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바둑사
비세(非勢)에서는 과감하게!
- 캐나다(Canada) 1
2013-03-09 오전 10:19:10 입력 / 2013-03-11 오전 11:27:28 수정
▲ 캐나다 록키산맥에 사는 순록
1. 첫 방문
1) 복병, 눈보라 폭풍
1984년 1월.
정초를 뉴욕에서 보낸 우리 가족 3명은 자동차를 몰고 캐나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보스턴(Boston)에서 하루 묵으며 하버드(Havard) 대학을 구경하는데 영하 25도라 추워서 혼났다. 허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버몬트(Vermont) 주에서 만난 눈보라 폭풍(Snow storm)은 눈을 동반한 폭풍의 위력이 이렇게 엄청날 줄 몰랐다. 눈바람이 너무 세게 몰아쳐서 앞이 안 보이고 나 중엔 어느 것이 길인지도 분간을 못 하겠다. 날은 자꾸 어두어져 가는데 눈 속으로 실종될 것만 같다.
다른 사람들은 일기예보를 들어서 그런지 다니는 차도 안 보인다. 뉴스를 안 듣고 떠나온 것이 후회된다. 마침 막 지나간 커다란 트레일러 트럭이 지나간 자국이 눈 위에 패어있어 나는 그것만 쫓아 갔다. 안 그랬으면 방향을 못 잡았을 것. 한 쪽 바퀴를 트럭바퀴 자국에 넣으면 내 차는 작아서 옆으로 기울어져서 간다. 눈보라가 한 동안 계속 되니까 우리 집사람과 아이가 겁을 먹는다. 나도 겁이 났지만 애써 여유를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어느 시골 마을입구로 트럭 바퀴자욱이 휘어 들어간다.
▲ 길 위로 몰아치는 눈보라 폭풍. 이 길로 차를 몰고 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제 살았구나!" 하고 들어섰는데 이번엔 마을에 모텔이 하나 뿐이다. 방이 20개쯤 되는 모텔에 방을 얻으려는 사람이 30여명이다 . 원래 방값은 25불인데 내가 있는 동안 70불을 넘어선다. 우리만 여행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모텔을 나와서 경찰서로 갔다. 시골 이라 두 명 밖에 없다. 내가 들어가서 "눈보라 폭풍을 만나 이리로 왔는데 25불짜리 모텔 방 값이 70불을 넘어섰다. 나는 그런 돈이 없으니까 경찰이 책임지고 우리 식구를 재워 달라. 당신네 나라를 여행하는 외국인이 길에서 얼어죽게 경찰이 놔둘 생각이냐?"고라며 떼를 썼다.
경찰 두명이 여기저기 전화하더니 한 명이 "25불이라고 했느냐?"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까 자기를 따라오라 한다. 경찰차로 앞서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간다. 가정집인데 그 경찰이 자기집처럼 익숙하다. 알고 보니까 자기 어머니 집이다. 그 어머니가 전화받고 분주하게 집을 치운 걸 알겠다. 우리는 샤워하고 경찰 어머니와 대화하며 뜨거운 차를 마시니까 살 것 같다. 외국도 잘 모르고 혼자 심심하게 살던 과부 할머니에게 한국과 호주 얘기를 들려주는 우리 방문은 흥분되는 일이었다. 과잉 친절을 베푼다. "내 판단 이 어때? 숙소 잘 구했지?" 내가 집사람에게 뽐냈다. 비세(非勢)에 처했을 땐 과감한 행마(行馬)를 해야 한다.
푹 자고 나니 꽤 근사한 아침 식사가 나왔다. 새벽에 수퍼에 다녀온 것 같다. 우리가 "아침 값만 25불 받아도 되겠다"며 웃었다. 이젠 바람이 그쳤다. 눈 덮인 마을을 뒤로 하고 우리가 떠나는데 할머니가 섭섭해 한다. 또 놀러 오라한다. 우리가 이 시골에 다시는 올 일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서양엔 늙으면 부부만 남고 그러다가 그 중 한 명이 죽으면 남은 사람은 무척 외로이 산다. 자기 자식들 생활을 간섭하며 살 수도 없고 자식은 일주일 아니면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데 노인 중엔 그날만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뼈 속까지 외로움을 경험하며 살다가 죽어간다.
