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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끝에서 다시 돌아서다

프로기사 20명을 배출한 김원 사범 스토리

2010-02-14 오전 11:10:20 입력 / 2010-02-14 오후 12:44:09 수정

S#1. 땅 끝에 서다.

상암동 누리꿈스퀘어 21층 회의실.
피사의 사탑처럼 비스듬히 기울게 설계된 빌딩이라 창 쪽에 앉으면 찌릿 오금이 저려온다.
상전벽해. 심란했던 난지도가 IT 도시로 변모했다.
수색과 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기가 서울의 서쪽 끝이다.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의 고층에서 퇴색한 앨범을 뒤적인다.
80년대에 상암동 맞은편 수색의 언덕에 살았었다. 지금 그 언덕을 바라보듯 그땐 매일 이쪽을 바라보고 살았었다. 물론 그땐 쓰레기 산이었다.

"전망 좋네요. 제가 사는 응암동까지 보이고."

김원 사범이 들어오며 말했다.
높은 곳에 서면 먼저 전망부터 살피게 되어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깔끔한 용모의 주인공 김원 7단.
그는 최근 바둑도장을 접었다. 20년 가까이 달고 있었던 '사부'의 명찰을 스스로 떼어버린 거였다.
승부대신 보급을 택해 걸어왔던 길이라 아쉬움이 컸으리라.

"여기 서니 땅 끝에 선 기분이네요."
"이제 다시 칼을 갈아 승부사로 뛰는 겁니까?"
"에이, 늦었죠. 새로운 일들을 해보고 싶습니다."
"사업?"
"사업일 수도 있고 보급일 수도 있겠죠."

구체적인 청사진은 꺼내지 않고 그가 씩 웃는다. 동안이지만 그도 벌써 사십 대 중반을 넘어섰다.


S#2. 형제는 용감했다.

김원, 김지명 형제는 두 살 터울이다.
바둑계에 널리 알려져 있듯이 형제가 모두 다재 다능 팔방미인이다. 두 형제, 광주 쪽에서 신동으로 유명했다.
김지명의 경우 3세에 유치원 입학, 7세에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통과해 9세에는 고교 입학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동생 김원도 형의 코스를 따라 일찌감치 초등학교 6년 과정을 단기로 접어버렸다.


▲ 한해원 2단과 함께 사회를 보고 있는 김지명 아마 6단.

당연히 형제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1974년 조기교육 붐이 일어 학원과 집에서 문제집을 풀며 공부했다. 이때 영재교육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면 형제의 운명이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대학에서 어린 꼬마들을 받아주었다면 일찌감치 전공을 택해 한 우물을 팠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에서 12세 이하는 대입검정고시를 보지 못하도록 법을 개정해버렸다.
그 바람에 형제는 잠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해야 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 조치훈 사범이 명인 타이틀을 따내며 바둑 붐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이 바둑에 관심을 가졌지요."

바둑에는 나이 제한이 없으므로 도전해보자고 가족은 결론을 내렸다.
광주에서 부천으로 이사해 형제는 동네기원을 다니며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항상 형의 빛나는 재능에 가려있던 아우가 바둑 쪽에서는 훨씬 빨랐다.
형 김지명은 '엄마 없는 하늘 아래'라는 영화에 출연했고, '푸른 신호등' DJ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방면으로 재능을 떨쳤지만 동생은 묵묵히 바둑만 두었다.

"형과 달리 저는 말수가 없고 내성적입니다."

김원 사범은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한다. 어쩌면 형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성격은 아닐지 모르겠다. 대화를 해보면 그는 논리정연하고 자기 생각이 분명한 스타일이라 '내성적'이란 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형제는 그렇게 바둑계에 들어왔다.


▲ 김종서 작가와 김원 7단이 타이젬 회의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S#3. 놀아봤던 사부가 놀고 싶은 제자의 심리는 안다.

김원은 76년에 바둑돌을 만지기 시작해 1년 만에 1급에 올라 한국기원 연구생이 되었다.
유창혁, 박영찬, 장성계 등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부했는데 당시 연구생 사범은 조훈현 국수였었다.
그런데 김원은 연구생 중 문제아로 통했다.
걸핏하면 수업을 빠졌고 나중에 3개월 무단결석을 하는 바람에 제적을 당하고 말았다.

