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바둑 순정파 서산에 모이다.
12월 4일. 서광사에 30명의 각수삼매 프로그램 신청자들이 모였다.
오전 10시에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바둑애호가들을 위해 서산시에서 해미읍성 관광을 마련했다.
산사의 정갈한 채식 웰빙식단으로 점심을 마치고 이어진 환영식.
바둑의 이름 아래 연수생들은 오랜 지기처럼 서로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오후에는 부춘산 산행.
높진 않지만 평야지대 서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부춘산에 오르면서 그들은 도시생활의 피로와 마음의 묵은 때를 털어냈다.
명상은 내 안으로 떠나는 여행.
바둑의 길 또한 내 안에 나침반이 있는 법.
부춘산의 오솔길을 걷는 이들은 말을 잠시 잊었다.
바람소리, 산새의 노래, 그리고 발자국 소리.
모두의 이마에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더워지는 가슴, 내가 살아있고 또 옆에 살아있는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공존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눈에 띄는 풍경 하나.
황토 빛 수련복을 입은 연수생들이 각자의 식판을 꼼꼼하게 설거지한다.
내가 먹은 밥그릇을 내가 닦아본 게 언제쯤이던가?
수저를 닦으면서 어머니와 아내의 수고를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렇게 그들은 마음도 닦는다.

바둑 템플스테이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서광사 본전 2층은 깔끔했다.
늦은 시각에 서울에서 반가운 손님들이 산사를 찾아왔다.
프로기사 김성룡, 양건, 윤현석 등 30대 트리오와 중견기사 김동엽 9단이 응원을 온 것이다.
"바둑 템플스테이를 돕고 싶어 왔습니다. 어떤 형식으로라도 바둑애호가들이 모인 자리라면 달려와야죠."
김성룡 9단이 싹싹하게 웃으며 바둑판 앞에 앉는다.
곧바로 프로기사 다면지도대국이 시작된다.

최근에 김성룡, 양건, 윤현석 30대 트리오 기사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지방의 바둑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프로기사의 평균 연령층이 낮아지면서 중견의 대열에 오른 이들이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뛰고 있어 보기에 흐뭇하다.
한국기원의 박장우 팀장과 차재호 차장도 동행해 뒷전에서 선 채로 프로그램을 지켜본다.
도신스님의 바둑명상 프로그램이 또 다른 바둑문화콘텐츠로 성공하길 기원하는 마음이리라.
S#2. 그들은 각수삼매 1기생
이튿날의 일정은 각수삼매 토너먼트 대회.
단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총 호선으로 치러지는 바둑시합니다.
참가자들 중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아마추어 강자들이 상당한데도 토너먼트 그래프 위로 올라갈수록 바둑교실 소년들의 이름들만 남는다.
어른들이 승부를 양보한 탓일까?
소년들의 대국을 지켜보는 어른들의 표정이 훈훈해 보인다.
조기에 탈락한 이들이 차례로 한 자리에 모여 윤현석 프로와 다면기를 둔다.
그 사이 치열한 결승전이 벌어지고 초반부터 우세를 확립했던 소년이 끝내기에서 밀리는 바람에 역전을 당하고 형에게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역전패가 분했던지 눈물을 삼키는 소년.
필자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렇게 분하던?"
"네. 끝내기에서 너무 당했어요."
초읽기에 몰리는 상황에서 한집씩 대패질하듯 깎여나가는 아픔을 아는 이들은 안다.
"그래도 여기는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잖니. 템플스테이인데 너무 승부에 집착할 필요는 없어. 우승한 형을 축하해주렴."
"네 그래야죠. 하지만 막판에 실수한 제가 너무 짜증나요."
소년은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아직도 녀석의 가슴 속에는 승부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남아있는 듯 싶다.
도신스님의 후한 시상식에 이어 제1기 각수삼매 연수생들의 기념촬영.
동기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앞으로도 자주 만나자고 누군가 제의한다.
어떤 이는 2기에도 참가하고 싶다고 밝힌다.

"모처럼 만사 잊고 바둑만 바라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바둑의 경지가 높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바둑을 대한지 30년이 흘러 저의 성품과 노력이 어느정도 바둑에 고였다고 자부합니다. 그 세월 동안 만난 바둑친구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르더군요."
"저는 프로기사와 지도대국이 참 좋았습니다. 짧은 한판이었지만 사범님께서 제 행마의 부족함을 짚어주는데 그 한 수를 배운 것만으로도 많은 걸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1박2일 프로그램이 아주 다채로웠고, 바둑과 불교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른들은 대부분 바둑 벗들과 만난 것을 좋아했고 소년들은 산사의 환경과 이색적인 바둑수업이 인상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격려차 찾아온 윤현석 사범은 명상수련이 바둑수업에 효과적이라고 평했다.
"정말 괜찮은데요. 서울 올라가면 바둑도장의 원생들이나 지망생들에게 권유할 참입니다. 하루 이틀 프로그램으로 많은 걸 얻을 수는 없겠지만 임팩트가 강해서 동기부여가 될 것 같습니다."
서광사 홈페이지를 열어보면 각수삼매 1기생들의 사진과 소감문이 실려있다.

S#3. 절에서 야통(夜通)바둑으로 새해를 맞자
탬플스테이 2기는 12월 31일 ~ 1월 2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시작된다.
연말연시라 바둑애호가들이 시간 내기가 만만치 않을 텐테 도신스님의 생각은 이렇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을 바둑 두면서 보내자는 겁니다. 바둑판에서 새해를 맞이하구요. 흥미롭지 않나요?"
며칠 전 국회의 날치기 예산안 통과사태로 불거진 템플스테이.
조계종이 분노해서 정부 여당에 선전포고를 했었다.
2002년 정부의 요청으로 시작된 템플스테이인데 이제 와 무슨 종교단체 지원쯤으로 해석하고 예산을 주무르느냐는 불만이다.
"지원이야 되면 좋겠지만 그런 걸 바라고 앉아있을 수는 없지요. 이럴 때 더욱 자발적으로 바둑명상템플스테이를 추진해야죠. 순수한 바둑인들의 열정으로 뭔가 그려내야 된다는 이야깁니다."
뚝심 좋은 도신 스님의 한 마디다.
12월 17일 대한바둑협회는 '아마바둑인의 밤' 송년행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도신스님이 바둑인들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
노래 몇 곡 부르기 위해 서산에서 서울까지 행차하기 쉽지 않지만 도신스님은 선뜻 응했다.
"어디든 찾아가서 몇 곡이라도 불러드려야죠."
바둑에 대한 순정과 바둑인에 대한 의리가 확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