▲ 눈 덮인 마을
2) 차 사고
우리의 고난은 여기서 그치치 않았다. 캐나다 국경을 넘어 몬트리얼로 가는 길은 눈이 왔다가 얼어서 스케이트장 보다 더 미끄럽다. 미국 쪽은 소금을 뿌려 안 미끄러웠는데…….
앞의 차가 30km로 계속 천천히 가길래 내가 추월하려고 옆으로 치고 나가는데 갑자기 차가 한 바퀴 돌더니 1미터가 넘는 길 옆 도랑으로 뛰어 들어간다. 차 스피드 때문에 다행히 뒤집히지는 않았다. 도랑이 다 눈이라 쿠션 역할을 해서 충격은 좀 완화되었으나 그래도 땅에는 꽤 세게 떨어졌다. 놀라서 5살짜리 오람이가 운다. 눈속에 빠지니까 앞 윈도우로 눈 밖에 안 보인다.
그 때 누가 "거기 빠진 사람들 괜찮냐?"고 위에서 묻는다. 내가 "다친 사람은 없다"고 하니까 나에게 헤드라이트와 엔진을 우선 끄라고 한다. 가족을 먼저 내 보내면 자기가 끌어 올려 주겠다고 하면서 얼음 땅에 엎드린다. 자기가 전화해서 구급차가 10분내로 온다니까 나에겐 차에 남아 있으라고 한다. 40대로 보이는 이 사람은 반대 방향에서 차를 몰고 오다가 내차가 떨어지는 걸 보고 자기 차에서 급히 나오느라고 파커도 안 입고 얇은 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다.
우리 차 사고를 보고 길 건너편 집 부인은 눈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달려와 우리 아이를 자기가 안고 집으로 데려간다. 구급차가 와서 윈치로 내차를 끌어 올리고 나는 그들이 지시하는대로 운전했다. 40불 달라고 하길래 20불만 하자고 했더니 고정가격이라 안된다고 한다. 눈 속에 빠져있을 땐 누가 구해줄게 200불 달라고 했으면 내가 응했을 거다.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가는데 너무 미끄럽다. "이런데서 속력을 낸 내가 미련하지" 건너편 집에 가니까 집사람과 아이는 벌써 샤워까지 하고 무얼 마시고 있다.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동토(凍土)의 나라' 캐나다 국민수준에 감명 받았다.
3) 아름다운 몬트리올(Momtreal)
한번 혼나고 나선 조심조심 운전하며 몬트리올에 도착했는데 "아메리카의 파리"란 별명대로 도시가 아름답다. 거리도 세련되고 미국보다 유럽에 가깝다. 길을 물어보는데다 불어로 대답해서 못 알아 듣겠다. 마침 중국 사람 부부가 지나가길래 물어보았더니 이번엔 중국 액센트로 불어를 한다. 그 다음에야 영어를 하는 젊은 사람을 만나서 길을 찾아갔다. 몬트리올은 불어가 공용어다. 인구 4백 만의 몬트리올은 불어를 쓰는 세계 도시 중 파리 다음 두번째로 크다. 내가 이 얘기를 어느 프랑스 바둑인에게 했더니 "그들 프랑 스어는 약간 다르다"며 웃는다. 사투리가 강하단 얘긴가?
▲ 몬트리올(Montreal)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뮌헨 올림픽 참사 후여서 경비에 예산이 많이 들어가 적자를 기록한다.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는 역사상 첫 금메달을 조국에 안겨주었다. 루마니아 체조선수 코마네치가 7개부분에서 10점 만점 행진을 할 때 "완벽(Perfection)이란 저런 거다!" 나는 열광했다. 예체능에서 완벽을 향해 누구나 가지만 도달하기는 너무 어렵다. 권투에서 슈거레이 레나드가 금메달을 땄다. 그는 매번 월등한 기량으로 완벽하게 상대를 제압한다. 캐나다는 은메달 5개 동메달 6개로 올림픽사상 금메달을 못 딴 첫 개최국 이 되었다. 모스크바, LA와의 3파전 경쟁을 뚫고 개최한 올림픽인데 망신이다.