"바둑이 그다지 재미없더라구요. 관철동 일대의 오락실이나 만화방으로 많이 샜었습니다."

그가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때는 18살 무렵이었다. 이때도 역시 조치훈 사범의 휠체어 대국이 자극제였다.

"나는 목숨을 걸고 바둑 둔다." 그 한 마디에 방황했던 청소년 김원은 바둑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종로를 떠도는 사이 연구생들도 바뀌어 천하의 이창호와 류시훈, 김영환, 정현산 등 날고 기는 천재들로 가득했다.
1986년 입단대회에서 김원은 조치훈처럼 영혼을 쥐어짜서 최선의 바둑을 두었다.
예선 포함 열흘 동안 대국하는 사이 몸무게가 7Kg 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창호와 함께 6승 2패 동률을 기록하며 입단면장을 받았다.

▲ 김원 7단.

"운 좋게 입단을 했지만 솔직히 실력은 당시 아마 강자들한테도 밀리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5개월 동안 단 한 판도 건지지 못하고 전패를 기록했지요. 후배들한테 정말 미안했습니다. 저 때문에 연구생 제도가 없어진다는 말까지 나왔으니까요."

다시 한 번 운기조식을 위해 그는 유창혁, 장성계와 함께 정릉의 암자로 들어갔다.

"어느 날 아침에 혼자서 기보를 놓아보는데 뭔가 밝은 느낌이 확 들어왔습니다. 아하, 이런 식으로 바둑을 두고 싶다! 뭐 그런 깨달음이라고나 할까요."

다시 기원에 돌아와 김원은 연말까지 전승을 기록했다.
그해 저단 진 승률 5위에 올랐고 이후 6단까지 무난하게 승단했다.

"보급 쪽으로 돌아선 것은 형님 때문이었습니다. 지명 형님이 대전에서 바둑교실을 하고 있었거든요. 우연히 그곳에 놀러갔다가 유경민을 가르치게 되면서 바둑교실로 입문하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김원은 구리와 강변역, 분당을 거치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김효정, 김혜민, 김선미, 박진솔, 윤재웅, 유경민, 유재성, 한해원, 조혜연 등 김원의 손을 거친 꿈나무들이 전원 프로에 입단하면서 '사부'의 명성을 천하에 날리게 된 것이다.
특별하게 '김원 도장'이라는 간판을 달지 않았는데 제자들이 스스로 도장 이름을 만들어 부르면서 한때 3대 도장에 포함되기도 했었다.
초기엔 여류기사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왔는데 1년에 3~4명이 계속 입단하면서 남자 층도 두터워졌다.
한상훈, 홍성지, 홍민표, 이재웅, 이민진까지 들어와 등용문을 통과했다.

"제 바둑이 그다지 강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주가 있긴 있었나 봅니다. 제가 워낙 많이 놀아봤으므로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빨리 간파했습니다. 녀석들의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읽어냈거든요. 하하하 산만해지는 걸 막고 시쳇말로 꽤나 빡세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의 문하에서 20여 명의 프로가 탄생했으니 사부로서는 아주 행복한 입장인 셈이다.


S#4. 땅 끝에서 돌아서면 다시 시작이다.


"아이들을 오래 가르쳤지만 열정과 책임감이 늘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많은 제자들을 입단시켰지만 그때마다 5분 이상을 즐거워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입단하지 못하고 가슴아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부들의 딜레마입니다."

김원 사범이 쓸쓸하게 웃는다.
할 만큼 했다지만 역시 제자들의 운명을 책임져야 하는 사부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털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바둑으로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좋아해서 새로운 곳을 찾아가 보급을 해보고 싶습니다. 바둑문화를 접하기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면 더욱 좋겠구요. 바둑 책도 한 권 써볼 생각입니다. 또 바둑에 재능 있는 아이들의 카운슬러 역할도 해보고 싶구요."

그는 그렇게 새 출발을 선언했다.
하던 일을 접는다는 것은 언제나 쓸쓸하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선언한다는 것 역시 쓸쓸한 일이다.
다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하므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선언한다는 것은 건전한 자기부담이며 자기 최면일 것이다. 아직도 소년처럼 눈빛이 싱싱한 김원 7단.
땅 끝에서 뒤돌아서시라.
길의 종점은 항상 돌아서면 출발점 아니던가?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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