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로테르담 구시가지/ (오른쪽)신시가지
우리는 역 건너 아랍 계통 식당에 들어갔다. 각종 인종들이 꽉차서 북적거리는데 정신이 없다. 유럽에 처음 온 해원이가 겁을 먹을만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케밥(Kebab) 비슷한 음식을 사 갖고 왔다. 역시 해원이와 하진이가 끝내주게 잘 먹는다. 조금 있다가 하리가 웃으며 역으로 걸어 들어온다. 미안해 죽겠다. 웃느라고 도버 역만 안 지나쳤으면 이런 민폐를 안 끼쳤을 텐데.
새벽 두 시가 넘어 잠자리에 든 우리는 아침 식사를 좀 늦게 하고 테오(Theo van Ees 2단)의 안내를 받아서 나갔다. 테오는 바둑역사 연구를 활발히 하고 있는 사람이다. 테오는 기차로 이 곳에서 1 시간 떨어진 힐버섬(Hilversum)이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내가 "우리는 1등 기차표가 있다."며 웃으면서 하진이에게 '유레일 파스' 하니까 하진이가 호텔에 두고 나왔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기차표를 사서 우리는 힐버섬에 갔다. 인구 12만의 도시 힐버섬 쇼핑센터엔 마인드 스포츠(Mind Sports) 대회가 열리고 있다.
▲ (왼쪽)마인드 스포츠대회가 열린 힐버섬 쇼핑센터/ (오른쪽) 우리가 점심먹으러 간 식당가
1층에는 바둑과 첵커, 2층에는 체스와 브릿지 대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유럽 바둑문화센터 매니저인 프랑켄 얀센(Franken Jansen 아마 6단/ 네덜란드 챔피언)이 일본 옷을 입고 열심히 바둑강의를 하다가 우리를 반긴다. 우리는 이 곳에서 첵커 세계챔피언도 만났다. 우리도 지도기를 두어 주면서 참여했다. 점심 식사는 모두가 같이 몇 블록 떨어진 식당으로 갔다. 비가 오니까 테오가 자기의 코트를 벗어서 하진이에게 입혀 준다. 자기는 와이셔츠 바람으로 움츠리고 비를 맞으며 간다. 밖은 날씨가 꽤 춥다. 서양식 신사도를 발휘한 것이다.
▲ (왼쪽)우리 호텔/ (가운데) 테오/ (오른쪽)레이든
오후에 래이든 바둑클럽 대사배 대국장으로 왔다. 네덜란드 최상위 16명 중에서 챔피언을 뽑는다. 우승자는 한국 국무총리배 세계대회에 출전한다. 다음 주에 한국 대사가 바뀐다고 한다. 그래서 대사관에서는 김영채 영사 혼자만 나와 있다. 네덜란드 바둑 협회장 롱엔(Jan van Rongen 아마 3단)씨가 나에게 대사가 안 나온다고 해서 개막식을 없애고 일부러 우리를 힐버섬에 먼저 가도록 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에게는 시상식 때 인사말을 해 달라고 한다. 우리가 힐버섬에 가서 마인드 스포츠 대회에 참가한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 (왼쪽)네덜란드 한국대사배 수퍼그룹 16명의 대회/ (오른쪽) 하리가 관전하고 있다
'한국 대사배에 대사가 안 나오다니' 속으로 기분이 안 좋았으나 하필 대사가 이럴 때 바뀐다니 운도 안 좋았다. 수퍼그룹 16명이 바둑 두는 모습을 우리는 유리문을 통해서 들여다 보았다. 해원이가 "바둑 두는 모습들이 너무 진지해요." 한다. 주최측에서 내일 대회가 속계되기 때문에 오늘은 지도다면기 같은 행사가 없으니까 마음대로 관광을 다녀오라고 한다. 선수들이 내일 대회가 있으면 아무 것도 안하고 쉬고 싶어 한다고 한다.
