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왕십리의 바둑아이돌 그룹, 무여회
매일 모여 바둑을 연구하는 여류기사 모임
2010-10-15 오후 4:20:40 입력 / 2010-10-16 오전 2:18:39 수정

S#1. 일곱 명의 소울메이트(soul mate)
왕십리 한국기원 4층 여류기사실은 쪽방이라 창문이 없어 비좁고 답답했다.
그러나 잠시 후 일곱 명의 무여회 멤버들이 들어오면서 환해졌다.
젊은 자체의 발광(發光)에 기사들 각각의 이름이 더해져 빛이 더했다.
이민진, 김혜민, 박소현, 김윤영, 박지연, 문도원, 김혜림 -
요즘 바둑언론매체에서 자주 소개되는 낯익은 이름들이다.
소위 성적을 좀 낸다는 젊은 여류기사들인데 이들의 옷차림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았다. 어딘가 닮았다 했더니 커플 티로 맞춰 입었다고 한다.
타이젬 취재 팀과 상견례를 나누는데 일곱 명이 주르르 줄을 선 뒤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름 앞에 번호를 붙인다.
“안녕하세요 무여회 1번 이민진입니다.”
그렇게 7번까지 악수를 나누니 마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라도 나와 있는 기분이다.
“아니, 왜 번호를 붙이죠?”
“그래야 명확하게 구분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번호는 나이 순이라고 한다. 영혼은 자유로워 모두 단단하게 뭉친 소울 메이트지만 나름대로 위계질서는 확실히 구분하는 모임이다.

▲ 필자와 무여회의 첫 대면.
“무여회란 무서운 여자들의 약칭이라면서요?”
“네, 맞습니다. 무서운 여자들이라기보다 무서운 여자들이라고 불리고 싶어서요.”
무여회란 이름을 들었을 때 무녀(巫女)를 연상한 것은 필자만의 오해는 아니리라.
“이름이 쌈빡하진 않지만 저희들이 오래 고민한 끝에 정한 거라 애착이 강하답니다.”
모두 입을 모아 대답한다. 각각 셔츠의 색이 다르지만 디자인이 같듯, 개성은 다르나 마음이 하나로 똘똘 뭉쳐진 일곱 명의 기사들이다.
그녀들이 모임을 만든 것은 올해 3월 24일.
아시안게임에 바둑이 들어가면서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자 정말 바둑 한 번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뜻에서 스터디 그룹을 만들기로 한 거였다.
물론 개인적인 친분의 연결고리로 이어진 인연이었다.
친목은 실력배양과 더불어 자연스레 다져지는 것이므로 일단 무조건 기원에 아침 일찍 나와 공동연구하고 사활을 풀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 한국기원에 모여 사활연구를 하고 있는 무여회.
특별한 스케줄이 없으면 오전 10시 홍익동 한국기원 여류기사실로 나와 오후 5시까지 의무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강제규정이 젊은 여류 프로기사들에게는 버거운 족쇄가 아닐까?
더구나 멤버들 전원이 한국기원에서 꽤나 먼 분당, 수원, 평촌, 김포, 용인, 연신내, 독바위에 산다니 회사원들처럼 정시 출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어린 나이에 바둑을 배워 입단을 목표로 공부하다 보니 대부분의 젊은 프로기사들은 꽉 짜인 생활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단에 성공하면 갑작스런 자유를 감당하지 못해 풀어지는 경향이 있거든요. 기왕 프로가 됐으니 남자들과도 당당하게 경쟁하는 게 마땅합니다. 다른 스포츠 종목은 남녀가 구분되어 있지만 바둑만큼은 성별의 경계가 없잖아요. 여러모로 여자들이 부족하고 불리한 게 사실이지만 두뇌를 쓰는 종목이라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보자는 취지로 뭉친 겁니다.”
이를 테면 스스로 건전한 구속을 택했다는 이야기다. 이야기인즉슨.
지각하면 벌금이 부과되고, 이유 없이 결석하면 더 큰 벌금을 물게 된다.
공식대국에서 승리하면 2천원의 승리수당을 무여회 통장에 저금한다.
일곱 명 전원과 개별인터뷰를 했는데 자신들의 모임에 대한 자긍심과 애착은 한결같았다.