▲ 양정모 선수/ 코마네치(Nadia Comaneci)
4) 캐나다 최대 도시 토론토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토론토다. 뉴욕 한민족회의에서 만난 캐나다 최대의 교민신문 민중일보 정철기 사장이 나에게 자기 신문사에 와서 강연을 해달라고 초청했다. 그는 후에 한국에 와서 국회의원 생활을 하며 나와 다시 만난다. 토론토에 가는 김에 몬트리올에 들려 가는 걸로 여행 코스를 잡았는데 겨울 캐나다를 내가 너무 얕보고 여행계획을 짠 거 같다. 그래서 수도 오타와는 제치고 곧장 토론토로 달렸다. 토론토(Toronto)는 캐나다 최대 도시로 인구가 6백만명이다. 내가 사는 시드니와 비슷하다.
5) 나이아가라 폭포
우리는 먼저 토론토에서 좀 떨어진 캐나다 쪽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다. 폭포가 커다란 반원형으로 말 편자 모양처럼 생겼다. 미국 버팔로에서 본 나이아가라 보다 규모도 훨씬 크고 보기도 좋다. 물살은 미국쪽이 더 두꺼웠다. 우리는 비옷을 입고 폭포 밑으로 가 서 떨어지는 거대한 물살을 경험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 소리 이상이다.
볼수록 나이아가라도 대단한 자연의 경이(驚異)다. 이리(Erie) 호에서 흘러나온 나이아가라 강이 온타리오(Ontario) 호로 들어가는 도중에 형성된 대폭포다. 20세기 섹스 심볼 마릴린 몬로를 수퍼스타로 탄생시킨 영화가 '나이아가라'다. 나는 그 영화에서 처음으 로 화면을 통해 나이아가라 폭포를 봤다. 실제로 오니까 스케일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 크다.
▲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Niagara Falls) 1분에 168,000 평방미터의 물이 떨어진다
▲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2
▲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3
6) 시내 관광
나는 다음 날 신문사에서 3시간 짜리 강의를 끝낸 뒤에 식구들을 데리고 시내 CN Tower도 올라가고 중심지인 구시가지를 돌아 봤다. 여기가 캐나다의 경제 허브(Hub)라 금융회사들이 많고 빌딩들은 미국 대도시를 방불케 한다. 토론토는 1793년에 생긴 도시라 구시가 쪽은 고풍이 물씬 풍긴다. 낭만적 분위기를 살린다고 전차도 다닌다. 토론토는 캐나다 수도였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온타리오 주 수도다. 토론토엔 1860년대 세계 최대 위스키 공장이 된 구더 햄 웟쓰(Gooderham & Worts)가 있다. 1904년 대화재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빠른 속도로 복구했다.
▲ 토론토의 아이콘 CN Tower (553.33 미터)/ 중심가 쇼핑 몰(Eaton Centre)
7) 한인촌(Korea town)
우리는 블루어(Bloor St.) 가(街) 주변으로 약 12개 블럭에 걸쳐 형성된 코리아 타운에 가서 식사도 하고 돌아다녔다. 내가 사는 시드니처럼 여기도 교민수가 10만명이라고 한다. 토론토에는 제1 한인촌, 제2 한인촌, 해방촌 등 3개 지역에 한인 집거지가 있는데 내가 간 시내 부근이 제1 한인촌이다. 식당, 식품점, 교회, 신문사, 약국, 쇼핑센터 등은 세계 어느 한인촌에나 다 있는 것들이다. 시드니에는 한인촌이 7~8군데에 흩어져 있다.