▲ 덴하그 시내 침묵왕 윌리엄(William the Silent -오렌지公) 동상
기분이 찜찜해 있는 나에게 김 영사가 "그 동안 제가 덴하그(den Haag)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한다. 덴하그의 영어 이름은 헤이그(Hague)다. 우리 3명은 김영사 차로 1시간쯤 떨어진 곳에 있는 덴하그에 갔다. 김 영사는 바둑이 아마 3단이고 우리에 대해 벌써 잘 알고 있다. 이런 행사에서 바둑인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우리는 그와 먼저 아름다운 해안 휴양지인 스케이브닝헨을 차로 돈 후 시내로 갔다. 김 영사는 우리에게 국제사법재판소, 국회의사당 등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만국평화회의장에 가서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건물이 크고 무게 있어 보인다.
▲ 만국평화회의장(Binnen hof)
▲ (왼쪽)덴하그의 이준열사기념관/ (오른쪽)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 곳은 이준 열사가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가서 일본이 우리에게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1905년 11월)을 무효화 시키려고 노력하던 장소다. 그러나 이에 앞서 그해 7월에 일본외상 가쓰라와 미국무장관 태프트는 만나서 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한국을 나눠 먹기로 합의를 본 후였다. 우리 대표단은 그것도 모르고 미국에 거는 기대가 컸다. 이상설, 이위종, 이준 등 한국 대표단은 회의장에 못 들어가게 하니까 밖에서 각국 대표를 상대로 전단을 뿌리고 개인 접촉을 하며 애를 쓰다가 이준열사는 이 곳에서 분사(憤死)한다.
▲ 덴하그 만국평화회의장 앞. (왼쪽부터) 김영사, 이하진, 한해원, 필자
나는 어려서 이준 열사가 자기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어 일본대표에게 던졌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이준 열사는 이곳에 묵으면서 어떻게든 일본에게 억울하게 당하는 우리나라를 알리려고 침식을 잊고 노력했다고 한다. 하숙방세도 못 내고 먹을 것도 못 먹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실의와 분노로 세상을 떠난 분이다. 그 당시 이준 열사에게 이 곳은 얼마나 생소한 곳이었을까. 그 분의 명복을 빈다. 당시 이준 열사의 하숙집이 이제는 그의 기념관이 되었다.
우리는 저녁을 한국식당에서 먹었다. 주인이 우리 테이블로 오더니 한국에서 온 바둑사절단을 환영한다고 인사를 한다. 보니까 김영사가 벌써 전화로 우리 얘길 해놓았다. 나는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에 해원이와 하진이를 데려가고 싶었으나 덴하그에 우리가 오후 너무 늦게 왔다. 그 곳에는 베르미어의 '귀고리 소녀', 렘브란트의 처음과 마지막 자화상을 비롯해 무수한 명화들이 있는 곳이다. 덴하그는 정치의 중심지로 왕궁이 있고 나는 전에 대사를 만나러 이 곳 한국대사관에 온 일이 있었다. 덴하그를 구경한 후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에 하리가 우리 호텔로 와서 오후 5시경에 대회가 끝날 테니까 그 동안 우리에게 레이든을 안내 하겠다고 한다. 우리는 네덜란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풍차를 방문했다. 1~2층은 주인의 살림집. 3층부터 공장이다. 7층까지 있고 내부가 꽤 크다. 바람의 힘으로 저 큰 맷 돌과 기계가 돌아가다니. 거기에다 바람은 무한동력이 아닌가. 옛날에는 네덜란드에 풍차가 1만 5천 군데가 있었는데 지금은 8백개 밖에 없다. 그 당시에는 풍차 집은 그 도시의 유지에 속했다고 한다. 우리는 7층까지 기어 올라갔다.
▲ 풍차 위에서
이 곳 레이든은 17세기 화가 램브란트(Rembrandt)의 고향이고 그가 바로 풍차집 아들이었다. 램브란트의 집이 있던 곳에는 그를 상징하는 풍차가 세워져서 돌고 있다. 올해는 램브란트 탄생 400주년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그의 특별 전이 열리고 있다. 그의 그림은 강렬한 힘과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 탁월한 빛의 처리 기법으로 아직도 신비로 남아 있다. 나는 그의 그림에서 깊이와 무게를 느낀다.
