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일환 9단. 부산 바다를 배경으로. | 강호에 무림전설로 회자(膾炙)되는 정통 문파도 많고 저마다 한칼의 비기(秘技)를 지닌 고수들이 많다. 그들이 자기류(自己流)의 검술을 갈고 닦아 무수한 실전을 거치며 입신에 다다르기까지 겪은 승부, 그 영광과 고통의 나날은 그들 자신이 아니고는 아무도 실감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천년이 바뀌고 파천황의 폭풍이 기림(棋林)강호에 몰아치면서 냉정한 철혈(鐵血)의 신예군단의 시대가 도래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계산 술(計算術)과 이기는 방법을 치밀하게 연구한 신예들의 급습에 전설의 노장들이 하나둘씩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승부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천만에요. 저는 단 한 번도 승부를 포기한 적 없습니다. 나이를 먹으니 집중력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저는 지금도 바둑이 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다만 젊은 기사들의 진보가 워낙 급속도로 진행 되서 상대적으로 밀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요."
오랜만에 김일환 9단이 기림검술대회에 등장했다. 제14회 삼성화재 마스터스 시니어 예선에서 김인, 양재호, 서봉수, 김철중, 박영찬을 연파하고 32강 본선에 진입한 것이다. 노장들을 배려한 티켓이라 하지만 그는 당당했다. "시드를 받은 강자들과 32강전에서 만나게 되므로 쉽진 않겠죠. 그러나 누가 걸릴지 모르지만 상대에게 쉽게 16강 티켓을 끊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막연한 포부로 여기면 오산이다. 1956년 생으로 55세의 노장이지만 잘 나가는 신예기사들이라도 김9단을 만나면 진땀을 한 됫박 뽑을 각오를 해야 한다. 재작년이던가? 전자랜드 배 왕중왕 전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해 기염을 통했던 김9단이다. 올해 전적도 14승 11패로 56%를 상회한다. 시니어 기사들 중 승률 반타작 이상을 거둔다는 건 대단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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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스를 연상한다
끝없이 거대한 바위를 산 위로 굴리고 올라가는 시지프스를 기억하시는지. 산의 정상은 가파라서 바위는 다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그러면 다시 내려가 굴려 올려야 하는 영원한 형벌. 시지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머리가 좋아 신들을 능멸한 죄로 제우스신으로부터 가공할 벌을 받았다. 얼마나 지겹고 힘든 체 바퀴 굴리기인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김일환 9단을 보면 시지프스가 연상된다. 거대한 바위를 굴리며 한발 한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사나이. 허벅지 근육에 핏줄이 솟구치고 아킬레스 관절이 끊어질 듯 팽창해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운명의 형벌을 감내하는 그런 캐릭터로 다가온다.
김일환 9단. 부산 출생. 동래중학교 2학년 때 형으로부터 단수치는 법을 배운 뒤 거리의 노인들에게 바둑을 배웠다. 기원에 가면 기료를 내야 하니까 궁여지책으로 노인들을 사부로 모신 거였다. 덕원공고에 진학할 무렵 동네 1급 바둑이 되었고 학생바둑대회에 출전했다.
그 대회에 참가하려면 학교장 추천을 받거나 실력이 검증되어야 하는데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마침 한국 바둑의 대부 조남철 국수가 부산에 내려왔다 해서 다짜고짜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조남철 국수가 그의 바둑을 테스트하더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판정해주었다.
"괜찮네. 내가 추천해줄 테니 참가해봐라."