▲ 토론토 블루어 가(街- Bloor St.) 한인 촌(Korea Town)
8) 다문화사회(Multi Cultural Society)
다문화사회 경험을 하고 나면 타(他)문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토론토는 다문화 도시라 두개의 차이나 타운, 그리스 타운, 리틀 이탤리, 리틀 인도, 폴투갈 빌리지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선 안산시 안산역에서 큰 길을 건너 원곡동 동회쪽으로 가는 길에서 다문화 거리를 경험할 수 있다. 원곡동에만 외국인 노동자가 3만명 이상이 살고 있다. 대부분이 조선족, 동남아 사람들이지만 가보면 우리나라 거리가 아니다.
음식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나는 가끔 가서 고수가 들어간 연변 냉면을 먹는다. 영등포 가리봉동 시장부근엔 조선족이 많이 산다. 토론토는 동서양 많은 민족이 모인 다문화사회라 안산 보다 훨씬 다양하다. 나도 호주 같은 다문화사회에서 살아서 여러 문화를 즐기는 방법을 터득하고 덕분에 인생이 더 풍요로워졌다.


▲ 안산시 원곡동 국경 없는 마을. 우범지대로 잘못 알려졌지만 안전한 곳이다
9) 정다운 교민 바둑인들
저녁엔 캐나다 바둑챔피언 김윤배씨 집으로 갔다. 그는 나와 전공은 다르지만 연세대 동기다. 지난 세계대회에서 만나 내가 캐나다에 갈 예정이라고 했더니 자기 집에 꼭 오라고 한다. 그는 코너스토어를 경영하고 있다. 토론토의 많은 교민이 우리나라 동네 수퍼 성격의 코너스토어를 경영한다. 뉴욕은 야채가게, 시드니는 청소업을 하는 교민이 많다. 호주엔 1년에 수백억씩 버는 교민 청소재벌도 있다.
이날 저녁 김윤배씨네 집에 캐나다 바둑 강자들이 다 모였다. 역대 챔피언 중 백준기씨, 신명철씨를 비롯 7~8명이 모였다. 백준기 씨는 형이 나와 친하다. 한국사회가 좁아 족보를 따지면 금방 서로 아는 사람이 나온다. 우리는 밤새 10불짜리 내기 바둑을 두었다. 밤을 새면 보통 주인집 부인이 중간에 먹고 마실 걸 서브 한다. 바둑 때문에 민폐가 크다.
"이런 재미도 없으면 어떻게 이민생활을 합니까?" 내가 미안해 하니까 주인 김형이 한말이다. 내가 "이렇게 추운 곳에서 어떻게 살지요?" 했더니 그 중 한 명이 자기는 북쪽 광산에 들어가 2년간 일을 하고 지난 달에 돌아왔는데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가 이제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고 한다. 호주도 광산촌에 들어가면 임금이 높아 2년만 일하면 집을 산다고 한다. 호주는 대신 열대지 방에 광산이 많다.
캐나다는 미국 옆인데도 교민 중에 미국을 나만큼 돌아다닌 사람이 없다. 생계형 이민 1세대는 그만큼 여유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 차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으니까 쩍쩍 달라 붙는다. 토론토 겨울은 습도가 높고 바람도 불어 체감 온도가 기분 나쁘다. 앞 유리 윈도우 와이퍼에 들어가는 부동액이 3불 정도인데 한 번 여행에 여러 병을 써야 한다. 몇 년 후 같은 곳을 여름에 오니까 전혀 다른 세상이다.
▲ 씨엔엔 타워(CNN Tower)에서 내려다 보는 토론토 야경
9) 내 친구 최기선
오늘은 미국 디트로이트까지 가야 하는데 내가 밤을 새워서 운전을 못하겠다. 영하 23도의 미끄러운 눈길 운전을 집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차에서 잠을 잤다.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는데 바둑으로 밤을 새우시면 어떻게 해요?" 집사람이 바가지를 긁는다. 보통 때 난코스는 내가 주로 운전한다. 길 옆에 자동차들이 옆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 자주 보인다. 우리는 천천히 달려 10시간 만에 디트 로이트에 사는 내 친구 최기선 집에 도착했다.