▲ (왼쪽)우리가 들어간 풍차/ (오른쪽) 렘브란트 집 풍차
▲ (왼쪽) 렘브란트 자화상(1660)/ (오른쪽) 야간순찰(1659)
풍차에서 나와 우리는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하리가 자기 학생 시절 단골 카페를 지나가며 저 집 주인이 자기가 암스텔담에서 공부하다가 1년 반만에 다시 갔더니 첫 마디가 "하리, 자네가 전에 맥주 값 1불 50전 밀린 게 있네." 했다며 웃는다. 그러나 하리가 나하고 3년 전에는 같은 길을 걸어 가면서 자기가 학생 때 쫓아 다니던 여자들 얘기만 신나게 했었다.
오늘은 여자들 앞이라 그런 얘긴 안 한다. 그의 별명은 '크로커다일(Crocodile-악어)'이다. 바둑을 순하게 두다가 기회가 오면 갑자기 돌아서서 무는데 상처가 치명적이라고 한다. 나도 한번 당했다. 3점 접바둑인데 누르는대로 푹푹 들어가길레 깔보고 좀 무리수를 두었다. '악어'가 한참 장고하더니 단호하게 반격을 시작하는데 그 때 진땀 흘린 기억이 새롭다.
레이든 시내를 걷다 보면 비어 있는 벽 면에 세계 각국 어(語)로 시(詩)가 적혀 있다. 장식한 것처럼도 보이고 미관상 보기도 좋다. 일본 시도 몇 편 보인다. 100여 국가가 참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시는 눈에 안 띈다. 한글도 자랑 할 겸 있으면 보기가 좋을 텐데. 친한파 하리가 시의원인 자기 부인을 시켜 한국 대사관에 몇번 연락했으나 아무 답이 없었다고 한다. 대사관 측에서는 한국에 연락해서 시를 고르고 누가 여기까지 와서 벽에 쓰고 하는 일이 귀찮아서였을까. 아니면 문화수출이 세계화시대에선 최고상품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 (왼쪽) 한해원 3단/ (오른쪽) 시(詩)가 적힌 벽(하리가 설명 중)
16~7세기에 래이든은 무역으로 돈을 번 부자가 많아 그들이 자기네 이름만 붙여 주면 다세대 주택을 지어주어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와 살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 4~5백 년 된 그 집들이 가장 고급 주택으로 바뀌었다. 당시는 변두리가 지금은 시내 복판이 되고 집들은 아직도 튼튼하다고 한다. 하리가 자기가 찍어 놓은 집에 우리를 데려가서 "내가 은퇴한 후에 살 곳."이라고 소개한다. 고풍이 나면서 고급 분위기다. 네셔날 지오그라피의 사진작가 하리는 네덜란드 바둑협회 재무다.
바다 보다 낮은 저 지대가 많은 네덜란드는 돌이 안 나와 거의가 벽돌집이다. 벽돌이 단단해 두 장을 깨던 한국태권도 사범이 이 곳 벽돌은 한 장도 깰 수 없어 격파용은 한국에서 수입해 들어 온다고 한다. 우리가 걷는 코스도 네덜란드 풍의 벽돌집이 나란히 서서 운하를 끼고 계속되고 있다. 시내를 걷다가 옛 바둑판을 파는 중국 가게가 눈에 띄었다. 바둑 판과 돌이 처음 보는 모양이라 우리의 발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런데 일요일이라 문을 닫아서 못 들어갔다.
▲ 레이든 시내에 17세기 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오른쪽 집 같은 지붕 처리가 많다)
하리가 오늘 프로에게 지도를 받고 싶어 미리 대회장에 와있는 회원들이 있을 거라고 해서 우리는 레이든 시내를 1시간만 돌고 대회장으로 갔다. 전에 내가 이 곳에 와서 2시간 코스를 돌았을 때 하리가 "다음엔 3시간 코스로 돌자."고 했었는데. 우리가 대회장에 도착하니까 정말 몇명이 기다리고 있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다면기를 두고 있는 동안 한국행 입상자들이 정해졌다.