그 대회에 나가서 고교생 김일환은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준우승이 백성호 3등이 김동면이고 허장회, 김수장 등이 상위권이었다 하니 대단한 성취였다. 그 대회를 계기로 아마 최고위 전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고교 3학년 때 연구생 리그에 편입해 19세 때인 1974년 프로에 입단했다. (차민수 사범과 동기)
이때만 해도 김일환은 고급정석을 거의 몰랐다. 정석을 완벽하게 암기한 라이벌들과 대국에서 그는 오직 수읽기의 힘 하나로 난국을 헤쳐 나갔다. 그러다보니 그의 바둑은 항상 치열한 전투바둑이었다. 축과 장문이 안 되면 무조건 끊고 싸우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패일환’이다. 서능욱9단과 더불어 패마왕으로 쌍벽을 이룬다. 또 바둑계에서 3대 강펀치(서능욱, 김일환, 정대상)로도 통한다.
"저는 계산바둑을 체질적으로 싫어합니다. 집계산을 통해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은 바둑의 본질이 아닌 것 같아요. 무미건조하지 않나요? 보기에도 답답하구요. 그러다 보니 계산이 밝은 후배들보다도 모험심이 강한 후배기사들이 예뻐보이더라구요. 하하"
치밀한 계산보다 돌들이 엉키고 그 충돌에서 발생하는 자극이 짜릿하다는 뜻이다. 바둑의 궁극이 과연 ‘집 많이 짓기’일까? 김일환 9단의 의견에 필자도 동의한다. 바닥의 한 수는 점(點)이다. 그 점이 모이면서 하나의 선(線)이 되고 길이 된다. 그 길에 상상이 더해지고 이야기가 되는 것. 그렇다면 바둑은 스토리이면서 예술로 승화되는 것. 기왕 쓰는 이야기라면 밋밋한 내용보다 뜨거운 구성과 화사한 필치가 보는 이에게도 즐겁지 않은가? 그가 바둑을 보는 관점 자체가 곧 그의 기풍이고 그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일환 9단. |
냉정과 열정 사이
김일환 9단은 말수가 적다. 첫인상이 그렇듯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하다고 한다. 그런데 바둑은 전투지향 적이라니 묘하다. 올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그는 부쩍 바빠졌었다. 여류 VS 시니어 전, 시니어 대항전, 삼성화재 마스터스 통합예선 등 모처럼 폭주하는 대국 속에서 체력의 고갈을 은근히 즐겼다고 한다. 체내의 기(氣)를 한 판에 깡그리 비워내는 청정한 올인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제가 좀 약해 보이지만 한 체력한답니다."
좀처럼 열리지 않은 그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한 마디가 흥미롭다. 한때 기사축구 팀 비마(飛馬) 선수단에서 주전으로 뛰었다고 한다.
"저는 뛰는 게 그리 좋더라구요."
심장박동의 RPM이 극한치까지 상승하는 질주, 공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충돌하는 몸과 몸, 그런 축구가 너무 좋다는 것이다.
"십 년 이상 축구를 즐겼는데 쉰 살이 넘으면서 관절에 무리가 오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등산으로 바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근력은 좋은 편입니다."
그런 취미 때문에 허정무 국가대표 감독과 절친하게 지낸다.
"그 분은 바둑에서도 승부욕이 대단합니다. 저한테는 4점 바둑인데 짱짱하게 버팁니다. 고집이 강하고 돌 하나를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자기 선택에 대한 집착이 강하더라고요. 바둑도 굉장히 센 편입니다."
허 감독의 기풍이 자신의 기풍을 닮아 그런지 인간적으로 끌리는 모양이다.
두뇌는 냉정하지만 가슴은 한없이 뜨거운 이 중년의 승부사 김일환 9단. 신예들이 득세하는 2009년의 기림 강호에 칼 한 자루 등에 차고 홀연히 나타난 일환낭검. 그가 보여줄 9월 ‘가을의 전설’을 고대한다.
삼성화재 마스터스 본선에서 강력한 거물을 꺾어준다면 더 할 나위 없을 테고 설령 추풍을 맞아 낙엽이 된다 해도 당신의 기보에 새겨진 아름다운 이야기는 타이젬의 수많은 팬들이 열심히 읽어드릴 테니. 
▲ 김일환 9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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