내가 눈이 안오는 LA에서 차를 빌렸기 때문에 스노우 타이어(Snow tyre)가 아니다. 그 차론 동북부 겨울여행은 못한다. 그래서 디트 로이트에 사는 어릴적 친구 기선이를 찾아가 그의 차를 한 달 동안 빌렸다. 기선이 집을 떠나 차(Dodge)를 몰고 한참 가는데 오람이가 백불짜리 지폐를 여러장 내 놓는다. "아저씨가 휘발유 값이래요. 고속도로에서 아빠 주래요" 한다. 내가 어제 기선이에게 "네 차는 8기통이라 동부를 한 달쯤 돌고 나면 휘발유 값이 꽤 나가겠구나"라며 농담으로 했는데 내가 정말 기름 값을 걱정하는줄 알았던 모양이다.
처음엔 기선이가 미니버스 만한 자기 고급 RV를 타고 가라며 "너희 식구면 이 차에서 잘 수도 있다"하길래 "휘발유 값이 많이 들어 싫다"며 내가 거절했다. 기선이 차로 남쪽으로는 마이애미를 지나 미대륙 최남단 쿠바 옆 키웨스트까지 가서 헤밍웨이 집도 방문했다. 북으로는 캐나다 동쪽을 돌았다. 호주는 지금이 여름이다. 우리는 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미대륙을 3개월 계획으로 자동차 여행 중이다.
기선이는 고대 법과를 나오고 미시건대학에서 석사를 했다. 바둑이 아마 4단이고 디트로이트 교민회장이다. 내 도착에 맞추어 교민 바둑인들을 자기 집에 초청해 놨다. 기선이가 "내가 집이 두 채 있는데 하나를 너에게 줄테니까 와서 같이 살자"고 한다. 빈말이 아니다. 내가 "시드니 같은 좋은 곳에 좋은 직업이 있는데 왜 이런 험한 디트로이트에 와서 살겠니?" "너 같은 촌놈이나 잘 살아 봐라"하며 농담조로 거절했으나 어릴적 우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기선이 말에 내 마음이 뭉클해진다. 한 달 동안 잘 쓴 기선이 차를 돌려주고 내가 원래 빌린 차로 남은 여행을 시작했다. 이해타산을 초월하는 우리 우정을 보고 집사람이 "여자들 우정과는 차원을 달리 하네요"하며 감명 받는다.
10) 시카고
시카고로 가는 길에 나는 먼저 미시건 대학에 가서 아는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인이 8백명이나 이 대학에 있어 의외의 반가운 얼굴 들도 만났다. 나도 염치가 있어 시카고에선 바둑을 안 두었다. 아예 바둑인들에게 전화를 안했다. 가족과 시어스 타워 (Sears Tower 108층 - 일명 Willis) 103층 전망대에도 올라가고 집사람에게 시카고 티파니 보석상도 구경시켜주는 등 시내 관광을 주로 했다. 이 사람은 박물관, 미술관이라면 좋아하고 열심이다.

▲ 토론토의 유명한 온타리오 박물관(Royal Ontario Museum)
마피아의 전설적 두목 알카포네가 1930년대 장악했던 이 도시는 우리나라만한 미시간 호수에서 불어 오는 바람으로 겨울철 날씨는 아주 을씨년스럽고 불쾌하다. 이 도시 별명이 "Windy city" 이다. 시카고는 공업, 상업, 금융의 중심지이고 인구 천만의 대도시인 데도 놀랍게 깨끗하다. 다만 흑인과 히스패닉계 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슬럼화 되고 있다고 들었다. 시카고는 대도시 자격을 다 갖추 었는데도 뭔가 2% 부족하다. 뉴욕이 갖고 있는 다양성의 맛이 없다.
