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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신화] 그 언덕에서 세상을 내려 보다 ①

바둑계 최대 학맥 충암학원을 소개한다

2010-09-21 오전 9:32:51 입력 / 2010-09-22 오전 9:41:39 수정


▲ 충암학원 전경.

S#1. 응암동의 올림푸스 신전

충암고는 은평구 응암동의 백련산 자락 언덕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교정에 서면 사방의 시계가 트여 가슴까지 열리는 기분입니다.
1965년에 세워진 충암고는 바둑과 야구의 명문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야구하면 떠오르는 명문고들이 수두룩하지만 바둑만큼은 충암과 비교할 수 있는 학교는 따로 없습니다.
동서와 고금을 통해 바둑의 요람으로 충암은 불멸의 이름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반세기의 풍상(風霜)을 견딘 교사(校舍)는 낡아 보이지만 바둑의 안경을 쓰고 그 언덕을 보면 결코 예사롭지 않습니다.
바둑 9단을 입신(入神)이라 하여 신의 반열에 놓지 않습니까?
다들 아시겠지만 충암에서 배출한 바둑의 신(9단)들이 무려 26명에 달합니다.
세계 정상에 등극한 이창호, 유창혁을 필두로 충암 출신 프로기사는 112명에 그들의 단수(段數)를 합하면 619단에 달합니다.

이쯤 되면 바둑의 올림푸스 신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물론 일본에도 기타니 도장이 500단을 배출했지요.
그러나 그곳은 바둑 전문도장이므로 개념이 약간 다를뿐더러 1975년 기타니 선생이 타계하면서 맥도 끊겼습니다.
그러나 충암의 바둑학맥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어 700단 돌파를 바라보고 있으며 바둑과 학교가 존재하는 한 바둑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새길 것입니다.
충암의 신화는 너무 광범위해서 한눈에 조망하기 어렵습니다.
광맥을 찾는 광부처럼 충암 스토리의 갱도를 따라 걸어 가보겠습니다.




S#2. 충암 이인관 선생


충암(沖岩)은 학교 설립자 이인관 선생의 아호입니다.
선생은 191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나 5세 때 부모를 따라 북간도로 이주했습니다.
성장하면서 용정의 대성중학교를 다녔습니다.
대성은 윤동주 시인의 모교로 항일투사들을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이때 이인관 학생은 약재행상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었다고 합니다.
영신환, 고약, 옥도정기, 회충약 등을 좌판에 놓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면서 약을 팔았으니 예능의 끼가 충만한 학생이었나 봅니다.
그가 간도의 마을을 찾아다니며 학도가와 권학가를 부르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약을 팔면서 의외로 돈을 많이 벌었고 또 약과 관련해 생물, 화학 등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는 동경유학을 결심하게 됩니다.
청년 이인관은 22세 때 거금 200원을 모아 일본으로 떠납니다.
일본대학 법과를 다니면서 그는 조선출신 유학생들을 보고 의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교육자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 명문가의 자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식민지 청년들답지 않게 돈과 시간을 낭비하며 무위도식을 즐겼습니다.
만주에서 약장사를 하며 어렵게 돈을 모아 유학 온 학도 입장에서 아주 못마땅했습니다.
유학을 올 정도로 선택받은 청년이라면 민족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게 청년 이인관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는 1936년에 귀국해 함북 청진철도학교 교사로 부임합니다.
이후 태성중, 대신상업중, 경성공고를 거쳐 1948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황해도 장단공립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합니다.
그리고 개성상업중학교, 인천상업중학교, 인천고등학교 등의 교장을 역임하면서 30년 동안 교육자로 청춘을 바쳤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끝난 뒤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6개월에 걸쳐 서구 각국의 교육기관과 공장 등을 견학하게 됩니다.
그렇게 선진국을 돌아보면서 그는 엄청난 자극을 받습니다.
특히 형식보다 실제적이고 내용이 충실한 유럽과 미국의 실업교육에 충격을 받고 귀국해 또 다른 도전을 꿈꿉니다.


그 꿈이 바로 육영사업이었습니다.
충암 선생은 교직생활을 청산하고 1965년 잡초 가득한 백련산 바위고개 6천 평을 사재로 매입해 땅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응암동은 한강에서 수해를 입은 이재민들이 몰려와 천막생활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너무 황량한 언덕이라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충암 선생은 굴하지 않고 학교 터를 다듬었습니다.
저수지를 메우고 바위를 깎아 기어코 충암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이인관 선생의 삶을 통해 우리는 충암학원 설립의 배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주 고학생의 열정, 일본유학 시절의 개탄, 선진국 견학의 자극 등이 어우러져 실용교육을 실현하겠다는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S#3. 이홍식 이사장, 바둑을 발견하다

충암 이인관 선생은 그렇게 교육에 열정을 쏟다 57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선생의 장남 이홍식은 1965년 해병대를 전역하고 부친을 도와 충암고 건축현장에 투입돼 공사감독을 맡습니다.
그리고 학교가 열리자 화학교사로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선친이 별세하면서 젊은 나이에 학교를 맡게 됐지요.

“홍식아. 학교보다는 내 의지와 신념을 물려받았으면 좋겠다.”

이 한 마디가 아들에게 전해준 충암 선생의 유언입니다.
그 아들 역시 교육대계만 바라보고 일직선으로 달려간 선친의 뜻을 따라 1970년부터 현재까지 40년 동안 충암학원을 지키고 있습니다.


▲ 故김수영 9단과 이홍식 이사장.

그가 충암학원 이사장에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응암동 동네 주민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아주 편한 복장에 시원한 이마가 인상적인 인물, 그가 바로 프로기사 김수영 사범이었습니다.
김수영 사범은 이홍식 이사장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사촌이라 거리를 오가다 마주쳐 눈인사를 나누던 사이였지요.

“이사장님, 요즘 바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충암에 바둑부를 만들어보시지요. 일본은 어릴 때부터 바둑 특기생을 길러내는데 우리도 그런 환경이 절실합니다.”

왜 갑자기 그 사람이 나타나 그런 이야기를 해왔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홍식 이사장은 김수영 사범의 눈빛에서 반짝하는 광채를 발견합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OK라는 말이 떨어집니다.
그 두 사람의 만남이 훗날 이토록 거대한 바둑학맥을 쌓으리라고는 두 사람 모두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세계 바둑계 최대의 두뇌집단 충암의 신화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브라운관을 통해 명쾌한 해설자로 얼굴이 알려진 고(故) 김수영 사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직언과 독설을 서슴없이 날렸고, 스승 조남철 9단을 끔찍하게 공경하고 바둑 보급을 위해 물불가리지 않았던 김수영 사범이 오늘의 충암을 있게 한 디딤돌이었던 것입니다.

내일 9월 22일(수)은 충암신화 2편 [비장의 충암대연구] 편이 소개됩니다.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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