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지난 해 전멸의 아픔을 씻다
황룡사쌍등배.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대회명이다.
여자 기사들의 국가대항전 황룡사쌍등배는 정관장 배 후속으로 생긴 대회다.
청나라 시대의 국수 황룡사를 기리기 위해 장쑤성(江蘇省)과 쌍등 그룹이 후원했다.
장쑤성은 산뚱반도 남쪽과 상하이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2011년 대회가 생겼는데 1,2회 모두 중국이 우승을 차지했다.
2회 때 한국대표 팀은 박지은, 박지연, 김혜민, 이슬아, 최정.
드림팀이라 불렀는데 단 1승도 건지지 못하고 중국의 왕천싱에게 무너졌다.
2013년 치열한 선발전을 통해 정해진 라인업은 박지은, 문도원, 김혜림, 최정, 김채영.
▲ 김채영의 대국 모습.
바둑 팬들에게 김채영은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른다.
현재 덕수상고 3학년의 소녀, 프로기사 김성래 4단의 맏딸이다.
어머니 이소윤씨도 킹스 바둑교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동생 다영이는 연구생 1조 상위권을 달리는 유망주, 그야말로 바둑가족이다.
▲ 김채영(왼쪽) vs 쑹룽후이 대국 장면. 루키 김채영이 당연하게 1번 타자로 나섰다. 상대는 강적 쑹룽후이.
한중(韓中)의 네티즌들은 쏭룽후이의 우세를 점쳤다.
"만만치 않아요. 우리 여자기사들 중에서 채영이가 은근히 강하거든요. 실력에 비해 승운을 잡지 못해 그렇지 기세를 타면 한 건 터뜨릴 걸요.”
문도원과 김혜림이 입을 모아 김채영을 그렇게 평했다.
김채영은 2012년 중국과의 신예대항전에서 쓴맛을 봤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상대들에게 연거푸 지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
독하게 공부한 뒤 1년 만에 다시 중국을 찾았다.
2013년 1월 김채영은 한중 신예대항전에서 중국의 여자 기사들을 상대로 7전 7승을 거두었다.
황룡사쌍등배 4연승이 결코 기적이 아니고, 한 달 전에 이미 폭죽 같은 징조를 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후 일본의 나루미, 중국의 천이밍, 일본의 이시이 아카네까지 네 명을 꺾기까지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 먼 곳을 바라보며 답하는 김채영.
"네 판 모두 내용은 좋지 않았어요.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더라고요. 정말 어렵게 이겼어요.”
채영이 솔직하게 고백한다.
운이 좋아서 4연승을 거두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안 풀리는 바둑을 내리 이겼다는 사실에 김채영의 특질이 숨어있다.
김채영의 장점은 무엇일까?
충암바둑도장에서 김채영을 지도한 이정우 사범은 한 마디로 설명한다.
“멘탈이 강해요.”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바둑을 두어간다는 뜻.
그래서 김채영과 겨뤄 본 상대들은 승패를 떠나 묘하게 끈적끈적 달라붙는 찰기를 느낀다.
아무튼 김채영은 1번타자로 등판해 중국과 일본대표 두 명씩 지워버렸다.
작년 드림 팀 다섯 명 보다 낫다는 언론의 찬사가 이어졌다.
여고생 김채영이 단단하게 한 몫 해낸 것이다.
중국과 일본 팀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으리라.
한국의 비밀병기가 첫 번째 카드였을 줄이야!
▲ '4연승 했어요'
S#2. 귀여운 채롱이
김채영의 별명은 채롱이다.
아버지가 페이스 북에서 그리 부르는 바람에 굳어졌다.
특별한 뜻은 없고 애칭이다.
“첫 판에 졌으면 우울하게 호텔에서 일주일 동안 쳐 박혀 있을 뻔 했어요. 장쑤성 대국장은 호텔 밖에 아무 것도 없어요. 앞에는 큰 강물만 흐르고 있었어요. 보고 먹고 즐길 만한 게 전혀 없었거든요.”
그녀로서는 다행지만 그 대신 나머지 동료 네 명이 무료하게 출격대기를 기다려야 했다.
“지은이 언니가 마주칠 때마다 격려를 해주셨어요. 문도원, 김혜림 언니는 같은 동네 살아서 원래 친하구요. 최정이는 동갑내기 친구에요.”
한적한 장쑤성의 호텔은 1인 1실.
객실이 너무 커서 혼자 잠자기 무서웠다.
그래서 최정이 방에 쳐들어가 함께 잤다고 한다.
“4연승했다고 긴장을 풀면 안 돼. 뒤는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
의젓한 최정이 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김채영과 최정은 동갑으로 충암도장에서 함께 생활한다.
최정이 먼저 두각을 나타내며 선두권에 올라섰다.
“최정이 세긴 세요. 도장에서 남자기사들과 연습대국을 해도 승률이 반반이거든요. 성격이 밝은 친구라 부러워요.”
김채영이 최정을 자랑한다.
승부 세계에서 특출한 동료는 장벽일 텐데 채롱이는 정이를 그냥 좋아한다.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하는 단짝이 되길 바란다.
김채영은 낯가림이 심하다.
그러나 말을 트고 나면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 보이는 스타일.
귀국한 다음날 충암학원에서 만나 인터뷰를 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 왼쪽부터 김채영, 문도원, 김혜림, 최정. 재작년 여자 기사 가평 MT가 끝나고 귀가할 때 필자의 승용차에 서울 서부지역에 사는 기사들을 태워준 적 있었다.
문도원, 김혜림, 최정, 김채영
차 안에서 시종 깔깔거리며 대화를 나눴던 소녀들.
우연하게도 2년 후 그녀들이 황룡사쌍등배 국가대표로 다 뽑혔다.
- 기억나지? 내 차에 뭔가 좋은 기운이 있는 것 같지 않아?
“어머. 신기하네요. 정말 그러네!”
채롱이의 눈동자가 안경렌즈 속에서 반짝인다.
- 바둑 말고 즐기는 취미는?
“얼마 전에 피아노를 배웠어요. 그런데 피아노 연주가 너무 좋아서 푹 빠지겠더라고요. 당연히 바둑 성적은 떨어지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끊었어요.”
뭔가에 매료되면 푹 빠지는 채롱이, 그래서 바둑만 바라보기로 결심했다.
▲ 김채영.
새해 들어 시원하게 4점 만루 홈런을 날린 김채영 2단.
그녀, 이제 여자국가대표 팀의 비밀병기가 아니라 확실한 최종병기로 자리매김하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