챔피언은 작년 팀바둑대회에 3장으로 한국에 왔던 허트 흐로넨(Geert Groenen 아마 6단), 준우승은 미힐(Michiel Eijkhout 아마 5단), 3위는 멀린(Merlin Kuin 아마 5단)이 했다. 한국 부인과 사는 강자 에밀(Emil Nijhuis 아마 6단)은 아쉽게도 4위에 그쳤다. 허트는 우승 후 자기 동거녀와 오래 동안 포옹을 풀지 않는다. 너무 기쁜가 보다. 이 때 유럽 최대의 바둑서적과 용품 판매상 피터(Peter Zandveld)가 오더니 두 여자 프로에게 호주 사람 존 파워(John Power)가 번역한 '무적 수책(Invincible Shusaku)'을 한 권 씩 선사한다. 영어 바둑 책 중 가장 유명한 꽤 두꺼운 책이다.
폐회식에서 시상식과 내 인사말이 있었는데 네덜란드는 교육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영어를 원어민처럼 한다. 그래서 농담을 하면 전체가 동시에 웃는다. 유럽에선 영국을 빼놓곤 여기만 그렇다. 시상식 후 우승자 허트와 하진이 간에 두 점 특별 대국이 있었다. 하진이의 5집 승. 하진이가 여기에 오기전 루이 9단을 이기고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며칠전엔 프랑스 챔피언도 두점으로 이겼다. 대국 후 허트가 나에게 와서 자기가 바보 같은 수를 두었다며 자책을 많이 한다.
오늘 저녁엔 롱엔씨가 우리를 자기 집에 초청했다. 본인이 직접 요리를 하겠다고 한다. 바둑 외에 요리가 그의 취미다. 그의 서가에는 온갖 바둑 책을 빼고 나면 제일 많은 게 요리 책이다. 그 다음이 자기 전공인 컴퓨터 책이다. 내가 3년전 대사배를 창설하러 왔을 때 얀 롱엔 회장이 너무 적극적이라 놀랐는데 나중에야 그가 친한파라는 걸 알게 된다.
▲ (왼쪽) 얀의 서가/ (오른쪽) 레이든 이하진 3단
얀이 나에게 레이든에 사는 나와 친한 사람만 초청했다고 한다. 하리, 필립, 빔, 테오 등이다. 이 중 필립(Filip)은 5단으로 이번 대회에서 5위를 했다.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바둑교실은 학생이 1천 5백 명쯤 되는데 작년부터 이름을 'Go school'에서 'Baduk school'로 고쳤다. 내놓고 친한 파가 된 것이다. 빔(Wim)은 아마 4단으로 이번에 처음 수퍼그룹에 들어갔다. 성적은 밑에서 세번째 인데도 만족해 한다. 우리 집 사람도 대학 일로 레이든에 몇 번 가서 이들과 다 친하다.
우리만 얀(Jan)의 차를 타고 가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자전거로 온다. 우리가 도착하고 20분쯤 후에 자전거 부대가 도착한다. 내가 가본 나라 중에는 네덜란드와 중국이 자전거를 가장 많이 타는데 중국이 자동차 문화가 보편화 되면서 자전거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다고 한다. 국민건강을 위해서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을 텐데.
얀은 고급 주택가에서 잘 산다. 한국에 다녀 온 후로 얀이 자기 집을 온돌로 뜯어 고쳤다. 돌 바닥인 응접실도 온돌이라고 한다. 얀의 부인이 한국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금년에는 바둑대회에 남편 따라 한국에 오고 싶다고 한다. 얀이 요리한 음식은 맛은 좀 독특한 것은 같은데 양이 적어 우리가 실컷 먹지를 못 했다. 내가 해원이와 하진이에게 "너희들에겐 음식이 질 보다 양일텐데." 하며 놀렸다. 거의가 185cm가 넘는 거구의 화란 사람들이 이 음식으로 어떻게 배를 채울까?
