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저수첩
아담한 샤라포바, 그랭이 1급
테니스, 그림, 바둑 - 서산의 팔방미인
2009-10-04 오전 10:24:01 입력 / 2009-10-04 오후 1:25:18 수정
S#1. 서산에서 그녀를 만나다 8월말, 유저수첩에 봉천동 ‘풍경의 꿈’님을 소개하자 필자의 아이디로 꽤나 많은 쪽지 제보가 들어왔다. 풍경님처럼 몸이 편치 않으나 타이젬을 통해 바둑공동체 생활을 즐기는 기우님들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그 분들을 유저수첩에 소개한 친구들의 생각은 아마도 응원과 격려, 그리고 타이젬 사회의 넉넉한 인심을 환기시키고 싶어서일 것이다. 친구들의 선의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으나 사이버 세상에서 익명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데 어떤 형식으로든지 알려진다는 건 아주 미묘한 구속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조바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오랜 고민 끝에 세상으로 나오기로 결심한 풍경님의 경우는 그런 부자유까지도 자신이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분 이야기는 필자도 편하게 쓸 수 있었다. 아울러 그 글을 읽은 독자님들도 아주 따뜻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다. 풍경님의 스토리를 읽고 댓글 대신 쪽지로 벅찬 감동과 공감의 메시지를 전해 온 유저가 있었다. “와우, 사람이 꽃보다 왜 아름다운지 풍경님한테서 이유를 찾았네요.” 그렇게 시작되는 쪽지에는 ‘몸의 불편’과 ‘세상의 편견’ 그리고 그런 것들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해내는 방법들이 적혀 있었다. “저는 항상 침묵 속에서 산답니다. 그런 기분이 어떨지 잘 모르실 거예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때의 막막함, 답답함 그런 기분들 말이에요.” 그녀의 아이디는 그랭이(1급)이었다. 타이젬 홈피의 글들을 유심히 읽는 분들이라면 그녀의 이름을 오래 전부터 익히 발견했을 것이다. 그녀는 아주 당차고 격정적이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댓글을 자주 올리는 타이젬 애독자이기 때문이다. “저에게는 바둑이 타이젬이고 타이젬이 곧 바둑입니다. 타이젬이 생길 무렵 회원으로 가입해서 바둑의 기초를 배웠고, 많은 친구들을 얻었어요.” - 쪽지로 듣기에 아까운 이야기네요. 타이젬의 모든 분들과 공유할까요. “헉, 제가 유저수첩에 등장할 만한 인물은 아니구요. 풍경님 스토리에 너무 감동을 받아 그냥 말씀드린 건데요.” -사는 곳이 서산이시죠? 지난봄에 서산의 도신 스님과 최기남 사범님, 간월도 취재 갔을 때 그 땅에 그랭이가 산다는 것도 잊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윽, 기억력도 좋으셔!”
그런 사연으로 필자는 서산으로 달려갔다. 약속장소는 서산 시민운동장 테니스 코트. 아침 10시의 코트에서 하얀 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라켓을 휘두르고 있었다. 필자가 살며시 코트에 들어서자 그녀가 단번에 알아보고 손을 들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헉, 말씀을 하시네요? “그럼요. 저 말 잘해요. 후천적 청각장애거든요.” -그럼 대화는 나눌 수 있는 건가요? “난해한 추상명사만 사용하지 마세요. 웬만한 단어는 입 모양을 보고 읽을 수 있어요.” 예상을 뛰어넘는 달변이다. 혹시 몰라 필담을 나누기 위해 준비했던 노트 갈피에 만년필을 꽂아야했다. “여덟 살 때 열병을 앓아 고열에 시달린 후유증으로 청각신경이 모두 손상되고 말았어요. 그 후론 어떤 소리도 들은 적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발성은 어린 꼬마 소녀와 흡사하다. 여덟 살까지 받아들인 언어를 그대로 기억하기 때문에 약간 어리광 섞인 발성인 것이다.
그녀를 만나자 내려오면서 다지고 다졌던 조바심이 스르르 풀려버리고 만다. 너무 밝고 당차며 씩씩한 스포츠맨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재 서산시 테니스 대표로 충남도민 체전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취미 차원을 넘어 선수로 활동한다는 거였다. 지난 4월말 여자 테니스 동호인들의 꿈의 대회인 제 34회 화곡 배 전국 테니스 동호인대회 국화 부 우승을 차지했고, 현재 국민생활체육 주관 랭킹대회에서 국화 부 10위권에 든다고 동료들이 자랑한다. (여자 테니스 동호인들은 개나리 부에서 시작해 국화 부까지 등급이 나뉜다. 국화 부는 최상위 급인데 그랭이님은 전국대회에서 꽤나 많이 우승컵을 획득했다.) “테니스는 저에게 삶 그 자체라고 해도 좋아요. 모든 게 완벽한 침묵 속에서 그림으로만 보이는 비현실적인 삶인데 그나마 테니스 코트에 서면 생생한 현실감을 느끼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몇 차례 랠리와 서비스를 직접 보여주었다. 아! 아담한 샤라포바가 그곳 서산에 살고 있었다.
