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젬스페셜
바둑이 곧 만다라다
도신스님의 서광사 바둑 템플스테이 (2)
2010-11-30 오후 8:00:45 입력 / 2010-11-30 오후 8:59:46 수정
S#1. 만다라, 만다라
만다라(曼陀羅)는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불화를 말한다. 원래 밀교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데서 비롯했다.
이 용어는 1978년 김성동의 동명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청소년기에 입산한 수도승이 득도하기 위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뇌와 방황을 가감 없이 그린 소설 ‘만다라’는 진정한 도(道)가 산속의 수도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서 찾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작가 김성동은 ‘만다라’를 통해 타락한 한국의 불교를 비판하고 세상의 진리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한다는 실존의 문제를 짚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노래하는 스님으로 잘 알려진 도신스님을 보면 소설 만다라가 떠오른다.
거침없이 대중가요를 부르고 천진난만한 화풍의 그림을 그리고 프로기사에 범접할 정도의 바둑 실력을 갖춘 팔방미인 스님.
노래와 바둑은 혼자 입산수도해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없는 것들.
부단히 사람을 만나고 세상과 부딪히면서 깨우칠 수 있다.
스님이 무슨 노래를 부르고 바둑을 즐긴단 말인가?
혹자들은 그런 사시(斜視)로 볼 법도 하지만 필자처럼 통속적인 인간들은 고승(高僧)의 고고한 법력(法力)보다 도신스님처럼 구애 받지 않는 자연스러움에 친화된다.
그는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다.
어려운 법어대신 쉬운 말을 쓰고 그도 잘 안 통하면 통기타 걸머쥐고 시원하게 한 곡조 뽑아버린다.
그래서 팬도 많다.
고상한 취향을 우러르는 이들은 자꾸 종교인의 규범과 잣대를 들이대겠지만 도신스님은 씩 웃고 만다.
그를 보면 달마도가 연상되고 금복주 술병에 새겨진 모델이 떠오른다.
그 친화력이 도신스님의 능력이고 미덕이 아닐까 싶다.

S#2. 두 분의 아버님(법장, 중광)
노래하는 스님이라 이색적으로 다가오겠지만 도신스님은 한국불교계에서 이름 높은 두 분의 스님을 아버지로 모신 복 받은 후계자다.
2003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고 생명나눔실천운동을 주창한 법장스님은 소년 도신을 수덕사에서 받아들여 키운 아버님이자 직계스승이다.
2010년 7월 2일 KBS공개홀에서 열린 생명나눔운동 콘서트.
법장스님의 일대기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무대에 기타를 들고 나선 도신스님은 조계종의 큰스님들과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흐느꼈다.
스승 법장스님의 뜻을 기리는 콘서트가 성황을 이루자 감격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조계종단을 대표해 큰스님 한 분이 인사말을 전했다.
“도신은 젊었을 때 법장스님의 속을 많이 썩였습니다. 하라는 공부는 아니 하고 허구헌 날 기타치고 노래를 불렀으니까요. 그런데도 법장스님은 도신을 끔찍하게 수제자로 아꼈습니다. 오늘 이 콘서트를 보니까 법장스님의 큰 뜻을 비로소 이해할 것 같습니다. 말썽꾸러기 도신이지만 훗날 법장스님 당신의 유지를 이어갈 후계자로 도신이 적합하다는 걸 그때 이미 읽고 계셨던 겁니다. 어찌 보면 파격이지만 도신은 음악을 통해 대중과 호흡하며 자비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 생명나눔운동 콘서트 모습.
그랬다.
법장스님은 말년에 고향인 서산으로 내려가 서광사를 짓고 기공식을 끝내자마자 열반하셨다.
그 마무리를 위해 제자 도신을 주지로 임명했으니, 도신은 얼떨결에 서광사를 맡아 큰 불사의 빚을 떠안았다.
“이도 다 법장스님의 뜻이겠죠. 고생 많이 했습니다만 스승님이 내주신 숙제를 마친 것 같아 기분은 후련합니다.”
그렇게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큰스님 법장의 사랑을 받았는가 하면 걸레스님으로 알려진 중광스님도 젊은 도신을 아들로 삼아 정을 주었다.
아마 우리 불교계에서 도신스님처럼 양 극단의 스승 두 분을 모신 이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S#3. 산사에서 세속으로
도신은 8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 생활이 어렵게 되자 수덕사에 맡겨졌다. 그때 세 명의 여동생이 해외로 입양되어 떠나갔다.
“여동생들이 참 보고 싶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소년 도신은 가슴에 큰 상처를 안고 입산하게 된다.
