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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雜學

"생각하면서 두는 바둑도 있나?"

ㅋㅋ

2009-05-14 오전 10:36:46 입력 / 2009-06-13 오후 6:39:34 수정

●…바둑 센 사람이 속기도 강해

10시간여의 기나긴 대국 끝에 배고픔을 읽고 바둑판에 머리를 파묻는다든지, 신수가 나와 몇 시간의 장고 끝에 해결책을 찾아냈다든지, 기다리기 지루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옆 대국을 관전한다든지 하는 일은 흘러간 관전기 속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정경이다.

20세기까지의 바둑에서 비공식적인 취급을 받았던 속기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터넷환경의 급격한 성장․ 바둑TV의 활성화․ 바둑의 체육화(마인드스포츠화)로 인해 이제 정상적 겨룸의 수단으로 바뀌고 있다.

요즘 같은 제트기시대에는 번갯불에 콩을 볶지 못하는 사람은 일류기사가 될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속기가 미덕이라는 말에 고개를 가로젖는 사람은 이제 없다.

사실 속기를 잘 둔다는 것은 바둑을 잘 둔다는 것과 동격이다. 빠른 시대에 빠른 세대만이 살아남다 보니 이세돌 강동윤 최철한 등 20대 젊은 기재들이 시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이해된다.

1980년부터 2007년까지 26회의 바둑왕전 결과를 보면 조훈현이 절반 가까운 11번 우승을 차지했고 이창호는 9번을 우승했다. 따라서 이창호 조훈현이 바둑을 잘 두며 덩달아 속기도 잘 두는 것이 증명된다. 마라톤 선수의 근육질과 100m를 달리는 스프린터의 근육질이 다른 법인데, 바둑은 어차피 한 가지 뇌를 사용하기 때문인가 보다.


●…정창현, 김희중, 서능욱은 3대 속기의 거두

대부분의 바둑팬은 ‘속기의 제왕’하면 떠오는 이는 김희중 서능욱일 것이다. 속기에 관한 해프닝도 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나오기 때문에 속기의 3대 거장으로 꼽을 만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주로 속기를 좋아하는 것이지 속기로서 초일류의 실력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희중은 조훈현 서봉수의 윗길로 76년 기왕전에서 당시 최고의 속사포로 불리던 정창현을 꺾고 기왕에 오른다. 김희중은 한때 기원을 차렸는데, 기원에 다면기대국장을 따로 둘 정도로 바둑두기를 좋아한다.


▲ 서능욱 9단.

서능욱은 한때 그 굵은 팔뚝에 염주를 차고 다녔었다. 한 때 ‘대왕전의 사나이’라고 불릴 만큼 대왕전 1기부터 4기까지 연속 준우승을 차지했었는데, 당시 우승은 조훈현의 차지였다.

조훈현고개를 넘어보자는 취지에서 열심히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자 독실한 불교신자인 아내가 “대국할 때 덤비지 말고 찬찬히 염주을 굴리면서 생각해보라”고 염주를 권해주었다.

바둑황제를 앞에 두고서 황급한 수읽기 장면이 되었다. 가빠지는 호흡과 함께 염주를 돌리는 속도도 빨라지더니 ‘좌르르르…’

너무 빨리 염주를 돌리다보니 줄이 그만 터져버려서 반상에 염주알이 굴러다니는 해괴한 광경이 벌어지고 만다. 역시 속기는 부처님도 어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 그가 1991년, KBC바둑대축제의 이벤트행사로 111명과 지도다면기를 펼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역시 그는 한명은 상대하기가 싫고 한꺼번에 덤벼라 하며 흔쾌히 둔 기억이 있다. 당시 기네스북에 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러자 선배인 김희중이 질 리가 없다. 그 후 1997년 김희중은 120명을 놓고 다면기를 벌인 적도 있다.(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정확치 않음)


●…빠른 것이 좋아

김희중과 서능욱 간의 예선대국이었다. 대국개시 20분쯤 흘렀을까. 김희중이 갑자기 한국기원사무국에 와서 서능욱을 찾는 것이 아닌가. 사무국직원은 혹시 서능욱이 지각을 한 줄 알고서 부랴부랴 수소문을 하였던 것.

한국기원 사무국은 선수가 1시간을 지각하면 기권으로 처리되니까 기권은 막아야 한다는 뜻에서 서능욱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힘들게 30분여를 수소문한 끝에 어렵사리 서능욱을 찾아 김희중과 연락을 취하게 했더니, 사적인 일로 서능욱과의 한담(閑談)을 마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 김사범님! 서사범님은 대국 안 한답니까?’(사무국)

‘언제 내가 안 두었다고 했나?’