11) 여행하는 이유
여행은 피곤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지만 나는 그런 피로를 즐긴다. '미지(未知)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나에게 있는 한 나는 계속 떠날거다. 하루 종일 달리다가 저녁에 목적지 도시의 불빛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면 가벼운 흥분이 밀려 온다. "저 속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미네소타, 노스 다코다를 거쳐 엑스포 도시 스포켄을 방문하고 로키산맥을 힘겹게 넘어 시에틀로 가서 거기서 다시 국경을 넘어 캐나다 제2도시인 벤쿠버로 갔다. 벤쿠버 얘기는 다음 편에서 한다.
밴쿠버에서 사흘을 지내고 우리는 태평양 해안을 따라 멕시코까지 남하하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도중 우리가 잔 모텔에 다 우리 부부 호주제 양털 코트를 놓고 왔는데 그 모텔로 전화를 해서 부치는 방법까지 의논하다가 중간에 주인이 바뀌었다고 하며 다른 사람이 받아 딴청을 피운다. 나는 호주에서 국제전화만 여러 번 하고 결국 못 찾고 말았다. 2년 후에 내가 그 모텔을 찾아갔더니 "전 주인과는 연락이 안된다"는 답만 받았다. 화가 나서 경찰에 신고하고 왔는데 연락이 없다.
12) 미국챔피언 신홍수씨
샌프란시스코에 가선 미국챔피언 신홍수씨를 만나 이틀 밤을 새우게 된다. 샌프란시스코 기원에서 첫날밤 스코어가 7대 7로 끝나자 나보다 자기가 세다고 믿는 그가 한사코 잡아서 하룻 밤 더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람이만 데리고 이틀 간 혼자 돌아다녀서 열받은 집사람을 달래는데 애 먹었다. 신홍수씨와 작전을 짜서 사흘째 되는 날은 그가 샌프란시스코 관광을 시켜주고 맛있는 음식도 사주며 하루종일 서비스를 잘 했다. 집사람 기분이 업됐을 때 그가 "오람 어머니, 하루만 더 계시면 제 돈으로 호텔도 좋은 걸 잡아드리고 좋은 곳도 더 안내하겠습니다"고 했다가 집사람에게 거절당했다.
▲ 금문교(Golden Gate Bridge) 샌프란시스코
"너무 잘해 주셔서 이상하다 했더니 이러실줄 알았어요"한다. 이 사람이 이젠 우리 음모를 훤히 꽤뚫는 수준에 도달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입맛만 다시며 헤어져야 했다.
전 세계를 돌며 가는 곳마다 바둑인들과 만나 수담을 나누고 인간관계를 만들며 사는 나는 행운아다. 그들과 두번째 조우하면 친밀감은 배가 된다. 유럽에선 주로 서양인들과 바둑을 두고 그들 집에서 묵기도 하는데 미국과 캐나다에선 동포 바둑인들과 어울리게 된다. 미국에 240만명, 캐나다에 22만명 이상 한국교민이 살고 있다.
13) 어릴적 여행은 보약?
우리 아이가 너무 어릴적 미대륙 여행을 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후에 TV에서 미국이나 캐나다가 나오면 거리 하나만 보고 이놈이 "저건 시카고, 저건 마이애미, 저건 밴쿠버"하고 맞추는 실력을 어른들이 못 따라 간다. "미국 어디가 좋니?" 하고 사람들이 물어 보면 허쉬(Hershey) 초콜렛 타운과 디즈니월드를 대는 걸 보면 분명 어린앤데 어떨 땐 깜짝 놀랄만한 걸 감지하고 있다. '지식 흡수의 황금기' 라는 5~11세에는 어른들은 느끼지도 못하는 걸 아이들은 받아 들인다. 어릴적 여행은 그 인간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도 어릴적 단 한번만 여행하는 경우라면 나는 사춘기에 하라고 권유하고 싶다.