▲ 얀의 집에서 (왼쪽부터) 빔, 하진, 테오, 얀 부부, 필자, 하리
저녁식사 전에 이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었는데 해원이와 하진이가 그런 분위기에 이제는 꽤 익숙해 진 것 같다. 네덜란드 바둑협회는 그 나라 체육부 소속으로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다. 이 돈으로 어린 유망주 바둑 교육비에 쓰려는 생각이 있다며 한국 유명도장에 자기네 영재를 보내면 경비가 어떻게 드는지 문의를 해 온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모든 체육부 산하 기관은 경기를 하기 전에 약물검사(Doping Test)를 해야 하는 규정을 따라야 한다는 거다.
내가 "바둑에 무슨 약물 검사가 필요하냐?"고 묻자 롱엔씨가 "바둑에도 필요하다. 집중력 유지시간(Concentration span)을 늘려 주는 약, 긴장완화제 등은 어느 선수들에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도 앞으로 바둑대회에 약물검사가 규정화 되려나? 식사 후 우리측에서는 서비스로 다면기를 두어 주었다. 이 사람들은 바둑회 간부들이라 일만 하느라고 프로의 지도를 아직 못 받아 봤다고 한다. 프로에게 지도를 받아본 빔만 나와 두고 나머지는 해원이와 하진이가 나누어서 두었다. 밤 늦게 얀이 우리를 호텔로 데려다 주고 작별 인사를 한다. 나만 알고 있으라고 하면서 자기가 건강상 이유로 지도자 자리를 후배에게 내어 주고 은퇴하겠다고 한다. 그 후 일반회원으로 바둑을 즐기려는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네덜란드 협회장만 17년을 했다. 아까 누군가 나에게 얀이 몇 달 전에 심장마비를 한 번 일으켰었다고 한다. 60이면 은퇴 하기는 이른 나이다.
▲ (왼쪽) 튜립/ (오른쪽) 풍차
오늘 저녁 6시 반 비행기니까 아침부터 서둘러 암스텔담을 봐야 한다. 아침에 호텔 기념품점에서 하진이가 전통 나막신에 관심을 보이며 신어 보고 하더니 가격이 안 맞는지 안 산다. 우리는 기차로 먼저 스키폴 공항에 가서 짐을 Locker에 넣고 몸만 가볍게 다니기로 했다. 나는 30여 년 전에 미국에서 기차 여행을 한 후에 첫 기차 여행이다. 내가 운전하고 다니는 걸 좋아해서 항상 자동차 여행만 해 왔는데 기차 여행을 해 보니 장단점이 있다. 기차 여행은 짐이 무거우면 지옥이다.
우리는 먼저 유럽 바둑문화센터(European Go Culture Centre)로 갔다. 월요일은 쉬는 날인데 우리가 온다니까 매니저인 프랑켄이 미리 나와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기차 한번, 전차 여섯 정거장, 그리고 1km를 걸어서 목적지에 도달했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건물이 큰데 놀란다. "한국기원보다 더 좋아요"한다. 우리는 프랑켄의 안내로 문화센터를 돌아 봤다. 대국장으로 쓰는 큰 홀이 너 댓 개 되는데 일부를 브릿지 대회장으로 쓰고 있다.
홀을 대여 해 주어 그 수입으로 세 명이 월급을 받고 이 곳에서 일 한다고 한다. 작은 방은 많다. 어느 방은 일본학교로 쓰이고 있다. 이와모토 9단의 호 '훈화(薰和)'라는 다다미로 꾸며진 방은 일본 타이틀 매치 할 때와 똑같이 꾸며 놨다. 복도에는 이 곳 역사를 알려 주는 사진들이 걸려 있다. 프랑켄과 필립이 10대 소년일 적에 바둑 두는 사진도 있어 보면서 같이 웃었다. 그러다가 이와모토 9단 사진 앞에 오더니 프랑켄이 합장을 하고 절을 한다.
▲ 유럽 바둑문화센터
그런데 사고가 발생했다. 항공표 담당 하진이가 우리 비행기표 전체를 호텔 방에 두고 나왔다고 한다. 하진이는 표(票)담당이고 해원이는 여권담당이다. 내가 "너희 둘 중 한 명만 소지품을 잃어 버리면 우린 망한다" 하는 말을 여러번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다. 아직 고등학교 3학년생인 하진이가 첫 유럽여행에 기분 좋게 들떠 있다. 그런 젊음이 부럽다.
