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강 진출자. (왼쪽부터-쿵제, 구리, 치우쥔, 이창호) | 제14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가 4강까지 가려졌다. 이번 대회에서 한번도 뉴스의 초점이 되지 못한 강타자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중국의 일인자 구리다.
한국의 이세돌과 같은 존재인 구리가 왜 32강전부터 주목을 받지 못했을까. 그것은 그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4강까지 진격했기 때문이다. 구리는 이번 대회에서 중국 기사만 쓰러뜨리며 4강에 올라왔다. 그의 주먹에 쓰러진 조국의 전우는 모두 4명.
지난달 더블엘리미네이션(패자부활방식)으로 치러진 32강전에서 4명이 한 조를 이뤘다. 구리가 속한 F조는 류싱, 왕레이, 강동윤 등 초강자 4명이 몰려 '죽음의 조'가 됐다. 구리는 사지에서 왕레이와 류싱을 이기고 16강에 올랐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16강전 대진추점을 한 결과 중국의 대표기사인 창하오와 만난 것이다. 구리는 그때부터 웃음을 잃었다. 이름만 보면 구리-창하오는 최소한 4강쯤에서나 만날 수 있는 대진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이세돌이 이창호를 꺾은 형국이라 중국팬들이 보면 맥이 빠질 터.
'형제 대결'이 그들로서는 반가울 수 없으나 미리 정해진 대진 탓에 '울며 겨자 먹기'다. 8강에 올라섰을 때 구리는 비로소 불만을 터뜨렸다. "세계대회여서 해외선수랑 붙고 싶은데 중국기사와 만나니 괴롭다."
악연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8강 상대는 중국랭킹 공동 2위인 천야오예. 그는 32강전에서 한국대표신예인 박정환을 꺾은 중국바둑계의 다크호스다. 그러나 구리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4강에는 구리, 콩지에, 치우쥔, 이창호 등 4명이 올랐다. 이번엔 중국기사를 피할까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추첨에서 또 중국랭킹 공동 2위이자 작년대회 준우승자 콩지에와 걸린 것이다. 구리는 4강 진출 소감을 묻자 "중국이 강해졌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체념한 듯 말했다.
그가 이번 대회에서 중국 이외 기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또 한번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한 다음 결승에서 이창호와 만나는 도리밖에는 없다.
이번 삼성화재배는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구리가 천군만마인 셈이다. 유쾌한 청년 구리가 4강에 진출하고도 웃음을 잃어버린 이유다.
10월 17일자 부산일보 진재호의 바둑풍향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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