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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바둑대회, 중국시장 공략에 큰 몫

[시사]바둑대회, 중국시장 공략에 큰 몫

2004-03-06 오후 12:46:23 입력

[‘가장 한국적인 맛이 가장 세계적인 맛이다’. 농심이 중국 시장 공략에 앞서 철저한 시장 조사 결과 얻어낸 진리다. 농심은 지난 96년 중국 상하이에 첫번째 해외 공장인 라면공장을 설립한 데 이어 98년 중국 청도에 농수산물 가공 및 수프를 생산하는 제2의 공장 완공, 2000년에는 중국 심양에 라면, 스낵공장을 완공하는 등 라면의 일관생산체제를 갖추고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시장에서 한국의 맛을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중략~~~)

농심은 지난 99년 세계 유일의 국가대항 단체전 바둑대회인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을 창설, 후원하는 등 현지화 전략을 펼치고 있다.(생략)]

<윗 글의 원문 소스 designtimesp=9486 designtimesp=10667 designtimesp=7523 designtimesp=14043 designtimesp=14132>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04030419404144936&LinkID=14&NewsSetID=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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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 신라면배가 중국에 농심이 뿌리를 내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얼마전에 4회를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마무리를한 농심 신라면배 세계 최강전은, 국가 단체 연승전이라는 특이한 구도로

출범때부터 바둑팬으로 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번에 농심 관계자가 대회 현장에서 직접 중국팀이 우승하기를 바란다고 말 할 정도로

해당 기업체의 중국팀 사랑은 유별나다. 그 만큼 이 대회가 중국 현지화 전략의 일환으로 만들어 졌음을 보여준다.

 

기전 규모는 7억3천만원에 우승 상금은 1억5천만원으로 다른 국제 기전 보다 크지는 않지만,

농심사가 기전에 투자한 것에 비하여서는 엄청난 광고 효과를 거두고 있다.

국가 단체 연승전이라는 설정이 바둑을 모르는 중국인들에게 까지도 흥미와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메스컴의 관심도 대단하여, 농심배에 중국선수들이 출전하는 날엔 대륙전역으로 실황이

중계 된다고 한다. 따라서 해당기업은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최근 국내 기전이 왜소화되는 현실에서, 바둑계는 이제 앉아서 기업체가 찾아올 것이 기다리는

것에서 벗어나, 바둑계도 융성하고 기업에도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갖고

기업을 찾아가야 한다.  또한 기업도 눈 앞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바둑 기전의 유지나 새로운 창설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관점으로 다가가야한다.

 

농심배가 기업입장에서 보면 7억원을 약간 넘는 규모로, 중국 대륙에 총 120여시간의 광고 시간을

만들어준 셈이 된다.   좋은 제품만으로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시대는 지났다. 신라면이 오늘날 중국에서 현지화에 성공을 거둔 바탕에는 신라면의 뛰어난 맛도 맛이려니와, 바둑을 통한 마켓팅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을 다른 기업들도 알아야 할 것이다.

 

[Tygem 명예기자/ i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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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시 펌 자료를 인용할 때에는 가능한 전문 을 삼가하고, 요약 축약하겠으며

반드시 소스를 밝히겠습니다.] 

 

[우문현답] 중국에서는 신라면이 얼마인가요^^:?

이창호와 이순신

지금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지만, 어떤 학생이 수능에서 전국 수석(2004학년도 재학생 수석은 익산고의 고인성)을 했다고 하자. 그러면 한국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머리가 대단히 좋군. 수재야, 아니 천재야. 어릴 때부터 달랐어. 아니, 태몽부터 예사롭지 않았어."

그러나 SAT에서 만점을 맞으면 미국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노력을 많이 했군."

언젠가는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이 나오겠지만, 한국인에겐 요원하다. 그럴 풍토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고와 과기대, 포항공대가 희망이지만, 입시 제도가 큰 걸림돌이다. 우선 과학고에서 필기시험 대신 거의 내신으로 뽑기 때문에 중학교 때 전과목에서 3년 동안 거의 만점을 맞아야 한다. 여기서 머리가 일차로 굳어져 버린다. 조기졸업으로 과기대와 포항공대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이미 과학고는 서울대나 의대를 목표로 하는 학생이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영재의 머리가 다시 굳어져 버린다.