▲ 왼쪽부터 김혜림, 문도원, 박소현.
“무여회를 만들고 난 뒤에 일제히 성적이 좋아졌어요. 그렇다면 괜찮은 모임이 분명한 거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여류기사들끼리 연구하는 것보다 강한 남자기사들과 부딪히며 연구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토요일에는 소소회로 나가니까 그 부분은 커버됩니다. 또 박영훈 9단을 초빙해 기보검토를 하면서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있습니다.”
화제를 바꿔 한중일 여류기사들의 판도에 관해 물어봤다.
그랬더니 맏언니 이민진 사범이 전혀 고민하지 않고 한국이 최강이라고 대답한다.
“제가 국제기전에서 중국 일본기사들과 자주 겨뤄봤는데 정상급 몇 명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한국이 강한 느낌입니다. 국내선발전 같은 경우는 누구를 만나도 쉬운 상대가 없거든요. 우리 무여회가 계속 공동연구를 한다면 앞으로 그쪽 친구들 애 좀 먹을 걸요.”
당찬 해설이다.
필자가 넉넉한 큰손이라면 아담하고 쾌적한 연구실 하나 마련해주고 싶은 충동이 든다.

▲ 번호 순서대로 - 이민진, 김혜민, 박소현, 김윤영, 박지연, 문도원, 김혜림. 개성에 맞는 색깔대로 웃옷을 맞춰 입었다.
S#2. 칠인칠색
무여회의 일곱 숙녀들의 프로필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그녀들의 꿈은 훗날 모두 힘을 합쳐 바둑유치원을 설립하고 어린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 1번 이민진, 2번 김혜민.
1번 이민진(1984년생,분당)
- 아시안게임 대표, 정관장배 대표로 8연승의 기적을 이룸(2007~2008)
맏언니, 강렬한 카리스마로 모임을 이끄는 회장이다.
별명은 추격자. 포석에 비해 중반 이후가 강해 붙은 별명이다.
기풍처럼 매사에도 뒷심이 강한 편이라고 한다. 정관장의 히로인으로 유명하듯 국제기전에 유난히 강한 애국처녀.
호탕하고 화끈한 성격이지만 내면은 여려서 눈물샘이 지나치게 발달했다는 설이 있음.
장차 바둑유치원을 설립하면 원장에 내정.
2번 김혜민(1986년생, 용인)
- 삼성화재배 본선진출, 대리배 준우승(2007), 여류기성전 준우승(2007)
동안얼굴에 성격이 온순해 동생들에게 늘 당하면서도 웃는 스타일.
기풍은 유연하나 노림이 강하다는 평.(멤버들은 음흉하다고 전함.^^)명지대에서 학업과 병행하면서 오히려 성적이 좋아졌다고 밝힘.
최근 김포보육원에 바둑보급활동을 나갔다 신선한 충격을 받고 앞으로도 다양한 분야를 찾아 보급하고 싶다고 함.
무여회에서는 부회장과 싸이월드 클럽 운영을 맡고 있음.
장차 바둑유치원 부원장, 스쿨버스담당

▲ 3번 박소현, 4번 김윤영.
3번 박소현(1988년생, 수원)
- 마스터즈 여자부 우승(2007), 정관장배 국가대표(2009)
모든 일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순수한 성격.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는 어려우나 한 번 마음을 열면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의리파. 기풍은 의연하고 유장한 선비 바둑.
스포츠우먼으로 모든 운동을 좋아하며 남자기사들과 테니스, 스쿼시, 스키 등을 즐긴다는 정보가 있음. 그런데도 몸이 약해 멤버들이 걱정하고 있으니 아이러니. 모임에서는 박부장으로 통함.
장차 바둑유치원 체육담당 교사
4번 김윤영(1989년생, 평촌)
- 아시안게임 대표, 여류기성전 우승(2010), 여류기성전 준우승(2008)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답게 덜렁거리는 단점이 있으나 매사에 쿨한 스타일. 바둑에 패배해도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상처도 덜 받는 편이라 스트레스 지수도 낮음.
그러나 기풍은 대단히 공격적이면서 모양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기풍. 모임에서는 연락담당을 맡고 있음.
장차 바둑유치원 율동담당