믿을 곳은 또 하리뿐이다. 하리에게 전화 하니까 자기가 호텔에 가서 표를 찾아서 이리로 오겠다고 한다. 하리는 여기서 50km 떨어진 레이든 자기 집에 찾아 온 손님들과 얘기 중이라고 한다. "하리가 우리하고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었나 왜 자꾸 이렇게 꼬이지?" "방 청소하는 사람이 항공표를 버렸으면 어떻게 하지?" "항공 표를 분실했을 경우 아마 일인당 백불 정도 벌금만 내면 될꺼야. 최악의 경우는 공항에 일찍 나가 그렇게 라도 하자" 우리는 별 상상을 다 해 봤다.
내가 3년 전 여기에 왔을 때 이 센터의 설립목적이 체코처럼 일본과 유럽의 문화교류와 일본바둑의 보급으로 되어 있었다. 내가 유럽 바둑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와모토 9단도 기도보급이 목적이었지 바둑을 일본 한 나라에 국한시킬 뜻이 아니었을 걸로 믿는다."고 했다. 이번에 오니까 센터의 목적이 유럽에 바둑보급을 하는 것으로 고쳐 놨다.
▲ (왼쪽) 복도/ (오른쪽) 대국실 아래층 바에 갔는데 3년 전에는 'Go Bar', 'Go Hamburger' 등이 있어서 재미있었는데 이번에는 없다. 물어보니까 다 빌려주었다. 한 시간 후에 하리가 비행기표를 들고 웃으며 들어 온다. 이번에도 미안해 죽겠다. 내가 하리에게 "3년 전 한국 외교관, 네덜란드 바둑협회 간부 8명이 나와 함께 식사를 했던 한국식당이 여기에서 멀지 않았는데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기억한다"고 한다. 내가 "그리로 가서 우리가 점심을 맛있는 걸로 쏘겠다."고 했다. 그런데 가니까 월요일이라 휴업이다. 할 수 없이 그 옆 중국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점심 식사 중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해리가 나에게 전화했다. "옥스포드에서 자매도시 레이든으로, 해리에서 하리로(같은 Harry지만 이 곳에선 하리로 발음) 비슷한 배를 바꿔 타고 순항 중인 것을 축하한다."고 한다. 내가 어떻게 소식을 알았냐고 하니까 "테오가 전화해서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보니 작년 학술대회에서 두 명이 같은 방을 쓰며 며칠을 같이 보내 친한 사이인 것을 내가 깜박했다.
해리는 기차를 놓쳐서 고생했단 얘기를 듣고 유감이라며 웃는다. 유럽 바둑계가 좁아서 소문이 빠르다. 해리는 한국에 있는 우리 집사람에게까지 전화하여 내가 네덜란드에서 어떻게 여행을 하고 있는지 알려 주었다. 레이든 대학도 명문이고 이 곳도 대학도시라 옥스포드와 자매결연을 맺었나 보다.
식사 후 하리는 우리가 원하는대로 반 고흐 박물관에 데려다 주고 작별 인사를 한다. 고흐와 램브란트 특별전을 같이 보면 표가 싸지만 시간이 없어 고흐만 보기로 했다. 줄이 길어 표를 사는 데까지 20분은 걸렸다. 빈센트 반 고흐(Van Gogh 1853-1890) 만큼 전 세계에 많은 팬을 가진 화가도 드물 거다. 그는 인상파가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는 1886년 파리에 도착했다. 고호는 피사로, 세잔느, 시냑, 로트렉, 에밀 베르나르와 자주 만나면서 점묘법과 분할법 등 새로운 화법을 개척한다.
