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젬스페셜
뱃길에서 기성 슈사쿠(秀策)를 만나다
조선통산사의 길 1만리, 바둑으로 통하다 제1부
2010-10-22 오후 2:13:27 입력 / 2010-10-22 오후 6:19:44 수정

[제1부] 뱃길에서 기성 슈사쿠(秀策)를 만나다/인노시마
[제2부] 한류의 원조, 조선통신사/토모노우라
[제3부] 통신사 VS 본인방/교토
[제4부] 또 다른 세계를 보다/히코테
[제5부] 19로, 1만 리/관서일대
[제6부] 20세기의 영웅들/도쿄
[제7부] 기타니를 기억하는 1천명의 대국/히라츠카
S#1. 그 바다 끓며 넘치며
일본으로 가는 조선의 외교사절단은 한양의 궁궐에 예를 올리고 육로를 이용해 남하했다. 반도를 종단해 부산까지 가는 길은 꼬박 두 달이 걸렸다.
부산에서 해로를 이용해 쓰시마와 일본내해(日本內海)의 무수한 항구를 바느질하듯 거치면서 오사카까지 간 뒤 또 육로로 막부가 있는 에도(도쿄)까지 갔다.
그 여정이 자그마치 8개월 남짓 걸렸다.
조선통신사가 바다를 건너오면 열도의 일본인들은 열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바다는 피와 증오의 격랑이 넘실거리지 않았던가?
1592년 일본 전역의 영주(다이묘)들을 제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중국을 넘어 인도까지 병합하겠다는 야심으로 임진년 조일전쟁을 일으켰다.
기억하기도 싫은 그 전쟁.
조선 땅 인구의 삼분지 일이 줄어들고 산천초목이 초토화됐던 미증유의 참화.
200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살던 백의민족과 전국시대 백 년 동안 밤낮으로 투쟁하며 단련된 일본군대를 어떻게 비교해야 할까?
그러나 명나라가 참전하고 조선 각지에서 의병들이 궐기하면서 1년 만에 일본군의 기세는 꺾이고 만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바다를 장악하자 오갈 데 없어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구축하고 장기전에 돌입한다.
1597년 정유재란까지 6년 동안 금수강산은 철저하게 짓밟혔다.
그러나 도요토미는 결국 그 전쟁 때문에 세상을 뜨고 만다.
중국의 통일국가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몰락했다는 사실을 아마 그는 몰랐을 것이다.
이후 일본의 권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간다.
조선침략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던 그는 정중하게 외교의 재개를 조선에 요청한다.
마침 대륙에서 명(明)과 청(淸)이 부딪쳐 일본과의 평화가 절실했던 조선은 일본의 제의를 받아들여 회답사 겸 쇄환사라는 명칭으로 외교사절단을 보낸다. 조일전쟁 때 끌려간 포로들을 송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게 철천지원수 사이였던 조선과 일본은 소통하기 시작했다.

▲ 조선통신사의 일본열도 이동 경로.
17세기 초반부터 200년에 걸쳐 조선통신사는 12차례 일본을 방문했고 일본의 국왕사는 70차례 조선을 찾았다.
가해와 피해에 대한 측량을 떠나 그런 외교의 노력으로 17세기와 18세기 동아시아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외교사 이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까?
지금부터 필자는 400년 전 조선통신사의 길을 안내하면서 여러분과 함께 역사와 바둑문화에 관해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방대한 역사를 어찌 함부로 압축하거나 주마간산 격으로 훑을 수 있으랴만 바둑을 매개로 펼치는 기행이니 조금은 부드럽게 시공을 넘나들고 자유분방한 필치로 풀어갈 생각이다.
S#2. 신(神)의 한 수를 갈망했던 천재, 슈사쿠
10월 1일. 히로시마의 밤은 눅눅했다.
별이 보이는데도 습한 공기가 몸에 감겨왔다.
‘21세기의 조선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초청된 유창혁 9단, 이민진 5단과 함께 공항에서 차량을 이용해 오노미치 항으로 달렸다.
바둑 로드 이벤트의 출발점이 바로 오노미치였다.
대한해협, 쓰시마와 큐슈를 지나 일본내해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하룻밤을 묵고 새벽에 인노시마(因島)로 향했다.

▲ 인노시마의 도노우라 마을에 슈사쿠의 생가가 있다.
인노시마는 일본에서 불멸의 기성(碁聖)으로 통하는 슈사쿠(秀策)의 고향이다. 몇 년 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바둑만화 <고스트 바둑왕>의 주인공 유령 사이가 슈사쿠의 몸에 깃들었다 해서 더욱 알려진 곳이다.

▲ 슈사쿠 기념관.
1829년 인노시마의 농가에서 태어난 슈사쿠는 어머니한테 바둑의 기초를 배워 6세 때 성주 앞에서 재능을 보여 정식으로 사부를 만나게 되고 8세에 수도인 에도로 진출한다.

▲ 바둑의 기초를 어머니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10살에 초단 인허를 받았으며 특유의 1,3,5 포석으로 13년 동안 어성기 무패를 기록해 일본바둑사에 일획을 긋는다.
라이벌 가문의 인세키와 승부를 겨루면서 127의 묘수 한방을 터뜨려 상대의 귀를 붉게 만들었다는 ‘이적(耳赤)의 수’ 역시 슈사쿠의 작품이다.

