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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세상을 보다 - 히코네

조선통신사의 길, 1만리 바둑으로 통하다 제4부

2010-10-25 오후 9:41:29 입력 / 2010-10-25 오후 10:11:59 수정




[제1부] 뱃길에서 기성 슈사쿠(秀策)를 만나다/인노시마 - 바로가기
[제2부] 한류의 원조, 조선통신사/토모노우라 - 바로가기
[제3부] 조선통신사 VS 본인방/교토 - 바로가기
[제4부] 또 다른 세계를 보다/히코네
[제5부] 19로, 1만 리/관서일대
[제6부] 20세기의 영웅들/도쿄
[제7부] 기타니를 기억하는 1천명의 대국/히라츠카 


S#1. 17세기의 외교

“행여 우리를 억누르려 하지 말라. 우리는 조선을 떠날 때 세 가지를 가슴에 담는다. 소통이 잘 되어 양국의 선린이 지속되면 웃으며 돌아가고, 억류를 당하면 1년이고 10년이고 당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흉해(凶害)를 당해도 결코 피하지 않는다.”

조일전쟁 직후 강화를 위해 일본에 건너갔던 황신(黃信)이 으름장을 놓는 일본 측에 던진 일갈(一喝)이다.
최고의 대접을 받았지만 조선통신사들은 현해탄을 건널 때 목숨을 걸고 왔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인질이 되거나 위해를 당할 가능성이 많았다.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외교 전쟁은 치열했다.
당시 중국의 명나라는 동서남북 주변국가들 중 조선을 으뜸가는 형제 국으로 인식했다. 물론 중화사상에 따라 속국(屬國)의 개념이었지만.
골치 아픈 건 일본도 나름대로 동아시아 최강의 군사대국임을 과시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외교절차가 까다로웠다.
사신들의 자세, 국서의 표현에 따라 양국의 위계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조선 국왕이나 일본 쇼군의 위엄을 지켜주면서 실리와 명분을 나누는 게 외교의 핵심이었다.
조선으로 가는 일본 국왕(쇼군)의 문서는 대개 쓰시마에서 위조됐다.
쓰시마 도주와 조선 사신들이 담합해 다듬고 고쳤다.
원본 그대로 들고 갈 수 없는 위험요소를 제거했던 것이다.
현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실은 아니라도 그들의 위조행위가 양국 위정자들을 만족시켰기에 동아시아에 200년 동안 평화를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1년이 넘게 걸리는 통신사 출장길은 사신들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국서를 손에 받들고 바닷길 향하여
이 몸 몇 번이나 죽었다가 살았던가
오늘에야 배를 매니 참으로 꿈만 같구나

통신사 일원이었던 송희영은 귀국의 감회를 이렇게 읊었다.
조선통신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지만 그들이 활약했던 시기에 그나마 조선과 일본의 갈등이 조금씩 해소되고 약탈의 시대에서 공존의 시대로 진보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시대의 주역인 셈이다.


S#2. 하늘로 치솟은 성 - 히코네


일본내해를 거슬러 온 조선통신사 행렬은 오사카에 이르러 작은 배를 이용해 요도가와(淀川) 강을 따라 교토에 이르렀다.
교토에서부터 육로를 이용했는데 그 길은 오로지 쇼군만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지금 그 길의 명칭은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
일본 최대의 호수 비와코(琵琶湖) 연안을 따라난 길이다.


▲ 조선인가도

1607년 비와 호수 동쪽의 히코네(彦根)성에 하늘을 찌를 듯 드높은 천수각이 세워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인 이이(井伊) 가문의 영지 히코네는 지진이 드물고 기후가 좋으며 토지가 비옥해 살기 좋은 땅으로 잘 알려진 곳.
히코네에 성을 축조할 때 도쿠가와의 특명에 따라 히코네 주변의 영주들이 힘을 보탰다고 한다.
일본에서 다른 지역의 영주가 축성을 돕는 일은 거의 없다.
그만큼 이이 가문에 대한 쇼군의 애정이 깊었음을 알 수 있는 일화다.



지금도 일본의 성곽국보 1호로 지정되어 사랑을 받고 있는 히코네 성의 천수각이 완공될 시점에 조선통신사가 그곳에 도착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곽과 비옥한 토지, 광대한 비와 호수를 보고 조선의 선비들은 입을 모아 탄식한다.
“어째 하늘은 이토록 좋은 땅을 오랑캐에게 주었단 말인가?”


▲ 성에서 바라본 히코네시 전경

왜구들이 사는 야만의 땅으로 알았건만 막상 바다를 건너 와보니 이 섬나라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상상을 뛰어넘는 부(富)를 향유하고 있었다.
숱한 외침에 의해 쑥밭이 된 조국 조선을 생각하면 사신들의 가슴이 찢어졌으리라.


▲ 히코네의 조선통신사 숙소, 종안사


▲ 종안사에 안치된 조선 고관의 초상


▲ 통신사들의 숙소


▲ 유창혁 9단.