14) 30년전에 사는 사람들
교민이 30년전에 이민 왔으면 그는 30년전 한국 사람이다. 영어가 딸리니까 현지사회가 진화할 때 못 따라가고 한국에서 떨어져 있으니까 한국사회 변화도 못 체득한다. '문화의 동결현상'이다. 영어는 쉬운 말만 하고 한국말 용어구사력은 줄어든다. 제일 비극은 영어만 하는 자녀들과 완전한 의사소통을 못 하는데 있다. 어른들 영어나 아이들 한국말이 기초수준에 머물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해외생활을 하면서 생긴 개척정신, 국제감각은 국내인들이 못 따라간다.
2. 캐나다는 어떤 나라인가?
캐나다는 러시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다. 남한의 백배가 넘고 유럽전체 보다 크다. 그러나 북쪽은 툰드라 지대로 매마르고 추워서 사람이 못 산다. 동쪽은 대서양, 서쪽은 태평양과 면해 있다. 북쪽은 북극해가 있고 영토가 북극까지 있다. 남쪽은 미국과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을 맞대고 있다. 미국 국경에서 200km 이내에 대부분 인구가 살고 있다. 인구는 3천 3백 50만명. 일인당 소득은 약 5만불로 세계 9위다. 10개 주와 3개 준주로 구성되어 있다. 캐나다는 미국과 닮았으면서 다르다. 미국은 자본주의인데 여기는 약간 사회주의다. 미국보다 건전하다. 그러나 건전하다는 건 재미 없다는 말도 된다.

▲ 가을이 찾아 온 캐나다 시골
캐나다 원주민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인디언이다. 서양에서 처음엔 스페인이 진출하고 두번째는 프랑스가 왔다. 영국과 프랑스가 7년 전쟁을 통해 영국이 최종 승자가 되었다. 캐나다는 마지막 주권국 영국으로부터 평화롭게 독립했다. 그러나 아직 국가원수는 영국 여왕이고 그녀를 대신하는 총독이 있다. 호주, 뉴질랜드처럼 영연방 회원국이다.
▲ 캐나다 인디언
20세기 말. 프랑스 어(語) 사용 주(州) 퀘백(Quebec)이 독립을 요구했다. 1980년과 1995년 퀘벡 독립을 놓고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 두 번 다 부결되었는데 처음에는 60%가 그 다음에는 50.6%가 반대표를 던졌다. 이 운동 결과 캐나다 모든 곳에서 불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쓰도록 되었다. 영어 사용 주에서도 프랑스어로 정부서비스를 제공하고 프랑스 학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로서 캐나다 는 이중언어, 다문화 국가로 다시 태어난다.
내가 전에 몇 번 방문했을 때 캐나다 서쪽 지방엔 모든 길 안내판이 영어 뿐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불어까지 표기되어 있다. 밴쿠버는 영어하는 도시인데 클래식 음악 FM방송을 틀면 불어로 설명이 나온다. 캐나다는 한국전쟁에 2만 7천명의 병사를 파견하여 남한을 도왔다. 1963년 우리나라와 공식 수교를 맺었고 현재 한국은 캐나다의 8번째 교역국가다. 한국과 무비자협정도 맺었다. 캐나다에 한국교민이 22만명이 있는데 거의가 토론토와 밴쿠버에 살고 있다. 유학생 수도 공교롭게도 10분의 1인 2만 2천명 가량 있다. 2012년 경제 협력개발기구의 조사에서는 캐나다가 호주에 이어 세계에서 살기 좋은 나라 2위로 선정되었다.
▲ Highway 4 D 앨버타(Alberta) 주
3. 캐나다 바둑협회
1) 역사
바둑은 100년 전쯤 캐나다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들어왔다 처음엔 일본 이민자들이 소개했고 뒤이어 서부 해안을 따라 캘리포니아에 서도 들어왔다. 20세기 초에 라스커(Edward Lasker) 라는 독일인이 미국에 와서 바둑보급을 했는데 그 때 캐나다도 같이 받아 들였다. 1929년에는 중국 바둑인들이 몬트리올에 있는 YMCA에 모여서 바둑을 두었다. 1935~38년 사이에 맥그릴 대학의 해리 스와츠 라는 사람이 바둑을 보급했고 그가 1948년 몬트리올에 첫 바둑 클럽을 차렸다. 전통적으로 캐나다 오픈 바둑챔피언십은 노동절 주말 에 개최된다. 캐나다 바둑계의 제일 큰 행사다.