천재의 싹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천 명에 한 명 정도는 있다. 문제는 이 싹을 키워 주는 풍토다. 조선시대에는 절대 뉴턴이 나올 수 없고 북한에선 절대 정주영이 나올 수 없다. 그런 천재는 일찌감치 싹을 잘라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천재의 싹이 있는 줄을 본인은 물론 그 누구도 모른 채 그는 그냥 그 시대와 사회에 적응해서 일생을 마치게 된다.

'닫힌 사회'에서는 천재가 클 수가 없다. 사람들이 원하는 수준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열린 사회'에서만 천재가 이따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치열한 경쟁과 협동을 통해 뭇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것을 조금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재와 영재의 차이는? 영재와 수재의 차이는? 그 차이는 미미하다. 그러므로 누구를 천재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또한 '닫힌 사회'의 천재는 성인이 되면 거의 범재로 전락하기 때문에 '열린 사회'의 수재보다도 훨씬 못하다.

바둑의 변방국이던 한국이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이세돌, 박영훈, 송태곤, 최철한 등을 차례로 배출하면서 10년 이상 세계에 우뚝 선 것은 정말 경이적인 일이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넓은 의미, 해방 이후 부단히 발전되었지 이른바 민주화 세력에 의해 독점적으로 발전된 게 전혀 아님, 그들도 일부를 담당했을 따름임)로 바둑만 두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열린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우리와 동시대의 북한이나 우리 조상이 살았던 조선과 시공간 양쪽으로 비교해 보면 이 말의 진위는 금방 드러난다. 더욱이 우리 바둑 영웅들은 대부분 고사리 손일 때 발굴되어 그 분야로 모든 머리가 집중적으로 계발될 수 있었다. 중국도 문화혁명의 악몽을 지나고 개혁하고 개방하면서 비로소 바둑 인재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다. 바둑에도 '열린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한국이 단시간에 일본과 중국을 뛰어넘을 수 있었을까? 이창호 한 사람 때문에? 맞는 말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한국이란 고유한 풍토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문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일본은 무사 사회다. 무사 사회이되 세계로 뻗어간 적은 한 번도 없다. 전국이 무력으로 통일된 16세기말과 산업화에 성공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전반이 일본으로선 절호의 기회였으나 두 번 다 호기롭게 정복의 길로 들어섰지만 역부족으로 물러났다. 이렇게 좌절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형식을 중시한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를 외적으로 발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열도 안에서 더 이상 칼을 휘두르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칼은 더 이상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노려만 보는 상황이다. 그래서 남에게 절대 폐를 끼치면 안 된다. 만약 그 선을 넘으면 목숨을 건 결투가 벌어진다. 이것은 영주(대명)가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지금도 이것이 체질화되어 일본인은 싸우지 않는다. 목소리도 높이지 않는다. 일본인은 항상 웃음을 띠고 있지만, 스트레스를 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 속에 살아간다. 한국인은 그래서 일본에 가면 답답해서 미친다.

일본은 무사의 칼이 검도와 유도와 가라테 등 스포츠로 발전한다. 항구의 개방 이후엔 무사의 칼이 야구, 축구, 수영, 육상 등 근대 스포츠로 확대된다. 일본에서는 무사의 전통 때문에 스포츠는 누구나 하는 것이다. 그 저변이 엄청나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과 중국은 일본에 상대가 안 되었다. 그러나 한국이나 중국이 운동을 안 할 때 말이지, 일단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일본을 금방 따라간다. 일본의 약점은 형식을 중시하기 때문에 창의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이 16세기말, 17세기초에 한국과 중국을 삼켜 버렸거나 중일전쟁에서 중국을 이기고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을 이겼다면, 그들은 창의력이 만개했을 것이다. 칼을 스포츠가 아니라 전쟁에서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지로 그들이 전쟁에서 진 것도 창의력 부족이었다. 이순신의 창의력과 맥아더의 창의력에 그들은 연전연패했던 것이다.

