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젬은 2009년부터 매달 특집기획으로 우리 바둑계에 보이지 않게 헌신한 은인(恩人)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발표하고 있다. 집필을 맡은 김종서 작가는 치밀한 자료조사와 현장답사를 통해 마치 방송 프로그램처럼 생생하게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간 인물들을 되살려 바둑 팬들에게 다시 한 번 은인들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모자이크하고, 떠도는 이야기들을 수집해 아름다운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재창조해내는 타이젬 스페셜은 바둑과 문학의 접목, 기억의 영상복원, 바둑문화의 기록과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앞으로도 계속 야심차게 진행될 것이다.
[낭만기객 권재룡]은 [기왕사신기][이붕전설][덕영비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리즈 작품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에 걸쳐 경남 고성읍의 한 병원 옥탑방을 무대로 프로 입단을 열망하는 청년들의 열정과 애환, 그리고 그들을 조건 없이 후원했던 의사 권재룡의 삶을 소개한다.
4월 2일(목) - 제1화 : 고성 양산박
4월 3일(금) - 제2화 : 30년 만의 귀환
4월 5일(일) - 제3화 : 옥탑방의 러브레터
4월 6일(월) - 제4화 : 달아 노피곰 도다샤
4월 7일(화) - 제5화 : 뿌리를 찾아서
S#1. 봄날 읽는 가을 童話
30년 전 권재룡 박사의 병원이자 열혈바둑청년들의 연구실이었던 건물의 현재 모습입니다.
1층은 식당, 2층은 카페로 바뀌었지요.
카페의 상호가 나름대로 운치 있지만 먼 길을 찾아온 나그네는 그 간판 아래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맙니다.
어쩐지 저렴해 보이는 저 카페에서도 소읍에 걸 맞는 로맨스가 맥주거품처럼 뭉게뭉게 생성되기도 하겠지요.
카페와 식당도 존재이유가 분명히 있겠습니다만 어쩐지 슬펐습니다.
건물 앞에서 옥상으로 오르기가 차마 두렵더군요.
지나간 추억은 추억 그 자체로 이미 결말이 완성된 드라마인 것을 굳이 헤집어 허탈한 현재의 주소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지 망설여졌습니다.
30여 년 전 이 곳에 머무른 적도 없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그네가 그렇게 조바심으로 서성거렸습니다.
네, 다분히 감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낭만기객]의 여정을 필자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여러분들도 느낌이 다르지 않으리라 봅니다.
고성 바둑기행을 하는 우리들의 깊은 페이소스(憂愁)는 바둑에 대한 순정(純情)과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S#2. 우리들의 천국에 오르며
그녀들이 먼저 옥상에 올라가 손짓했습니다.
카페는 닫혀 있었고 건물 전체에 사람이 없다고 했지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고성읍 시가지 파노라마 풍경입니다.
시가지는 30년 동안 발전했을 테지만 건너 편 남산이나 거리의 뼈대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겁니다.
양산박의 준걸들은 이 옥상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저런 저잣거리를 조감도로 내려다보면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된 자부심을 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S#3. 옥탑 방 팔각정
옥상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팔각정입니다.
새로 페인트칠을 해서 산뜻해 보입니다.
어떻게 1970년대에 권재룡 박사는 이런 형태의 독특한 건물을 지었을까요?
음양오행설을 참작해 팔각정을 짓고 그 안에서 바둑을 연구했다는 사실이 우연으로 지나치기엔 뭔가 오묘한 포석으로 느껴집니다.
저 팔각정 내부의 상상도에서 청년들의 시선은 천정을 향합니다.
그들의 눈에 비쳤을 팔각정 천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겠지요.
그러나 카메라 앵글을 PAN DOWN하는 순간
아! 할 말을 잃고 맙니다.
제1화의 흑백사진을 통해 옥탑 방의 분위기를 엿본 분들이라면 지금 이 순간 가슴이 먹먹할 겁니다. 온갖 생활의 잡동사니들이 가득한 창고로 변한 이 공간-
그 안에 오래 머무르며 양산박 준걸들의 애환을 떠올리고 싶었건만 잠시도 서 있기 힘들었지요.
씁쓸했습니다.
S#4. 동산의원 담장 안집의 소녀
 | | 병원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한옥이 ‘안집’으로 불립니다.
그 집 마당에서 야채를 다듬는 여자가 어렴풋이 보이죠?
이 풍경은 30년 전에도 비슷했을 겁니다. 저 집에 아주 예쁜 여중생 쌍둥이 자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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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안집 마당에서 올려다 본 병원입니다. 옥상은 당연히 보이지 않지요.
이 각도로 과거에 안집 소녀들이 바둑 두는 오빠들을 무던히 올려다봤다는 사실을 지금 환갑이 다된 그 오빠들이 눈치 챘는지 모르겠습니다.
옥상에서 종이비행기 편지를 날린 오빠가 있다면 그이는 혼자만 살짝 알고 있겠네요. |
그 쌍둥이 자매 중 동생 구경수 씨가 아직도 안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고성에서 가장 맛깔스럽게 곰탕을 잘한다는 명물식당을 올케와 함께 경영하고 있습니다.
공중파 방송 다큐멘터리라면 간판 앞에 선 포즈를 찍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타이젬스페셜의 이름으로 과감하게 홍보사진 걸어버립니다.
