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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저수첩

다정(多情)도 병이런가?

의정부 바둑지킴이 - 간월암 9단

2010-03-04 오후 1:44:52 입력 / 2010-03-05 오전 9:17:57 수정


▲ 의정부 제일시장에서.

S#1. 그러나 괜찮은 의정부

의정부란 지명을 들었을 때 여러분들께서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지?
필자의 망막에는 도봉산과 군부대, 부대찌개 등의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28년 전 3월초 의정부 망월사역에 내려 101보충대로 행진했던 기억이 새롭다.
3월이라 아직 바람은 차가운데 페치카는 폐쇄됐고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 군대는 미지의 공포라고 해도 좋았다.
그 새벽에 보충대 막사 너머로 보이는 도봉산 능선과 조각달은 왜 그리 쓸쓸하고 처량했던지 모르겠다.
그래서 의정부는 왠지 차갑게 다가온다.
그 쪽을 바라보고 오줌을 누지 않을 정도는 아니라도 장정 때의 기억 때문인지 이상하게 의정부에 정이 끌리지 않았다.


▲ 의정부 옛 지도. 출처 의정부시청.

의정부는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이다.
왜 그 시대에 행정기관이 의정부 쪽에 있었을까?
오며 가며 의정부를 지나치다 그런 의문을 품은 적 있지만 게으른 까닭에 정확한 지명유래를 찾아보지 않았었다.
알고 보니 이성계와 관련된 이름이었다.
조선 3대 태종(방원)이 집권한 뒤 정적인 형제들(방번, 방석)을 제거하자 상왕인 이성계가 발끈해서 함흥으로 올라가버렸다. 불충한 아들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거였다.
태종이 수없이 사람을 보내 사죄했으나 보내는 족족 이성계의 화살에 쓰러졌다. 그래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나온다.
태종이 집권한 뒤 2년 째 이성계의 마음이 풀어져 돌아왔는데 한양의 궁궐로 가지 않고 도봉산 자락 현 의정부에 머물렀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위세가 워낙 대단해서 삼정승이 찾아와 국사를 논하고 상왕의 결재를 받았다 해서 의정부가 지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현대에도 의정부는 군사도시의 이미지가 강하다.
미군부대가 주둔한 까닭에 부대찌개라는 퓨전음식이 나오지 않았던가?


▲ 간월암 9단 황원순 사범.

바둑인들 사이에서 의정부는 심심찮게 거론되는 지명이기도 하다.
커다란 전국대회가 있거나 스타 급 프로기사를 배출한 것도 아닌데 종종 의정부 번개모임 소식이 들리곤 했다.
알고 보니 의정부에 병적으로 다정한 바둑인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타이젬 아이디는 간월암(看月庵) 9단인 황원순 사범이 그 주인공.
한양대 기우회원이자 의정부 석우회를 이끌었던 황원순 사범은 바둑계에 의정부를 알린 홍보대사다.
매년 6월 마지막 주 토요일은 ‘황스데이’라고 해서 아마바둑인들이 의정부로 몰려간다.
그가 바둑친구들을 의정부로 불러 보양파티를 주최해서 붙은 이름이다.
해마다 황스데이 참석자들이 불어나면서 즐거운 고민에 빠져 있다는 그는 입버릇처럼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 의정부 중앙로에 위치한 복집.

"지나는 길에 꼭 의정부에 들러. 알고 보면 의정부 괜찮은 곳이야. 부대찌개 죽이잖아? 복지리를 잘하는 데도 있으니 한 그릇 때리고 가라고."

사람은 기억에 좌우되는 동물이다.
언젠가 따뜻한 느낌을 받은 곳은 잊지 않고 다시 찾게 마련이다.
마냥 사람 좋은 황 사범이 의정부에 살고 있다.


S#2. 바둑이 있는 곳은 어디라도 찾아 갑니다

"바둑은 열두 살 때 배웠습니다. 당시 서울 은평구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께서 철공소와 철물점을 운영하셨지요. 그때 손님들이 바둑을 자주 두었습니다. 그렇게 어깨 너머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거죠. 제 형님, 사촌형님들도 그렇게 바둑을 배웠는데 지금 모두 1급이 됐습니다."

상당히 일찍 바둑을 배웠지만 본격적으로 바둑에 심취한 시기는 대학생 때였다.
한양대(전기과) 기우회에 들어가면서 이원옥, 이상배, 강병두, 이용범 등 바둑친구들을 만나 자나깨나 바둑만 두었다고 한다.