김희중과 서능욱은 둘이서 이미 대국을 다 마치고 가벼운 복기까지 하면서 이미 ‘Bye Bye!’ 한 상태라는 것. 그런데 한마디를 더 하고 싶어서 김희중이 서능욱을 찾았다는 것이다.

속기파의 원조 거두였던 정창현과 김희중도 에피소드는 있었다. 30년전 쯤 월간바둑에 실렸던 사진 한 장이 생각난다. 예선전에서 두 사람은 만나서 대국이 끝나갈 무렵 김희중이 웃으면서 ‘선배님 빨리 계가나 하시죠.’라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 옆 대국은 바둑돌이 5개 남짓 올려져있는 상태였고.

그들은 연배를 떠나 시원시원한 성격에다 호방함을 더해 아주 죽이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76년 7월 기왕전 도전기. 아무리 큰판인 도전기라고 해도 그들은 속기를 멈추지 않았다.

희한한 바둑이 등장한다. 정창현이 1국을 승리하여 제2국. 초반에 김희중은 140집짜리 대궐을 지어 놓아 거의 승리한 상황이다.

그런데 말이 140집이지 그 집 주변을 돌아간 돌 수 등을 합치면 나머지 땅을 다 먹어도 역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바둑이 얼마나 성의 없었냐면 그 좋던 바둑을 양보 양보하다가 3집반을 패를 당했다. 물론 초속기로 두는 것은 묵계로 이미 약속되어있는 상태였다.

좀 더 얘기하면 4국에서는 1집 짜리 끝내기 3군데가 있었는데 손이 떨어진 것은 공배로 그만 가고 말았다. 따라서 반집역전패를 정창현이 당한 것. 시리즈가 재미있게도 2패 후 3연승으로 김희중이 이겼다. (초속기라도 연패후 연승도 한다. ㅋ)


●…창호를 석 점 접었어!

얼마 전 응씨배 우승을 차지한 최철한은 5년 전쯤 삼성화재배 전야제에서 ‘가장 두고 싶은 기사가 누구냐?’는 질문에 일본 대표로 나온 조치훈을 지목한 적이 있다.

그 이유를 묻자 “조치훈 사범님과는 공식적으로 아직 한 번도 두어보지 않았다. 제가 어렸을 때 10초 바둑으로 둬 본 적은 있다. 초등학교 3학년때 쯤이었는데, 제대로 된 치수는 2~3점이었던 것 같은데, 마구 속기로 두다가 6점까지 떨어진 적이 있었다.”

또 전설과 같은 얘기가 있다. 10대의 이창호과 속기의 귀재 서능욱과 4점 바둑까지 올라간 이야기이다.

당시 기사실에서 서능욱은 공식대국에서도 자신을 척척 이겨내는 기린아로 성장한 이창호에게 심심풀이로 치수고치기 초속기 연습바둑을 제의했다. 한판에 한 점씩 올라간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해진 이창호는 그만 마수에 걸려든 것이다.(실제로는 대선배의 제의이니 거절할 수 없었겠지만)

엎치락뒤치락, ‘이겼다 졌다’를 반복하다가 속기에 인이 박힌 서능욱이 필을 받았는지 계속 승리하여 3점에도 이긴 적이 있다. 약속대로 이제 4점 차례.

그러나 기사실이 온통 그 바둑을 구경하러 온 기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자 서능욱은 ‘이창호보호령’을 내려 그만 둔 적이 있다. 서능욱은 이창호와 지금 다시 치수고치기를 이어갈라치면 4점을 놓고 해야 한다고 농을 부린다.

그 외 정대상은 언더그라운드의 최고봉이다. 과거 정대상이 기사실에서 바둑을 워낙 신출귀몰하게 속기를 두는 바람에 구경하던 서봉수는 입버릇처럼 “(정)대상이가 타이틀을 못 따는 것은 희대의 아이러니야.” 하고 농을 던졌을 정도.

‘영환도사’ 김영환도 웬만한 하수님들은 다른 기사보다도 한 점을 더 접는 고수로 알려져 있다. 김철중 김종수 오규철 등도 탁월한 속사포이다.

●…속기는 이미 바둑의 새로운 정체성

“어린나이에 바둑을 배우는데, 워낙 재치가 있을 때이니 금방금방 손이 나가서 스승이 버릇을 고치려고 양손을 등 뒤에 묶었다. 생각을 하고 난 다음 다시 손을 풀어주는 연습을 했다.”

故 김수영의 어린 시절의 예처럼, 이제 각종 도장에서 어린이들이 바둑을 생각하며 둔다고 핀잔을 주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싶다.

TYGEM / 진재호 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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