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雜學
이틀걸이 더블헤더도 있다!?
ㅋㅋ
2009-06-28 오전 9:43:58 입력 / 2009-06-29 오전 12:08:24 수정
| ●…없던 일이 생겨나는 시절 또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더블헤더’라는 것도 생겨났다. 기본의 바둑을 하루 1판 이상을 둔 경우는 없었다. 또한 1일 1판을 두고 나면 꼭 그 다음날은 쉬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짧아짐으로 해서 휴식일도 의미가 없어졌고, 유명기사 위주로 모든 대국이 잡혀있으므로 ‘후닥후닥’ 치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프로야구에서나 있음직한 더블헤더가 프로야구보다 더 많이 일어난다.
프로들에게 ‘1일 1대국’이 묵계이다. 그리고 당일 대국을 하게 되면 꼭 하루를 쉬고 그 다음 대국을 하게 되어있다. 그도 그럴 것이, 1인당 3~4시간씩 주어지는 제한시간을 쓰다보면 도합 10시간 가까이 걸리기 때문에, 당연히 하루 1대국에도 파김치가 되곤 한다. 따라서 1일 2대국의 더블헤더는 언감생심. 2006년 역대 국수(國手)초청 결승대국이 열렸다. 조훈현과 서봉수는 오랜만에 바둑판을 마주했다. 조훈현은 속기전으로 푸다닥 마친 다음 복기나 대국감상을 주고 받을 여유도 없이 황급히 차에 올랐다. 조․서의 신경전의 일종으로 오랜 관행이겠거니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워날 싹싹한 성격으로 관계자들과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는 여유가 있는 조훈현이었다. 황급히 떠난 이유인즉, 그 날 오후에 또 대국이 잡혀 있었다고 한다. 그날 조훈현은 ‘운짱’인 부인까지 대동해서 대국장에 나타났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바둑계의 풍속도가 바뀌면서 하루에 한 판만 두는 현실도 바뀌기 시작했다. 이창호도 4차례나 더블헤더를 경험했다고 하니 이미 일반화된 일인 듯하다. 이영구는 2005년에 1일 3대국을 경험했다. 이쯤 되면 '바둑은 기재가 아니라 체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 한국기원에 따르면, 하루 ‘3연전’을 맛본 기사는 13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쯤 되면 어쩌다 한 번쯤 일어나는 경향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체력 관리 면에서도 힘들어지고 기보의 완성도 면에서 볼 때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그럼 과거엔 더블헤더가 없었는가? 필자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뒤졌다. 4단 시절 권갑룡과 ‘최강 초단’ 박영찬의 대국이었다. 당시는 94년도 월드컵기간 중이었는데 대진표를 보니까 한국대표팀의 경기시간과 대국시간이 겹쳐 있었다. 권갑룡은 프로기사 축구단인 ‘비마축구단’을 이끌고 있는 알아주는 축구광. 그가 그 다음날 축구중계를 안 볼 리가 없다. 따라서 권갑룡은 내일 둘 상대인 박영찬에게 접선했다. 둘은 속닥속닥 하더니, 얘기가 잘 되었는지 연신 끄덕끄덕하더니, 점심식사 후에 대뜸 둘은 마주 앉는 게 아닌가. 하기야 두 사람이 두어서 결과만 얘기를 해주면 되니까, 둘이서 두는 데는 딱히 한국기원에서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때가 때인지라 한국기원도 이해를 해주었고. 박영찬과 권갑룡은 사상 처음으로 속기전이 아닌 대국에서 하루에 다른 대국자와 두 판을 둔 프로가 되었다.
당시 서봉수는 기권 패를 당했다. 따라서 이제 서로 단판승부로 도전권을 가리게 되었다. 왜 기권을 했느냐? 무장 탈영병소동 때문에 한강다리가 막혀서 대국시간을 1시간10분이나 오버했기 때문이다. 대국시간을 1시간을 넘기면 기권이며 1시간 이내에서 지각하면 지각시간의 두배를 통상 제한시간에서 제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서봉수가 세상물정 어두운 것은 다 아는 사실. 당시만 해도 사정이 이러이러하니 하고 전화를 넣어주면 대국시간을 조정한다든지 방법이 있었고, 또 하나는 택시를 타면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을 무던하게 상황종료가 될 때까지 버스 안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앉았던 것. 도전권이 걸린 중차대한 그날 서봉수는 오전 11시가 다 되도록 연락이 안 돼 그대로 기권패가 선언됐다. 천재지변에 준하는 일이었지만 엄연히 기권 패였다. 그렇다면 마지막 한판이 결정판이 된다. 그런데 얼마 후 서봉수가 들어온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 도착한 서봉수는 억울한 심정을 하소연했지만 규정도 알고 있는 그가 어찌 들이밀 도리는 없었던 것. 당시 무혈입성한 승자 노영하는 표정관리에 들어간 상황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오늘 그냥 2국을 두도록 하지. 뭐 시간도 없는데 다음에 또 고생하느니 피차 시간을 절약하는 게 낫지 않겠소?' 서봉수가 이색제의를 한다. 이왕 기전진행자도 있으나 그렇다면 2국을 여기서 두자는 것이다. 듣고 보니 야릇한 제의였다. 노영하도 상대가 두자고 하는데 명색이 승부사가 꼬리를 내릴 수 없는 일. 괜히 몸을 사리는 것 아닌가 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고 해서 대국을 강행했다. 결국 오랜 시간동안 줄넘기만 했던 노영하는 정작 본 시합에서는 힘이 달려서 그만 1승1패로 ‘패하고’ 만다. 기록상 명백한 더블헤더였다.
더블헤더는 아니고, 이틀걸이 바둑을 둔 경우가 있다. 55년 말 제3회 승단대회에서 김명환과 김봉선이 대국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국바둑 태동기에 조남철 선생을 도와 척박한 이 땅에 바둑보급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 당시만 해도 조남철 선생만 고단자 대열이었고, 4단 5단도 고단자로 불리던 때였다. 바둑은 김명환이 거의 이겨가는 형세. 그런데 빨리 끝내지를 않고 미적미적 시간을 끌더니 대뜸 “내일 마저 둡시다.”는 것이 아닌가. 김명환은 그 한판이 승단 판이었다. 즉, 그 순간만 버티면 5단으로 한국기계에서는 조선생 다음으로 두 번째 고단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결국 그 한판은 양자패가 성립되었다. 왜냐? 결국 다음날 두기로 결정하고 다음날 상을 차려놓았는데 두 대국자가 모두 나오질 않아 양자패. 양자패가 성립된 것은 아이러니이다. 김봉선의 입장은 이왕지사 진 바둑이니 그렇다고 쳐도 김명환이 나오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화제였다. 그도 그를 것이 김명환은 그 승단순간을 놓치는 바람에 저 세상에 갈 때까지도 4단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직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혹자는 김명환 4단이 5단으로 승단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승단을 미루기 위해 그랬다는 설이 있다. 또 어떤 이는 김봉선이 다 진 바둑을 돌을 거두지 않았으므로 화가 나서 내일로 미루었다는 설도 있다. 김명환은 원로기사 김재구의 부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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