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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雜學

프로기사들의 '삭발 이야기'

ㅇㅇ

2009-10-07 오후 4:04:28 입력 / 2009-10-09 오전 9:31:44 수정

●…삭발은 존재를 던진다는 의미

올드팬이라면 고서적에서 고색창연한 사진 한장을 봤을 것이다. 삭발 오청원(吳淸原)과 기타니미노루(木谷實)가 반상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것으로 고요한 산사에서 고승의 선문답같은 대국사진 말이다.

삭발은 불가에서는 속세와 연을 끊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머리카락은 번뇌요, 삭발은 번뇌를 끊는 것이다. 삭발 머리는 강력함의 상징이며 굴욕을 의미하기도 하고 의혹을 풀기위한 결연한 의지를 보일 때도 쓰인다.

일제가 한국을 침략했을 때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이 상투를 풀게 하는 일이었다. 조상이 주신 머리를 깎지 않고 길렀던 우리에겐 그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최익현의 단발령 반대 상소에는 그 유명한 "내 머리는 잘라도 내 머리털은 못 자른다[오두가단차발불가단(吾頭可斷此髮不可斷)]"란 구절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도 한국인들이 머리를 삭발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던져서 결단을 내리고 단호한 각오를 보인다는 의미가 가장 클 것이다. 자신의 몸에 해하지 않고 마음의 의지를 밖으로 보여주기 위해 삭발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고바야시 고이치

86년 1월 그 유명한 조치훈과의 휠체어 대국에서 고바야시고이치는 삭발한 채 무릎을 꿇고 대국에 임한다. 혹자는 고바야시가 ‘환자’ 조치훈과의 대국에서 정신적으로 밀리지 않기 위해 삭발한 것으로 오해를 하지만, 사실은 약속에 의해  그 이전 삭발을 해야만 했다. 

85년 중일슈퍼전에 앞서 당대최강이던 후지사와슈코 카토마사오 고바야시고이치 등 세계최강 3인은 NHK에서 중계되는 현장에서 “만약 일본팀이 지면 3인은 책임을 지고 삭발하겠다”며 공언한 바 있다. 삭발이란 일본에서 현대판 할복자살과 맞먹는 비중이었다.

이 말을 기억하고 있던 섭위평(聶衛平)이 마지막 대국을 위해 베이징을 방문한 후지사와에게 “후지사와 선생님, 그러나 스님이 되실 것까지야 없겠지요”라고 농을 건넸다.

슈퍼대항전 직후인 85년 12월. 바로 고바야시가 조치훈과 마주 앉기 이전 기성전 도전자결정전에서 가토와 마주 앉은 사진이 또 걸작이었다. 두 사람 모두 삭발한 채 대국하고 있었던 것. 이들은 슈퍼대항전 당시 섭위평에게 패한 책임 차원에서 스스로 삭발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 강동윤 9단.

●…강동윤

최근 정상기사로 우뚝 솟은 ‘속기의 제왕’ 강동윤도 1년전 수도승 대열에 또 동참했다. 강동윤은 한 신예기사를 상대로 ‘초읽기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이기겠다’며 바둑리그 팀원들에게 호언장담했다는 것.

속기대회에서 초읽기 기회를 한번도 쓰지 않고 30초 안에 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실제로 강동윤은 그 대국에서 거의 노타임으로 두었고 결국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다음 대국에서 삭발을 한 것. “속기에 자신감이 떨어져서 나를 더 극한상황에 몰아넣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또 잘랐다. 09년 6월 후지쯔배 세계선수권을 우승한 이후 원익배 예선(허영호)과 명인전 리그(김승재)에서 2연패를 당하고 난 후 삭발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하필 삭발한 그와 마주친 이는 천하의 이창호. 그러나 강동윤에게 약점이 잡힌(상대전적에서 10승 15패로 뒤짐) 이창호는 강동윤의 삭발투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 박정상 9단.

●…박정상

큰 타이틀을 하나 따고 나면 아무래도 공허감이 밀려오나 보다. 06년 역시 후지쯔배 우승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최고단인 9단으로 승단했건만 박정상은 남모르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최강기사 이세돌과의 전적이  통산 7전 전패였다는 것이다.