17세기 일본은 조선에서 데려온 도공(陶工)들을 활용해 수준 높은 도자기를 만들었고 네덜란드 상인들과 거래해 유럽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때 수출된 도자기가 무려 1백만 점에 달한다.
또 멕시코와 함께 일본은 세계 최대의 은(銀) 수출국이었으며 인구 1백만의 에도(江湖)는 17세기 세계 최대의 인구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일본의 발전을 지켜보는 사신들의 감정이 어땠을까?
아마 이곳을 둘러본 유창혁 9단이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S#3. 바둑통신사


▲ 현궁원에서 본 천수각

10월 5일. 히코네 성안의 현궁원(玄宮園)에서 유창혁 9단과 야마시로 9단의 기념대국이 열렸다.
매년 10월의 첫 주말에 히코네에서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된다.
양국의 대표기사들이 히코네 성에서 수담을 나누게 된 것도 이 축제와 무관하지 않은 기획이다.
관서지역의 언론사에 대서특필됐고 히코네의 바둑 팬들이 몰려와 공개해설을 지켜봤다.


▲ 유창혁 9단과 야마시로 9단


▲ 개회식


▲ 중계팀


                ▲ 해설을 보는 히코네 시민들


▲ 당일 오후 신문에 실린 대국기사를 읽는 유창혁과 야마시로 9단

10월 6일.
히코네의 명문 히가시고교(東高)에서 지도다면기가 마련됐다.
전 세계 챔피언 유창혁 9단을 맞는 학생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 히코네 동고


▲ 바둑부 학생들과 다면기


▲ 다면기


▲ 다면기

행사가 끝나고 에도시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하나쇼부 거리의 마을회관에서 조촐하게 잔치가 벌어졌다.
도시 차원의 행사가 아니라 히코네의 바둑 팬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그래서 그런지 편안하고 정겨운 자리였다.


▲ 건배하는 모습과 음식.



▲ 하네나오키 9단의 부친이자 프로기사인 하네씨

40여명이 모인 식탁에서 바둑과 조선통신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도 불렀다.
필자도 기타니 씨와 듀엣으로 무대에 섰다.
앵콜로 아리랑을 불렀는데 식탁에 앉은 한 사람이 눈물을 훔쳤다.


▲ 필자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회식이 끝나고 그 사람이 다가왔다.
“나 한국 사람이야. 우리 민요를 더 듣고 싶어 술을 한잔 사고 싶은데......”
그가 필자와 유창혁 9단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상당히 많은 인원이 2차로 술집에 가게 됐는데 그 모든 비용을 한국교포 토시가와(利川)씨가 지불했다.
일본인들은 그런 경우 철저하게 나눠 낸다.
“내가 다 쏠게!” 이런 경우는 틀림없이 재일교포라고 한다.


S#4. 타향살이 몇 해던가?

임진왜란 직후 일본에 건너간 사신들의 명칭은 쇄환사였다.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들을 찾아 데려가는 게 주 임무였다.
1차로 사명대사가 천여 명을 데려오는데 성공했지만 그 뒤로 일본에 온 통신사들은 헛걸음으로 통탄했다.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조선인들이 일본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적은 동포라도 조선으로 데려가면 부산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그들을 수용할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귀국한 포로들은 절망했다.
일본에서 손기술이 있는 조선인들은 빠르게 적응했다.
특히 큐슈지방을 중심으로 도공들이 예술가 대우를 받으며 촌락을 이루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천민으로 조롱받던 이들을 진심으로 아껴 예술가로 승화시킨 이들은 바로 일본의 다도인(茶道人)들이었다.
이 대목도 현재의 우리가 음미해봐야 할 장면 아닐까?


▲ 토시가와씨

제주도 출신의 토시가와는 올해 62세.
이천 서씨라서 일본 이름을 토시가와(利川)으로 지었다.
8세 때 부모와 함께 오사카로 이주했다. 54년 전이니까 1956년.
한국전쟁 직후, 가난을 참기 힘들어 야밤에 밀항했다고 전한다.
그는 청소년기에 독립해 히코네로 왔고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죽어라 일만 했다.
40년 동안 쇠를 깎은 끝에 부품공장을 인수하고 사장이 됐다.
좋은 주택과 차를 장만했고 환갑이 넘으면서 인생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 토시가와 씨의 주택

스킨스쿠버, 승마, 골프를 즐기고 가장 많은 시간을 바둑에 투자한다고 했다. 바둑을 통해 히코네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그 덕분에 사업도 번창했다고 밝혔다.


▲ 유창혁 9단이 토시가와 씨를 위해 흔쾌히 지도대국을 해주었다.

“나는 여기 자주 와. 고향 제주도와 비슷하거든.”
모국어를 반쯤 망각해버린 토시가와 씨는 존댓말을 모른다.
그러나 그 짧은 반말이 강렬하고 진솔하게 들린다.



히코네의 비와 호숫가에서 역사를 생각한다.
재일교포들의 삶, 그 궤적을 생각한다.
그리고 바둑을 생각한다.

(다음 화에 계속)

내일은 제5부 - <19로, 1만리> 편을 소개합니다.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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