▲ 복집에서의 첫 만남.

"강의는 수시로 빼먹고 바둑만 두었습니다. 집에 돌아와도 내일 기우들과 바둑 둘 생각을 하면 즐거웠지요. 왜 그렇게 바둑에 빠졌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들에 비해 기력은 조금 약했는데 이상하게 교내 바둑대회에 출전하면 우승 컵을 차지하곤 했다. 운이 좋았는지 승부에 강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서 한양대 기우회를 대표하는 멤버로 지금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다.

"솔직히 아마 정상급은 아닙니다. 정상급에 정선으로 버티는 정도일까요? 타이젬 9단을 달고 있지만 대국신청이 오는 대로 두면 금방 강단할 겁니다. 8단에서 9단 되기가 어찌나 힘든지 하하하 그래서 9단에 올랐다가 많이 지는 바람에 요새 타이젬 대국은 잠시 쉬는 중입니다."


강단이 싫어서 아이디 관리 중이라고 솔직하게 밝히는 간월암 9단.
그렇게 말하고 큭큭 웃음을 터뜨리는 얼굴에 동심이 묻어난다.
구김살이 없고 낙천적으로 다가온다.

"시간이 되면 아마 바둑대회는 어디라도 꼭 참가합니다. 성적이야 시원찮지만 정겨운 얼굴들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니까요."

지난해에도 그는 청풍명월, 태백, 인제, 서울 거리 축제, 제주도, 강진, 문경 등의 바둑대회에 참가했다.
문경대회가 끝났을 때는 지인들을 모두 의정부로 초청해 쫑파티를 주최했다.
'파티의 달인'이지만 엄청난 사업가는 아니고 조그만 전기회사를 운영한다고 했다.
그저 사람이 좋고 바둑이 좋고 술이 좋아 그리할 뿐이라는 것이다.


▲ 제일시장 지하의 한 막걸리 집에서.

"바둑만큼이나 좋아하는 취미가 바다낚시입니다. 바둑과 낚시를 좋아하다 보니 집을 많이 비웠지요."
"마나님이 바가지 안 긁습니까?"
"하하 그러려니 하고 봐주더군요. 대신 아내들이 속상해할 만한 딴 짓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게 어딘가요? 바둑과 낚시를 즐기는 남편들은 괜찮은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지방 바둑대회에 수시로 참가하고 바다를 찾아다니는가 하면 의정부에 있는 날도 자주 손님을 맞이하고 밤에는 타이젬에 입실해 시간을 보낸다니 간월암 9단은 천상 바둑인이다.


S#3. 좋은 친구들과 3박4일

전기를 전공하고 전기회사를 운영하는 간월암 9단이 전문가 입장에서 한국기원에 간절히 호소하는 건의사항이 있다.

"저는 이창호 9단의 열렬한 팬입니다. 요즘 이창호 9단이 전성기 때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데요. 가끔 한국기원 1층 바둑 TV 스튜디오에서 벌어지는 대국을 보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스튜디오라 아수선하잖아요. 각종 방송장비와 소품들이 산만하게 깔려있고 천정의 조명은 좀 뜨겁습니까? 이창호 9단이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땀 흘리는 장면을 보면 열통이 터집니다. 일본의 기성전이나 명인전 결승대국은 풍치 좋은 관광명소를 찾아다니며 이틀걸이 바둑을 둡니다. 그러니 관전기도 향기롭지요. 아무리 미디어 시대라고 해도 큰 바둑은 조용한 대국장에서 치렀으면 좋겠어요. 그게 어렵다면 스튜디오의 조명이라도 교체했으면 좋겠습니다. 열을 발산하지 않는 조명기구를 찾아봐야겠어요."

마치 자신의 일처럼 심각하게 말하는 간월암 9단의 표정이 진지하다. 바둑을 즐기기 위해 일할 땐 선택과 집중으로 몰아서 열심히 한다고 밝힌다.

"그래서 바둑은 제 인생의 보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둑을 놀이로 간주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바둑 둘 시간을 벌기 위해 그만큼 일을 열심히 하니까 저는 후회 없습니다. 좋은 친구들과 3박4일쯤 날을 잡아 바닷가 쪽을 쏘다니며 바둑도 두고 낚시를 하는 게 제 로망이랍니다."

유저수첩의 결론은 그랬다.
좋은 친구들과 3박 4일이 꿈이라는 결론, 참 소박하면서도 정겹지 않은가?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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