했구요. 그래서 저 공간은 바둑연구생들에게 정말 환상의 도장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문득 묘한 우연 하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자연발생적이긴 하지만 그 당시 고성 동산의원 옥탑방은 프로지망생들의 도장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기원 원생들도 홍익동 한국기원 건물의 옥상에서 수련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경지에 들어서기 위해서 기를 모으려면 아무래도 옥상이 적합한 게 아닐까 추리해봅니다.



S#4. 자칭 國手의 친구

다시 두 사람의 대국 장면의 방향을 틀어 봅니다.
권재룡 박사의 관상이 확실하게 다가옵니다.
머리만 보이는 인물이 박수현 씨입니다. 이 분도 당시 프로 입단을 준비했던 지망생이니 아마 최강의 기력을 지니고 있었겠지요. 지금도 박수현 씨는 심심찮게 아마추어 바둑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으며 울산에서 바둑도장을 운영하고 있지요.

그런데 권 박사가 백 돌을 쥐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권 박사의 기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내가 조남철이를 잘 안다 아이가.”

그는 가끔 한국바둑의 대부 조남철 국수의 이름을 아주 쉽게 부르곤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국수를 친구처럼 막 불렀기 때문에 청년들은 경외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 박사가 병원을 개업하지 않고 바둑 공부에 정진했다면 혹시 조남철 국수와 타이틀을 놓고 겨뤘을 지도 모른다고 가정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권 박사가 대수롭지 않게 부르는 ‘조남철’의 호칭에 어쩌면 바둑의 길을 택하지 못한 당신의 회한이 담겨있는 지도 모릅니다.

"근데 조남철이는 내를 잘 모르니까 오해하지덜은 마러."
이렇게 구수한 유머를 구사하는 권 박사는 참으로 청년들에게 따뜻한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S#5. 기억의 창고

▲ 70년대 옥탑방 리그 장면.

옥탑방의 연구생들은 풍성한 자료와 쟁쟁한 라이벌들 속에서 바둑에만 몰두했습니다. 권 박사는 병원에서 진료하다가 자주 옥탑 방에 올라왔지요. 청년들의 승부욕을 자극하기 위해 자주 리그전을 개최했습니다. 보통 리그전의 상금은 5만원이었습니다.

권 박사가 봉투에 상금을 넣어 주었습니다. 입단을 목표로 공부하는 청년들이라 실력들이 짱짱해서 리그전이 벌어지면 그 누구도 일방적인 독주를 못 했다지요. 우리 한국바둑은 저런 환경에서 잡초처럼 생명력을 얻어 자란 겁니다.

조남철, 김인, 조훈현으로 이어지는 일본유학파 일인자들의 계보가 한국바둑사의 주류라면 이 곳 출신 프로기사들과 아마추어 강자들은 비주류에 속하겠지만 바둑사의 저변을 확대하고 질량을 풍부하게 키운 공신들이기도 합니다. 당대 최고의 지존으로 우뚝 선 걸출한 인물은 없었을지라도 고통스런 승부사의 길을 선택해 가시밭길을 걷고 지금도 거의 모든 분들이 보급에 힘을 기울이고 있으니 이 사진 속 청년들에게 기꺼이 박수를 보내줄 만합니다.



S#6. 제법 큰 상금

리그 전 대진표를 붙이는 장면입니다. 당시 옥탑 방에 청년들이 여러 명 합숙했는데 각각 역할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고성에 입성한 박수현 씨가 방장 역할을 맡았고 나중에 들어온 신참들이 맡는 직책이 바로 차트사입니다. 리그전 벽보를 그리고 성적을 표시하는 업무를 맡게 됩니다.

이수명 : 저는 우연히 고성에 들렀는데 연구실 분위기가 너무 좋아 3개월 정 도 머물렀습니다. 부산에서는 상당히 센 축에 속하는 기원1급이었 는데 옥탑 방에서는 감히 바둑 둔다는 말도 못 꺼냈지요. 반 치수 정도 아래쪽이어서 늘 차트 담당이었습니다.

그 방 멤버들은 유동적이었습니다. 바람처럼 찾아왔다가 훌쩍 떠나는 이도 있었고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서 찾아오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원이 몇 명이 되든 세 끼 꼬박 권 박사의 병원에서 제공했습니다. 입원실에 밥을 차려주는 찬모(饌母)가 있어 늘 배를 채울 수 있었지요.


리그전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때도 있지만 대개 5만원의 상금은 함께 나눠 쓰기로 공모(共謀)를 합니다. 시합이 끝나면 우르르 고성 읍내로 나가 막걸리 파티를 했습니다. 동태찌개 한 뚝배기 시켜놓고 몇 주전자씩 비우곤 했습니다. 혈기왕성한 청년들에게 70년대는 너무 암울했지요.
또 바둑계는 더더욱 캄캄했구요. 그들에게 고성의 막걸리는 그 불안감을 해소시켜주는 영약이었을 겁니다. 술도 술이지만 막막한 시대 아득한 19로를 동행할 친구들의 존재가 훨씬 위안이었겠지만 말입니다.



S#7. 쓸쓸해도 좋은 날

그 시절은 어둡고 가난하고 쓸쓸했습니다.
고성에 모인 청년들은 재능이 보석처럼 빛나는 천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업하는 일반적인 청년들보다 훨씬 앞길이 불투명해 우울증에 시달렸으리라 봅니다.
그런 이들에게 고성의 옥탑방은 도피처이며 치유의 장소이기도 했겠지요.
아니 어떤 이는 차라리 그 시절이 인생의 절정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하더군요.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청춘을 저당잡혔습니다.
그리고 꿈을 키웠을 테지요.
그 꿈이 이뤄진다한들 얼마나 호사스러운 미래가 보장됐을까요?
그 슬픈 확신을 곰씹으며 청년들은 하루의 전부를 바둑에 바치고 골머리가 지끈거리면 앞 골목을 산책했다고 하네요. 지금도 동외동 골목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얼크러져 있었습니다.

▲ 고성읍 동외리 동산의원 앞 골목.


(4월 3일, 제2화 : 30년 만의 귀환 편이 소개됩니다.)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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