그 대신 빅딜이 이루어졌습니다.
“바둑 두는 오빠들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보시죠.”
“오빠들 이야기 다 할라카믄 삼박 사일은 걸릴낀데요.”
그 순간 후각의 레이더가 기민하게 돌아갑니다.
“흐음, 뭔가 사연이 가득한 모양이네요?”
그러자 옆에 앉은 권 박사의 장녀 다미 씨가 배시시 웃습니다.
 | | “오빠들이 가끔 옥상에서 기타를 치며 팝송을 부르곤 했어요. 시골 여학생들한테 그 모습은 환상적이었죠. 지금으로 친다면 동방신기나 빅뱅과 다를 바가 없었죠.”
“구체적으로 누가 불렀나요?”
“이주용 오빠는 비지스 노래를 잘 불렀어요. 정말 감미로운 미성이었어요. 또 장명한 오빠는 엘비스 프레슬리 곡을 자주 불렀구요.”
듣고 있던 구경수 씨가 그때 광경이 눈에 선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습니다.
“오빠들 인기많았지예. 생각해보이소. 옥탑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분들이라 얼굴도 하얗고 머리들이 팍팍 돌아가는 천재들 아닝교? 거기에 기타줄 퉁김시로 ‘러브 미 텐더 러브 미 트루~’읊어불믄 고마 시골 가스나들 뻑 가삐맀다 아입니꺼. 한마디로 로망이었심더. |
S#5. 양산박 인기투표
곰탕집 구경수 씨가 여중동창 다미 씨에게 수육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어줍니다.
"고기는 얼마든지 있으니께 목젖까지 꽉 채워 묵그래이."
“장사하는 집인데 민폐가 많네.”
“가스나. 씰데없는 소리하고 자빠진네. 내 어릴 적에 느그 병원에 놀러가서 을매나 밥을 많이 얻어 묵었는데? 그 신세 갚을래믄 섬때기로 퍼들고 와도 부족하다 아이가?”
가늘게 감기는 눈꼬리, 환한 미소에 티끌만큼의 가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 놀랍게도 완벽하리만큼 당시 오빠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성 소녀들의 눈에 비친 양산박 멤버들의 인물평을 한 줄로 간략하게 옮깁니다.(혹시 평가의 우열이 심하더라도 사범님들 노여워하지 마시길^^)
박수현 : 오로지 바둑에만 정진하는 공자 맹자 스타일.
임선근 : 동안에 쾌활한 성격. 잠꾸러기로 소문남.
김기헌 : 부지런하고 호탕한 양산박 수문장.
문용직 : 신중하고 늘 생각에 잠긴 철학자.
강만우 :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했던 행동파.
이주용 : 감미로운 음성의 음유시인.
박상돈 : 이름에 ‘돈’자 들어갔다는 이유로 그냥 손해를 봄.
장명한 : 만능 스포츠맨에 짝퉁 엘비스 프레슬리
정대상 : 급한 성격의 휘발유 사나이.
이기섭 : 선생님을 연상케 하는 점잖음.
박성균 : 옥탑 방 최고 미남. 댄디보이.
최기남 : 느릿느릿 충청도 양반.
이수명 : 유머러스한 낙관론자.
 | | 안집 곰탕 창틀 너머로 보이는 기와지붕. 오빠들의 기억도 지금은 저렇게 박제가 되었지만 영원히 선명하겠지요. 그때는 너무나도 빛나는 청춘이었으니까. |
S#6. 바둑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성 동산병원 옥탑 방까지 함께 순례했습니다.
이제 양산박 준걸들과 권재룡 박사의 시간들을 찾아 떠날 차례입니다.
바둑이 밥을 보장해주지 못했던 그 시대에 팔도의 천재들이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고성까지 모여들었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어떻게 꿈을 조각했는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다음 4화 예고 편으로 바둑청년들의 쓸쓸한 초상 한 컷을 소개합니다.
고성 양산박 스토리를 연재하자 전국 곳곳에 자리 잡고 바둑을 보급하고 계시는 사범님들이 속속 연락을 취해오기 시작했습니다. 본문의 댓글을 유심히 보면 30년 전 주인공들이 타이젬에 출몰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인간관계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아 몇 다리만 건너면 누구와도 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바둑계의 인간관계지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타이젬 기우들의 관계지수는 더 높겠지요.
[낭만기객 권재룡] 이 한 편의 글로 바둑애호가들의 관계지수가 폭등하게 된다면 그건 전부 작고하신 권재룡 박사님의 은덕 때문입니다.

▲ 양산박 입구에서 바라본 고성읍 교차로 |
타이젬스페셜이라 명명한 이 글의 구성은 들쭉날쭉 형식이 없습니다.
저 하늘에 걸린 표지판처럼 현 위치에서 어디로 튈지 필자도 알지 못 합니다. 처음에는 5부작 다큐멘터리로 예정했는데 연재와 함께 다양한 정보들이 들어와 6부작으로 연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풀어야 할 이야기는 양산박 멤버들의 생활상과 고민, 대국 에피소드, 그리고 제자들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수수께끼의 인물 현자(賢者) 권재룡 박사의 드라마틱한 청년 시절입니다. 내일 제4화 달아 노피곰 도다샤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