▲ (왼쪽) 고흐 박물관에서 보이는 국립박물관/ (오른쪽) 고흐의 Auvers교회(1890)
그렇지만 고갱에게 매료 당한 빈센트는 그와 지내면서 자신에게만 주어진 메시지가 있다고 믿게 된다. 고갱은 타히티섬으로 떠나고 고호는 파리를 떠나 몇 년 동안 아를르 지방과 정신병원을 전전한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완성한다. 그는 동생 테오(이 곳 테오와 같은 이름)의 도움으로 그나마 생존 할 수 있었다. 빈센트가 권총 자살을 한 후 동생 테오가 너무 상심해 하다가 6개월 후에 따라 죽는다. 이 두명의 형제애(愛)는 사람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그들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 사진 앞에 사람들이 많이 서 있다. 이 박물관이 그의 일생과 작품을 사진과 함께 상세히 보여 주고 있다.
▲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1889)'
나는 고호의 작품 중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을 처음 봤을 때 충격이었다. 둔감한 내가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사건에 속한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별이 보였을까? 어떤 정신상태면 저렇게까지 표현할 수 있을까? 일사병으로 미치면 사물이 저렇게 보일까? 둥글둥글 돌아가는 건 무슨 뜻이 있을까? 어쨌던 너무 아름답다. 고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하기 전까지 마지막 2년간의 작품이 내 눈에는 가장 아름답다.
밝은 색채, 대담한 공간활용은 정신병자 눈에만 보이는 순수한 세계가 아닐까. 나는 여기 오면 꼭 포스터 몇 장을 사게 된다. 해원이와 하진이도 몇 가지씩 산다. 박물관에서 나오니까 이제는 암스텔담 시내를 구경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중앙역으로 가는 전차를 타고 시내 한복판을 통과하기로 했다. 해원이가 "그래도 고흐 미술관을 본 걸로 만족해요" 한다. 이 두명이 시내를 전차로 통과하면서 구경할 시간이 모자란 걸 아쉬워 한다. 우리는 중앙역에서 유레일 파스로 스키폴 공항에 갔다. 비행기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주머니에 남은 유로화를 다 털어 선물용 초콜릿을 샀다.
▲ 전차에서 보는 암스텔담 ■ 네덜란드 바둑역사
유럽에서 바둑역사를 알려면 레이든 만한 곳이 없다. 테오가 있기 때문이다. 레이든은 17세기부터 일본 나가사키와 교역으로 동양에 대한 연구가 가장 앞선 곳이다. 19세기 체스 연구가 린더(van der Linde)가 레이든대학 동양학 교수인 호프만(Johann hoffmann)에게 동양게임에 대한 문의를 해 온다. 호프만 교수에 의해 중국의 웨이치(圍棋)가 처음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이 책의 설명을 보고 바둑을 처음 둔 사람은 독일인 코쉘트(Korschelt)였다. 그의 노트에 '레이든 박물관에 바둑세트가 한벌 있고 암스텔담 민족박물관에는 일본인 두명이 바둑을 두는 왁스상이 있다'고 써 있다.
그 왁스상은 후에 실제 사람 크기 모양으로 확대 제작된다. 호프만 교수 40년 후에 동양학 교수 비써(Marinus Visser 1875?1930)에 의해 홀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의 중국인과 일본인의 게임으로 바둑이 소개된다. 비써 교수와 친한 국회의원 콜(H.H. van Kol)이 1914년 일본에 다녀와서 그의 책에서 하오리를 입은 두 일본 여인이 바둑두는 사진을 소개한다. 이 사진은 유럽에 처음 소개된 바둑 두는 모습이었다.
일본에 대한 글이나 여행담에서 여기저기 조금씩 바둑 얘기가 나오지만 이 시기에 홀란드인으로 바둑두는 사람은 없었다. 1924년 레이든 여자 포레스트(Ellen Forest)는 자기 딸과 일본에서 좀 살다가 돌아온다. 그녀의 소설 '유키 씨'에서 일본인의 도박 수단으로 바둑을 소개한다. 그러나 그녀가 찍은 바둑사진은 독일어 번역판에서만 나온다. 독일인들이 바둑사진은 독일에서 제일 먼저 출판되었다고 자랑하는데 그것을 네덜란드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한다. 내 추측으로는 사진 출판비가 아까워서 안 실었는데 독일이 먼저 실어 버린 거 같다.