▲ 6번 문도원, 7번 김혜림, 5번 박지연.
5번 박지연(1991년생, 김포)
- 삼성화재배 16강 진출, 지지옥션배 본선, 마인드스포츠 단체전 은메달(2008)
올해 삼성화재배와 지지옥션배에서 연승을 올린 신데렐라.
무여회에서 가장 여성적인 멤버, 공주로 통함.
기풍은 모양을 중시하고 기세를 중요시함.
모임에서는 기보를 담당하며 바둑을 쫒아가기보다는 바둑 자체가 인생이고 싶다는 스무 살의 프로.
장차 바둑유치원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소통하는 역할
6번 문도원(1991년, 연신내)
- 지지옥션배 본선, 여류국수전 8강.
인내심이 거의 신이며 침착한 성격. 그러나 예상하지 못할 때 한방씩 터뜨리는 폭소제조기라고 함. 8월에 생일을 맞았는데 무여회 멤버들이 시계를 선물해 감동의 눈물을 터뜨림.
모임에서는 사활을 담당하고 있으며 기풍은 성격과 다르게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며 수읽기가 강함.
장차 바둑유치원 음악(기타)담당
7번 김혜림(1992년, 독바위)
- 여류국수·명인·기성전, 원익배 십단전 본선진출
무여회의 막내로 총무를 맡고 있음. 활달하고 싹싹한 성격과 앳된 얼굴로 멤머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중.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해서 먼 훗날 바둑책을 내고 싶은 욕심이 있음.
기풍은 실리를 좋아하며 잔수에 밝음.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의지할 수 있는 언니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고 밝힘.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바둑으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함.
장차 바둑유치원 재정담당

S#3. 그녀들의 꿈을 스케치하다
그녀들은 2주에 한번 씩 독서토론을 갖는다.
그녀들을 아끼는 대학 강사 한 분이 영혼에 자양분이 될 만한 교양서적들을 추천하면 숙독을 하고 와 느낌을 나눈다.
지금까지 [나비형 인간][공부의 달인][우리 세계의 절반은 굶주린다][거꾸로 생각해보라] 등 10여 권의 책을 텍스트로 읽었다.
독서야말로 바둑을 두는 기사들에게 아주 좋은 피로회복제여서 멤버들 전원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됐다고 한다.
그녀들에게 꿈을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온다.
“저희들은 젊을 때 치열하게 승부하고 나중에 바둑유치원을 지어 함께 운영하고 싶어요.”
“아마 저희는 나중에 전부 모여 살지 않을까 싶어요. 결혼을 해도 친척처럼 이웃에 모여 살자고 했거든요.”
그리고 가장 강렬한 한 마디가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일곱 명 모두 탄성을 터뜨린다.
“아!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꼭 함께 가고 싶어요.”

산티아고는 칠레의 수도. 그러나 산티아고 가는 길은 이베리아 반도 북쪽에 난 순례자의 길이다.
까마노 데 콤포스텔라,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성당으로 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이 순례하는 여정이다.
산길과 들길, 농로로 이어지는 그 길이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워 최근에는 종교적인 이유보다 자아를 찾는 여정으로 더 알려지면서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동경하는 길이다.
걸으면서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길.
살아온 흔적과 살아갈 의미를 탐색하는 길.
피레네 산맥을 넘고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안으로 안으로 자기를 찾아 돌아가는 길.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길.
800킬로미터에 달해 걸으면 두 달이 걸리는 그 길고 긴 코스를 일곱 명의 숙녀 승부사들이 가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들은 그저 열망할 뿐 이유를 선뜻 대지 못했다.
그러나 듣지 않아도 그녀들의 꿈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고난의 길을 함께 하고 싶은 거겠지.
그 어떤 난관도 일곱 명이 뭉치면 외롭지 않을 테니까.
함께 가면서도 어쩔 수 없이 승부를 겨뤄야 하는 19로의 길.
함께 걸으면서도 결국은 혼자 깨닫고 자신의 영혼을 닦아야 하는 산티아고 가는 길.
그 길이 그 길과 다르지 않을 테니까.
TYGEM / 김종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