▲ 2012년 캐나다 오픈 챔피언 바둑대회. 노동절 주말에 열린다.
미국 바둑협회가 1934년에 설립되고 캐나다의 존 윌리엄스가 라스커와 친해 뉴욕으로 가서 살면서 15년 동안 바둑활동을 한다. 그가 미국 바둑소식을 캐나다에 알려 주고 두 나라 사이에 중간역할을 한다. 1949년부터 미국바둑저널지를 캐나다도 똑같이 받아본다. 1952년 일본 재무대신(장관)이며 일본기원 총재였던 아다찌 타다시(Adachi Tadashi)씨는 프로기사들을 대동하고 미국을 자주 방문했다. 그들은 가는 길에 캐나다도 가끔 들렸다. 1960년대 뉴욕을 정기 방문하는 일본 프로기사들도 캐나다에 들렸다.
캐나다 마니토바 주에선 윌리엄스의 제안으로 작은 그룹의 수학자들이 1953년 바둑을 컴퓨터화 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윌리엄스가 1959년 캐나다로 돌아와서 토론토 바둑클럽을 창설한다. 윌리엄스 부부는 런던에 가서 존 바스(Barrs)가 런던클럽을 창설하는데도 참여한다. 이 클럽이 후에 영국바둑협회로 성장한다. 1960년대 후반 일본인 요시오 쑤치야(Yoshio Tsuchiya)박사가 오타와 바둑클럽을 열었다. 윌리엄, 쑤치야, 슈발르츠(Schwartz) 3명이 1970년 캐나다 바둑협회(CGA- Canadian Go Association)를 창설한다.
▲ 토론토 대회
토론토 클럽은 뉴욕과 교류를 자주 갖고 1978년 토론토 동계바둑대회가 캐나다 챔피언을 뽑는 캐나다 오픈챔피언전으로 발전했다. 여기서 1979년 2월에 열린 세계아마추어바둑대회에 캐나다 대표를 보내기 시작했고 그 전통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한국국 무총리배 세계대회에 대표를 보낸다. 캐나다에는 많은 12~18세 청소년들이 중국프로들에게 바둑을 공부하고 있어 바둑계 앞날이 밝다.
2) 바둑 강자
최강자 그룹 7단이 10명쯤 되는데 그 중 한국인은 고주용 7단 한 명 뿐이다. 나머지는 다 중국인이다. 고주용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온다. 6단은 수십명인데 90%가 중국계다. 한국인은 백준기, 서민성, 김용민씨 세명만 6단에 등록되어 있다. 내가 80년대 방문 하면 캐나다 톱 10에 한국인이 8명쯤 차지했다. 90년대부터 줄더니 지금은 중국과 처지가 바뀌었다. 캐나다는 미국에서 프로나 아마가 자기네 오픈전에 참가하면 그 사람 이름도 자기네 족보에 넣기 때문에 누가 캐나다인인지 혼동되게 만든다.

프로기사도 미국과 캐나다를 합해 놓아 누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캐나다에 사는 중국 프로기사만 5명 이상은 된다. 20대 초반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연구생 출신들이 영어를 배워 해외로 나가 그 나라 바둑 강자가 되는 길이 본인에게도 좋고 중국의 인해전술에 대응할 우리의 전략도 될 수 있다. 프로기사들도 해외진출을 생각해 볼만 하다. 지금은 중국 프로기사들의 대거 해외진출로 국제바둑보급도 우리나라가 주도권을 중국에게 완전히 빼앗겼다. 호주는 내 제자 중 연구생 출신 오치민, 김은국이 온 후부터 둘이서 우승 , 준우승을 나눠 가져 중국 7단들이 오금을 못 펴고 있다.
▲ 오타와 일본대사배 바둑대회
(캐나다 2편에서 계속….)
TYGEM / 한상대(전 시드니대 교수 sdha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