박정상은 전패의 치욕을 떨치기 위해 고심하다 07년 1월 9단들만 참가하는 입신최강전 타이틀전 결승에 앞서 하나의 사건을 저지른다. 20년간 소중히 길러온 머리를 아낌없이 밀어버리고 대국장에 나타난 것. 전국에 생방송되는 TV에 방송조명처럼 빛나는 머리가 이세돌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은 자명한 이치.

삭발의지가 결실이 맺어진 것인지, 첫 대국을 승리로 이끌며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이세돌 징크스’를 깨끗이 잘라냈다. 삭발을 하게 되면 그 첫판은 대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아무래도 머리를 깎을 때의 의지가 ‘삭발 첫 대국’에서는 발휘되는 법.




▲ 목진석 9단.

●…김동엽, 목진석

말이 없기로 유명한 중견 김동엽도 간혹 삭발을 하고 나타난다. 01년 LG정유배 16강전에서 삭발투혼 끝에 젊은 승부사인 윤성현에게 승리를 거두고 승승장구했다. 객관적인 예상에서 자신의 전력이 약했음에도 삼손과 반대로 머리를 깎으니 괴력을 발휘하더라는 것.

07년 최다승을 기록한 목진석도 삭발을 하고 대국에 임해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적이 있다. 그는 05년 원익배 십단전에서 여류최강인 루이나이웨이와의 16강전에서 역시 1집반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한 때 랭킹3위까지 치솟은 것에는 삭발투혼을 벌이던 그때부터 승승장구한 덕분이었다.

웬만한 프로기사 못지않게 유명한 하성봉 아마7단도 삭발족이다. 초롱초롱한 눈매에 까까머리가 퍽이나 어울리는 그는 03년부터 삭발을 하고 나니 머리에 신경 쓸 필요도 없이 바둑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요즘은 그가 등장하는 사진을 보다보면 거의 다 삭발이다.



●…김성룡

걸쭉한 입담으로 ‘해설계의 1인자’라 할 김성룡에게는 삭발에 대한 아픔이 하나 있다. ‘입이 방정’이라고, 자기가 뱉은 말 때문.

1995년 제2회 한중신예대항전의 전야제 석상에서 김성룡이 나섰다. “우리는 이기러 왔다. 얼마 전 롯데배(몇 해 치르다가 없어진 기전으로 한중대항전으로 치러졌다.)에서 당한 선배들의 앙갚음을 대신하겠다. 지면 모두 삭발하겠다.”

창하오 저우허양 등으로 구성된 당시의 중국 신예들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1차전에서 1승5패, 2차전에서 2승4패. 총 3승9패로 한국은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김성룡의 한마디가 거꾸로 중국 팀의 사기를 역으로 올려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당사자인 김성룡은 삭발을 분명히 해야 했다. ‘성공하면 호언장담이요 실패하면 입이 방정’이라는 사실을 혈기방장 20세의 그가 어이 알았을꼬. 바둑가에서는 마치 섭위평의 후예들이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게 단발령을 내린 사건이라고 꼬집는다.




▲ 2007년 후지쯔배 8강전(서울) 출전 당시 요다노리모토 9단.

●…요다노리모토, 유키사토시

삭발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 없는 일도 있다. ‘한국기사 킬러’로 악명이 높았던 요다노리모토. 그는 간혹 승부 이외의 것에서 승부를 자주 건다. 2006년 도요다덴소배에서는 안방에서 치러진 대회라서 결의에 찬 삭발을 단행했으나, 그만 첫 판에서 무명기사에게 미끄러지고 만다.

80년대 후지사와에게서 이창호의 일인독주를 견제할 유일한 기사로 꼽혔던 유키사토시는 빡빡머리가 그의 헤어스타일. 07년 1위 기전인 기성전에 머리를 빡빡 밀고 덤벼들었으나 야마시타게이고에게 3대4로 패퇴하며 후지사와의 마지막 ‘애원’도 속절없이 꺼져갔다.

 
TYGEM / 진재호 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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