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雜學
누가 누구를 COPY하는가
ㄴㄴ
2009-11-28 오후 1:32:07 입력 / 2009-11-28 오후 1:30:28 수정
| ○…손님 실수를 받아먹는 총잡이 마주 서서 한참을 서로 노려보지만 주인공은 절대 먼저 총을 뽑지 않는다. 긴장감을 주기 위해 가만히 서서 허리춤 주변을 맴도는 손을 클로즈업시키면서 1분여를 그냥 흘려보낸다. 상대가 먼저 요상한 모션을 취하는 순간 주인공의 방아쇠는 불을 품는다. 최근 타이젬 주최 동양생명배에서 9단ID <야맛있다>와 중국의 흉내바둑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 동일 대국자가 지난 번 바둑에서 시도했던 포석을 이번에 다시금 시도한다든지, 다른 기사가 써먹는 포석을 이번에는 자신이 써먹는다든지, 또는 대국 중에 영감을 얻어 상대의 꽁무니를 쫓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상대의 착수가 그럴 듯 하면 똑같이 두어가다가 실착이 등장할 때(꼭 실착이 아니라도) 전광석화처럼 다른 길을 가며 결정타를 날린다. 한마디로 복사바둑이다. 여기서는 세 번째 부류, ‘순수창작’ 흉내바둑에 관해서 알아보겠다.
○…공식COPY는 오청원이 처음 프로기사들의 공식대국에서 흉내바둑이 나타난 것은 1929년 벌어진 오청원과 기다니 대국이 처음이다. 당시 오청원은 15세의 풋내기 소년이었지만 '금기'를 깬 역사가 있는 인물이다. 오청원은 중국의 천재소년으로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와 단번에 3단을 인허 받았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최고의 시합이든 승단시합에는 참가하지 않고 모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일본 신예기사들과 이벤트 대국을 두었다. 오청원은 당시 신예기사중 가장 강적이던 기다니미노루에게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내리 6연승을 거두고 마지막 대국에서는 장난끼가 발동했는지, 기다니와의 대국에서 흑으로 첫수를 천원에 두고 백이 하는 대로 따라두는 흉내작전을 구사했다. 오청원은 무려 63수까지 따라 두다가 65수만에 흉내를 중단했다. 그 바둑 도중 기다니는 몇 번이나 복도로 뛰어나와 주최측에 “저런 식으로 바둑을 두면 신문사측도 곤란한 일이니 어떻게 조처를 취해 달라”며 부탁했다고 한다. 항의가 아닌 부탁을. 하긴 오청원이 첫수를 천원에 둔 것부터가 희한했다. 기다니는 신포석(新布石)의 공동 창안자로 일세를 함께 풍미했던 양웅(兩雄)이지만, 당시만 해도 희귀했던 천원으로 제일착을 둔 흉내바둑에 대한 생각은 그에게도 파격적이었다. 오청원의 생각은 이러했다. 흉내를 계속내면 상대는 일찌감치 중앙에서 싸움을 걸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기회를 잡아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복안이었다. 오청원은 흉내바둑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바둑에서는 후반 실수를 범하여 패하고 말았다. 따라둔다는 것이 비겁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청원의 향햑열의 발로 였음을 우리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 바둑은 더불어 덤 제도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때 천원을 둔 이후 오청원과 기다니는 신포석에 대한 발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대국이 있은 다음 기다니와 오청원은 밤새워 바둑에 관해 철학을 나누면서 일면식(一面識)을 쌓게 된다. ○…후지사와 호사이는 흉내기사 얼마 전 별세한 ‘괴물 슈코’ 후지사와는 한국에서도 유명했던 기사. 그의 6세연상 조카뻘인 후지사와호사이(藤澤朋齊)는 흉내바둑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는 ‘흑번무적’이라고 칭했고 일본기원 사상 최초의 9단이다. 전성시절 그는 백을 들면 거의 매번 흉내바둑을 두었다. 덤이 등장하면서부터 거꾸로 백의 '선택과목'으로 변했다. 백의 흉내바둑으로 대표적 인물이었던 그는 1960년대에 사뭇 진지하고 학구적인 자세로 흉내바둑을 연구했다. 특히 1965년 일본 명인전 도전자결정국 린하이펑(林海峰)과의 대국에서 나타난 흉내바둑은 파문을 일으켰다. 대다수는 호사이의 흉내바둑을 맹렬히 비난했으나 일각에서는 오히려 용감한 시도라고 두둔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도전의식의 발로이며 그것은 건전한 '해커'가 되어서 오늘날의 바둑발전의 초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헌법1조가 민주공화국이듯이 바둑의 1조라면 착점은 자유가 아니던가. 호사이는 당시 흉내바둑을 시도하면서 거의 모든 판에서 초읽기에 몰리며 상대방보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쓴 것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따라서 단순히 상대방의 수를 카피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더 효율적 착수를 찾아 치열하게 탐구했다.