▲ 슈사쿠 기념관에 가면 슈사쿠에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
동시대에 마땅한 적수를 찾지 못하고 신의 한 수를 갈망했던 슈사쿠는 33세의 나이에 콜레라에 걸려 생애를 마감한다.
슈사쿠가 지금까지 일본의 바둑 팬들에게 추앙받는 이유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상의 자리에서 세상을 떠난 비장한 운명이 극적이기 때문이리라.

▲ 기념관 뒤편의 생가.
바둑 로드 이벤트 대국에 앞서 슈사쿠 생가를 보여주고 그의 묘비에 참배하는 의식이 다분히 일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유창혁 9단, 이민진 5단은 국적을 떠나 바둑의 대선배에게 정중한 묵념을 올린다.

▲ 묵념하는 유창혁 9단.
그 장면에서 조선통신사가 오버랩된다.
조선은 일본에 문화적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지만 막상 와보니 상업의 발달로 열도는 급격히 진화하고 있었다.
도시는 번화했고 일개 지방 영주의 성이 경복궁보다 웅장했다.
잘 조직되고 훈련된 군대의 위용은 조선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외교는 선린의 간판 아래 상대방과 치열한 기 싸움이 전개되는 것.
도쿠가와 막부는 가공할 무위(武威)를 내세워 기를 꺾으려 했다.
그러나 조선통신사들은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에도까지 들어갔다.
사무라이의 무(武)에 선비의 문(文)으로 응수한 거였다.
역사를 떠올리면 폐부로부터 저항감이 끓어오르지만 바둑의 관점으로 국한하면 바둑을 한 차원 높게 끌어올린 인간 슈사쿠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
바둑문화만 보자.
그리 다짐하고 다짐해도 자꾸 피의 역사가 망막에 어른거려 시력을 저해하는 기분이다.
S#3. 바둑 로드 이벤트

▲ 마중나온 시청직원.
부두로 나가니 후쿠야마 시청직원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들이 들고 있는 기치가 예사롭지 않았다.
쾌속정을 타고 후쿠야마로 가는 길.
배 안에서 인솔자가 박스를 풀더니 조선통신사 의상을 하나씩 나눠준다.

앗!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람?
저쪽 포구에서도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환영식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옛날 분위기를 재현해보자고 부탁해왔다.
후쿠야마 시청 직원들이 전부 수행원 복장을 입고 간청하니 유창혁 9단이 정사(正使) 복장을 사양하기 어려웠다.
필자는 촬영을 빙자해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자꾸 그들이 통신사 도록(圖錄)을 보면서 힐끔거렸다.
뭔가 느낌이 왔다.
의상을 착용해달라는 눈치였다.
취재 중이라는 사인을 보내도 그들의 눈빛은 간절했다.
“머리 스타일이 그림에 나오는 서동(書童)과 흡사하다고 그러네요.”
아, 필자의 꽁지머리가 조선시대 학생을 연상케 한다는 것.
어쩔 수 없이 서동의 옷을 입었다.

그리고 셋이 뱃전에 섰고, 수행원들이 병풍처럼 뒤를 감쌌다.
머쓱하기 짝이 없었지만 후쿠야마의 포구에 도착해 환영객들의 박수를 받으니 어색하더라도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 보무도 당당히 배에서 내리는 유창혁 9단.

환영객 중에 일본의 프로기사 야마다와 만나미 양이 보였다.
그들이 바로 우리 기사들과 수담을 나눌 주인공들이었다.
그 항구가 바로 토모노우라.
과거 12회에 걸쳐 일본에 온 조선통신사들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입을 모은 미항(美港)이다.
바둑을 테마로 연출한 통신사 입항인데도 항구가 축제분위기였다.

▲ 토모노우라는 조선통신사들이 최고로 손꼽았던 미항이다.
‘조선통신사’
여기서 ‘통신’은 ‘믿음으로 통한다’ 라는 의미다.
많고 많은 명칭 가운데 통신을 택한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21세기의 지평을 여는 화두가 통신 아니던가?
20~30년 간격으로 찾아온 조선통신사 행렬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운 성대한 행사였다.
500명의 외교사절에 일본 측 호위무사 행렬까지 합하면 수천 명에 달했고 길이가 4Km, 한 지점을 통과하는데 네 시간이 걸렸다.
그 문화적 충격이 400년 지난 오늘까지 이어져 일본의 각 지방에서 도시 축제로 재현되고 있다.
과연 그들에게 조선통신사는 어떤 의미로 각인되어 있는 것일까?
왜 그들은 오늘날 애써 퇴색해가는 역사를 부활시키려 하는 것일까?
교과서의 역사왜곡 문제로 민족감정이 편치 않은 판에 조선통신사를 대국 일본에 조공하러 오는 사절로 비하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토모노우라를 비롯해 필자가 찾은 모든 도시의 시민들은 진심으로 조선통신사를 문화의 시혜자로 우러러 보는 시각이 압도적이었다.
정말 모를 일이었다.
그 의문이 이 번 일본기행의 화두라고 해도 좋았다.
(다음 화에 계속)
내일은 2부, [한류의 원조, 조선통신사]편을 통해 고도(古都) 토모노우라의 풍광과 16세기 에피소드. 한일바둑대결 등을 소개합니다.
TYGEM / 김종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