일본의 400년 바둑사도 전설의 4대 가문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제도가 없었던 한국과 중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린 사회'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부의 재주 있는 사람에게만 열린 사회였다. 그들보다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근처에도 못 가고 그 재주를 썩혔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끼리 아무리 치열하게 경쟁했다고 해도 거기에는 상상력이, 창의력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더디게 조금씩 조금씩 발전했을 게 틀림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바둑계의 '장인'이었지, 바둑계의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는 잠재력이 있는 모든 사람이 신분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어릴 때부터 똑같이 경쟁하며 협동할 때, 그 중에서 일인자가 태어날 때 탄생하는 법이니까. 일본의 400년 기보를 다 합해도 오늘날 한중일 3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4년 기보의 양도 안 될 것이다. 한국기원 연구생들이 10년 연구한 것만 쌓아도 그들의 400년 기보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재능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역과 신분과 계층에 관계없이 한데 모여 공부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바둑에 거의 완전히 '열린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선비의 사회요, 붓의 사회요, 입의 사회다. 붓으로 찔러 봐야 옷에 먹물만 묻는다. 보기에 좀 흉할 따름이다. 그래서 마음놓고 입으로 욕하고 비난하고 헐뜯고 음담패설을 늘어놓는다. 죽인다는 말을 예사로 하지만, 파리 한 마리 못 죽인다. 술도 마음대로 마신다. 2차는 기본이고 3차, 4차는 가야 한다. 고주망태가 되어도 아무도 안 잡아간다. 술 주정하면 칼로 단숨에 베어 버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국인은 그래서 브레이크가 없다. 싸웠다 하면 죽기 살기로 싸운다. 어릴 때부터 어리광부리고 떼쓰는 데 다들 도가 튼다. 어느 분야든 풀어놓으면 '제 멋대로'이다. 여기서 '창의력'이 싹 튼다. 또한 싸움에서 실력 못지 않게 중요한 '기'가 세어진다. 한국인은 어릴 때부터 '기' 죽는 것을 제일 싫어하기 때문이다. 공중도덕이고 법이고 자식의 '기' 죽이는 것은 한국인은 용납하지 못한다. '기'가 셀 수밖에 없다.

한국 축구가 일본과 중국에 강했고 강한 이유도 바로 이 '창의력'과 '기' 때문이다. 공은 둥근데 일본인은 공을 모나게 차려고 한다. 포지션을 잘 지키고 감독 말을 잘 듣는다. 한국인은 그렇지 않다. 대체로 공을 둥글게 차지만, 네모나게도 차고 세모나게도 찬다. 포지션도 잘 안 지키고 감독 말도 예사로 어긴다. 그리고 어찌나 '기'가 센지 죽기 살기로 덤빈다. 이걸 우린 흔히 투지라고 불렀다. 실력이 확 차이나면 5:0으로 지지만, 실력이 엇비슷하면 1:0으로 이기거나 1:1로 비긴다. 신나면 3:0으로 이긴다. 강팀도 곧잘 이긴다. 그러나 '기'가 죽으면 비슷한 팀한테도 6:2로 진다. 바둑에서도 이게 잘 나타난다. 한국인은 누구나 '창의력'이 뛰어나고 '기'가 세다. 제 멋대로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기응변'에 강하고 '싸움 바둑'에 강하다. 떼쓰는 데 도가 터서 조금만 틈만 보이면 죽기 살기로 덤비기 때문이다. 뺨 한두 대 맞아도 끄떡도 않고 욕 한두 번 얻어먹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울면서도 통박을 굴리고 한 덩이 떡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다.