○…흉내바둑하면 서봉수 단연 서봉수의 흉내바둑이 유명하다. 80년 왕위전 도전기가로서 조훈현의 전관왕이 무너지는 시합이었다. 당시 서봉수는 세 판을 모두 백을 들고서 흉내바둑으로 승리했다. 80년 12월 서봉수가 왕위전에서 천하통일을 허물기 위해 도전장을 던졌다. 말이 좋아서 전관왕이지 전체 타이틀을 모조리 석권한다는 것은 만화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도전선봉에 서있는 서봉수는 모든 일이 자기 탓이라고 여겼다. 5번기 1국은 백을 든 조훈현이 이겼다. 바둑가는 이번에도 서봉수가 맥없이 물러날 것이라고 보았다. 서봉수는 어찌 되었건 조훈현을 이기는 길을 찾아야 했다. 비장의 무기라도 써야 할 판이었다. 바로 그때 신무기 들고 나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어진 2국에서는 백을 들고 흉내바둑을 구사했다. 조훈현 따라잡기를 연구한 지 6개월여. 서봉수는 신병기 흉내바둑을 선보였다. 조훈현으로서는 어차피 흉내도 한판의 바둑인데도, 심리적으로 동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3국은 조훈현이 이겨 다시 앞섰고 4국에서 서봉수가 흉내바둑으로 이겨 2대2로 만들었다. 백번필승의 희한한 흐름과 흉내바둑은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백번필승의 신화까지 만들어지고 있었다. 당시 덤은 4집반이었으므로 흑이 유리하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터. 따라서 백번필승은 아직까지 우리의 도전기 역사상 딱 한번 이루어졌다. 바로 80년도 왕위전이다. 5국에서는 돌을 가렸다. 서봉수는 또 백 차례였다. 누구나 5국에서 백을 들면 맥이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봉수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미 흉내를 시도했다면 마지막 까지 흉내를 내보겠다는 의욕이 오히려 앞선 터였다. 조훈현의 오기까지 이제 합쳐진다. 몇 일전 4국에서 흑으로서 패한 바둑을 카피하고 있었다. 흉내바둑을 나름대로 연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승부사 서봉수는 상대가 알고 있음을 간파하고 18수라는 비교적 짧은 흉내만 내고 곧장 난타전으로 전개하며 역시 승리를 거둔다. 오청원이나 호사이의 흉내바둑이 강한 실험정신 아래 이루어진 시도였다면 서봉수의 그것은 보다 심리적, 전략적 목표아래 이루어졌다. 무하마드 알리에 버금가는 조훈현의 풋워크를 잠재우려면 흉내바둑이 특효였다. 조훈현의 전관을 허문 서봉수는 그 여세를 몰아 3관왕까지 진격했다. 확실히 우리바둑은 실전적이다. 이기기 위해서 온갖 비책을 찾다보니 '별 희한한 권법'을 다 들고 나온다. ○…여러 흉내바둑 사례 그 이후 강훈이 서봉수를 상대로 흉내바둑을 시도해 화제가 됐다. 타고난 파이터 강훈은 패왕전과 국수전에서 백으로 두 판을 감행하여 1승1패를 기록했다. 강훈은 1998년 이창호를 상대로 백으로 또 한 번 흉내를 시도했다. 천하의 이창호도 이 당시 꽤 당황했던 흔적이 보인다. 고심을 거듭하던 이창호는 15번째 수를 천원에 두는 것으로 힘겹게 상대의 집요한 추격을 따돌렸다. 상대지명 선택제를 실시한 2007년 삼성화재배 32강전에서 강동윤은 30년 전 흉내바둑을 구사했던 서봉수에게 거꾸로 흉내바둑을 시도하여 판 맛을 보았다. 린하이펑도 훗날 흉내바둑을 써 먹었다. 2005년 서울서 열린 제4회 CSK배 한국전에서 이창호 격파 해법으로 흉내작전을 들고 나온 것. 흉내는 17수까지만 계속됐으나 그 와중에 이창호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결과는 이창호 9단의 1집 반 역전승이었다. 우리는 도전기에서도 흉내가 일어났다. 1969년 최고위전 도전기에서 부산바둑의 호프 강철민과 김인과의 최고위전 3국에서 강철민은 첫수를 천원에 두면서 흉내바둑을 두었다. 그 바둑을 이기고 4국에서도 이겨 강철민은 최고위를 차지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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