당시 수덕사의 주지를 맡고 있던 분이 바로 법장스님.
“스님한테 회초리를 참 많이 맞았습니다. 저는 열네 살이 되도록 이부자리에 오줌을 지리곤 했습니다. 아침만 되면 축축한 그 느낌이 죽도록 싫었지요. 또래 동승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회초리까지 맞아야 했으니 그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아마 가정이 해체된 충격이 무척 컸나 봐요.”
동승(童僧)하면 천진난만한 모습이 연상되지만 어려웠던 시절에 동승들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수덕사에서 1킬로 쯤 떨어진 산 속에 정혜사가 있습니다. 그 곳에서 네 명의 동승이 함께 기거했는데 우리들의 임무는 취사였습니다. 스님들이 공양할 밥을 짓는데 50명분의 쌀을 씻고 가마솥에 삽질로 넣어 불을 지폈습니다.”
도신은 그렇게 소년 시절을 보내고 1976년 법장스님의 이름으로 수계를 받고 속리산 법주사의 승가학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책으로 공부하는 강원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미 법장스님의 설교를 통해 들었던 내용인데 왜 반복해 학습해야 하는지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승가학원을 벗어나서 무작정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발길 닿는 데로 걷다가 충남 광천의 정암사에 머물렀다.
예산의 수덕사에 가고 싶었지만 혼날 것 같아서 인근의 사찰에 은신한 것이다.
정암사에서 기타를 독학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 동승 시절부터 염불을 하면 목소리가 좋아서 신도들이 무척 좋아했었다.
그러던 중 수덕사에서 만공스님의 다례식(제사)이 있어 찾아갔는데 매표소 관리하는 분이 기타를 치고 있었다.
도신은 기타를 건네받아 조용필의 ‘한오백년’을 불렀다.
마침 지나가던 걸인 행색의 스님 한 분이 걸음을 멈추고 도신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로 걸레스님 중광(重光)이었다.
어허, 그 놈 목청 한 번 좋구나. 애야. 너 나와 같이 서울로 가자. 노래를 제대로 하게 해주마.”
그러나 도신은 걸레스님이 무서워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수덕사에 들어가니 주지 법장스님 곁에 중광스님이 나란히 앉아 웃고 있었다.
“중광스님을 따라 가거라.”
법장스님이 그렇게 권유했다.
이상하게 거역하고 싶지 않았다.
▲ 중광스님(사진출처-블로그 김윤세의 자연의학이야기)
S#4. 감로암의 밴드(Band)
중광스님을 따라 올라온 곳은 동대문 충신동의 감로암.
그 해가 1979년 가을이었다.
중광스님은 감로암의 지하실을 도신에게 내주었다.
도신은 세광음악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기타를 익혔고 중광스님으로부터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1981년에 중광스님의 제자인 가수 이남이를 통해 기타의 대가 신중현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사사받았고, 이교숙 교수에게 작곡을 배웠다.
또 명창 박동진 선생에게 판소리까지 전수받았으니 소리꾼 공부를 나름대로 충실히 한 셈이다.
도신의 기타 실력이 날로 늘자 중광스님이 지하실에 밴드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악기를 마련해주었다.
암자에서 밴드 소리가 들리니 인근의 재봉공장 아가씨들이 담장기와 위로 고개를 내밀고 감상하면서 ‘오빠!“를 외쳤다고 한다.
그렇게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운 뒤 1991년 퓨전국악밴드인 슬기둥과 함께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가지며 도신은 노래하는 스님으로 세상에 나서게 된다. 도신스님의 노래는 우렁차고 시원하지만 그 뒤 끝에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의 앙금이 묻어난다.
무대 위에서 그의 카리스마는 대단하다.
유명한 인기가수들과 공연을 해도 관객들의 호응이 떨어지지 않는다.
도신스님의 노래는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감상할 수 있다.
그냥 검색창에 도신스님을 치면 홈페이지가 뜬다.

▲ 이창호의 스승 전영선 사범과 도신스님.
산사의 가객, 도신스님이 기객(棋客)을 겸하게 된 것도 서울생활에서 전영선 사범을 만나면서부터였다.
희한한 것은 도신스님의 주변에 이남이, 중광, 전영선, 이외수 등 시대의 기인들이 둥그렇게 포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도신스님이 기인은 아닌데, 기인들이 도신스님을 편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허허,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그게 다 인연이겠지요.”
바둑 이야기만 나오면 콸콸 폭포수처럼 격정을 쏟아놓는 도신스님.
서광사의 템플스테이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리라.
내일은 제3화, 도신스님과 바둑 스토리를 소개합니다.
TYGEM / 김종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