▲ (왼쪽) 옛날 일본 사진/ (오른쪽) 마인드스포츠대회 휴식시간
홀란드인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돈이 관련되면 기가 막히게 짜다. 거품이 없어서 헛폼잡는 일은 절대 없다. 검소하고 뭐든지 실질적이다. 스페인에게 점령당했을 적에 별 반항을 안하다가 세금을 많이 걷으니까 반항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방문하면 식사나 호텔비도 내지만 낭비는 안한다. 우리처럼 대접은 좀 과하게 하질 않는다. 나는 가끔 이 사람들이 지독한데 놀란다.
"우리도 이런 건 배워야지"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절약은 하나 경우가 밝다. 거기에다가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재주가 누구나 탁월하다. 어쩌면 그래서 이 작은 나라가 17세기엔 세계 제일의 해양국가였고 지금도 선진인 이유일 거다. 첫 네덜란드 바둑인은 로테르담 사람 오스캄(Gerard Oskam (1880?1952)이기 쉽다. 그는 1923-26년에 독일 바둑잡지 DGoZ의 구독자였다. 그는 체스 책 수집가이기도 했다.
1939년 자기 책 5천권쯤을 니에메이어 박사에게 기증한다. 이것은 체스서적 수집으론 최대다. 현재는 덴하그 왕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스캄이 바둑을 두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그가 서양 첫 바둑인 라스커 박사와 친구였던 걸로 보아 바둑을 두었으리라는 추측이 무리가 아니다. 나치 치하인 1943년 그는 라스커의 누이를 보호해 주기도 했다. 그는 1939년에 '중국 장기'란 책에서 바둑은 선비와 부자의 게임으로 소개하고 있다.
▲ 레이든
▲ (왼쪽) 레이든 천문대/ (오른쪽) 레이든 성곽 동문(East Gate) 1929년 '문명과 과학'이란 잡지에 바둑이 연재되는데 저자가 프로기사에게 직접 배웠다고 하는데 불행하게도 그의 이름을 아무도 모른다. 런던의 중국외교관과 친분이 있고 일본에서 산 얘기도 나오는 걸로 봐서는 저자가 외교관이 아니었나 추측될 뿐이다. 바둑두는 방법이나 필요한 정보는 주면서 자기나 다른 바둑인 이름이 안 나오는 걸로 봐서 그는 냉철한 관전자로 바둑의 내면적 가치만 중요시 했던 거 같다.
저자 'Mr. X'는 자기를 가르친 일본 프로기사를 통렬히 비난하면서 '프로기사들은 "바둑은 어려운 게임이라 프로에게 배워야 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바둑원리에 대한 강의보다는 부분적 변화만 가르치면서 돈벌기 위해 오래 가르칠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제자들 바둑이 빨리 못 는다"고 말한다. 그는 "런던에서 중국외교관 리(Ly)를 만나 한 시간 배운 것이 프로에게 반년을 배운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았다"고 한다. 리는 그에게 공격할 때도 자기 말을 보살피고 곤마를 만들지 말라며 참고도를 만들어 가르쳤다.
Mr X는 이런 원리를 배워도 실전에 적용하려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한다. 그는 일본인이 바둑돌을 두째와 세째 손가락 사이로 놓는 것은 그래야만 다른 손가락으로 돌을 동시에 집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Mr X는 일본인을 철저히 의혹의 눈초리로만 관찰한 것이 그의 글에서 나타난다. 그는 네덜란드 바둑역사에 아직까지 신비한 존재로 남아 있다.
1933년 구릭(R.H. van Gulik)의 중국에 대한 글 중 선비는 산 속에서 들리는 폭포소리, 대나무 숲의 바람 소리, 바둑 돌 놓는 소리를 가장 듣기 좋아한다고 썼다. 네덜란드 바둑협회 창립자 스킬프(A.P.H. Schilp)는 라스커 책으로 바둑을 배웠다. 판은 자기가 만들고 바둑돌은 색깔이 다른 동전을 사용하였다.
(3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한상대(전 시드니대 교수 sdha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