S#2. 아주 특별한 친구들 테니스 훈련을 마치고 찾아간 곳은 서산시 외곽의 토우(土偶) 레스토랑. “제 단짝 친구가 경영하는 레스토랑이에요. 여기 냉면이 끝내주지요.” 야외의 등나무 그늘 테이블에 앉자 레스토랑의 여주인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미인인데 40대의 연륜이 느껴져 뭔가 이상했다. -그랭이님과 단짝 친구라던데요? “맞아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같이 다녔으니까요.” -헉! 실례지만 연세가? “마흔 살짝 넘었지요. 쟤가 워낙 동안이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우셨을 걸요.” 그랭이, 그녀가 세수를 하는 동안 여주인이 친구 자랑을 펼친다. “그랭이, 쟤 천재에요. 취재를 오셨다면 정말 잘하신 거예요. 세상에 저런 아이는 없을 걸요. 어려서 청각장애를 겪고도 굴하지 않고 공부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리 1등을 하고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서양화를 전공했지요. 제가 그랭이만 졸졸 따라 다녔잖아요.” 여주인의 설명을 들으려니 잔잔한 감동이 가슴 가득 일어난다. 장애를 극복한 여학생의 장한 스토리도 아름답지만 그보다도 그런 친구와 동행하며 주변을 보살펴주었을 여주인의 의리가 눈에 밟혀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우리 레스토랑 예쁘죠? 그랭이와 함께 직접 모든 실내장식을 처리했어요. 그러니까 이 건물의 모든 디자인이 우리의 작품인 셈이죠.”
엄청나게 큰 건물인데 그 장식을 두 친구가 며칠 밤을 새워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랭이는 요즘 108점을 목표로 인물화를 그리고 있어요. 지금 절반쯤 완성됐을 겁니다.” 거기까지 대화를 나눴을 때 그랭이 1급이 나타났다. “에이, 저 그림은 돌팔이에요. 안 그려요. 못 그려요.” 그랭이 1급이 손사래를 치며 부끄러워한다. “호호, 그럼 저는 냉면 가지러 갑니다.” 여주인이 황급히 자리를 비켜준다. -친구 분이 공부를 잘했다고 자랑하던데요. “에이,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농담......뭐 아주 못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림 좀 보여주시죠. “요즘은 안 그린다니까요.” 그러면서 못이기는 척 휴대폰에 저장된 그림들을 보여준다. 독특한 인물화들 몇 점이었다. 단순하지만 강렬한 원색과 꽃, 새, 그리고 얼굴 뒤의 후광(後光), 이마에 큰 점이 공통적으로 들어있다. 그림에 문외한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운보 김기창과 천경자 화백의 화풍이 뒤섞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청각대신 시각이 발달한 편이죠. 아무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영감을 표현하는 데는 그림이 적합한 편이겠죠.” 그녀는 두 차례 개인전을 가진 프로페셔널 화가이며 세 번째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S#3. 그녀에게 바둑은 웅장한 무협드라마 “저는 타이젬을 너무너무 좋아해요. 바둑도 좋지만 그 바둑을 즐기게 해준 타이젬이 더 좋아요.” 단순하고 직접적인 표현이지만 조금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는다. “바둑 실력은 1급밖에 안 되지만 9단 사범님들의 바둑을 지켜보는 게 취미랍니다. 고수들의 바둑을 보다 보면 웅장한 무협 드라마를 보는 착각에 빠지곤 하죠. 한 수 한 수에 실려 있는 내공과 지략과 기백을 읽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에요. 저도 그렇게 두고 싶은데 기력이 딸리니까 타이젬에서는 관조만 하는 편입니다.” 그녀는 뭐든지 걸리면 깊이 빠져드는 체질이라고 했다. 그림도 그렇고 테니스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시작했다 하면 올인해서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거였다. “그런데 바둑은 좀처럼 올인이 안 되는 거예요. 어찌 보면 바둑은 영원히 다가갈 수 없지만 그렇기에 신비롭고 알고 싶은 분야이기도 해요.” 한 마디 한 마디가 실로 당찬 웅변이다. 이쯤해서 확인해 보는 아이디 풀이. 그랭이는 우리나라 3대 건축 공법 중 하나로써 주축돌과 기둥을 세울 때 서양 공법처럼 돌을 평평히 깎고 그 위에 기둥을 수직으로 세우는 게 아니라 자연석을 쓰고 그 돌의 표면에 기둥을 맞추어 깎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 자연스러운 공법의 우리 식 이름이 너무 예뻐 사이버 이름으로 선택했다는 그랭이 1급. 그 작명에 자신의 의지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는 것.
“침묵 속에 갇혀있는 게 얼마나 막막한지 기우님들은 실감하기 어려울 겁니다. 저도 열심히 살지만 사실 밖에 나가기 조심스러워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위험하기 짝이 없죠.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도 듣고 싶은데 눈으로만 들어야 하니 기질은 뜨거운데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헤어질 무렵 그녀가 고충을 털어놓는다. -세상에 듣기 싫은 소리도 아주 많으니까 안 들을 수 있는 조건도 괜찮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인사하면서도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속으로 갸우뚱하며 필자는 표정을 감추었다. 그리고 서산을 떠나가는 차 안에서 문자 한 줄을 준비했다. <말하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배우지만 침묵은 神으로부터 배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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