중국은 군자와 상인과 도적의 사회요, 허풍의 사회요, 돈의 사회다. 군자가 따로 없고 상인이 따로 없고 도적이 따로 없다. 허풍은 누구나 잘 떤다. 누구나 돈을 밝힌다. 전쟁은 많았지만, 실지로 전쟁은 잘 못한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맥도 못 추고 허풍만 치고 돌아서서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수도 없이 적의 칼에 목이 달아난다.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다. 몽골족한테 100년, 만주족한테 260년, 변방이 아니라 통일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은 것만 해도 400여년이다. 춘추전국 시대와 삼국 시대, 수당 건국 시에 이들은 가장 잘 싸웠다. 그러나 그 후에 평화가 다시 수백 년 지속되었기 때문에 칼이 다 녹슬어 버렸다. 청구(靑丘)나 열도와는 달리 중원에는 먹을 게 많아서 피 터지게 싸울 필요가 없었다. 대신에 나라가 워낙 크다 보니까 전시든 평화시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워 자기 목숨은 자기가 지켜야 했다. 군자와도 사귀어야 하고 상인과도 사귀어야 하고 도적과도 사귀어야 했다. 스스로 군자도 되고 상인도 되고 도적도 되어야 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의리'가 가장 중요하다. 친구를 위해서는 처자식도 죽일 수 있고 자기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사회가 중국이다.

이런 전통 때문에 중국인은 바둑도 죽기 살기로 두기 어렵다. 그렇게 아등바등하는 게 체질에 안 맞다.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면 군자는 주춤하고 상인은 흥정하고 도적은 도망간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마지막 승리는 자기 것이라며 다음을 기약한다. (실지로 긴 세월을 두고 보면 이들이 승리한다. 이게 정말 무섭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말을 내세워 과거 역사를 새로 쓰는 척하면서 무인지경인 압록강과 두만강에 군사 1만 5천을 배치하고서 지금 북한을 노리고 있다.) 창의력이 일본보다는 낫지만 한국에는 뒤떨어진다. 창의력은 기본적으로 무엇이 부족해야 생기는 법인데, 중국은 별로 부족한 게 없기 때문이다.

대신 중국은 넓고 크다.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여기에 중국의 가장 큰 저력이 있다. 어딘가에 기인이사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가끔 천하를 놀라게 하는 천재가 나타난다. 비록 일본에서 기재를 꽃피웠지만 살아서 전설이 된 오청원과 중일 슈퍼바둑 대회 때의 섭위평이나 조치훈과 후지쓰배 결승을 앞두고 홀연히 사라진 전우평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대개 이런 사람은 생명이 길지 못하거나 비교하기 곤란한 전설의 구름 속에 있다. 돌출적인 천재이거나 주변의 다른 나라에서 천재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에 맹주로 군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미 한 3년 빛나던 천재성이 사라진 후에도 자기가 유일한 천재라며 허풍을 떠는 섭위평을 보면 과연 중국인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국에서 진짜 천재는 정치계에 나타난다.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통치할 그릇은 중국이란 대국이 아니면 그 천재성을 기르기 힘들기 때문이리라. 겉모습은 우습게 보이지만, 한 고조 유방이나 명 태조 주원장도 저 넓은 중원에서 수백 년만에 한번 태어나는 정치의 천재이다. 현대의 모택동과 등소평도 정치의 천재이다. 그 깊고 넓은 속은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한다. 어떤 잣대로도 그들을 거의 잴 수가 없다.

학문과 경제에 대해서 '열린 사회'인 미국에서 천재가 부지기수로 나타나서 노벨상을 휩쓸고, 세계 특허를 독과점하면서 세계표준을 휩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보통 사람도 그런 '열린 사회'에서는 아주 좁은 한 분야지만 어느 한 분야에서 천재로 자랄 수 있다. 최대한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재 교육도 중시하지만 보통 교육도 중시한다. 어디서 천재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함부로 천재란 말을 쓰지 않는다. 노벨상을 받아도 천재란 말은 극도로 아낀다. 노력을 더 중시한다. 또한 하나하나 분석하고 체계화해서 그들을 따라 배운다. 그러면 보통 사람도 천재와 버금가게 된다. 전통이 축적되고 그를 바탕으로 계속 인재가 쏟아진다.

대신 한국은 천재를 숭배한다. 노력보다는 타고난 팔자와 재주를 중시한다.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 천재를 따라 배우려 하지 않는다. 전통이 없다. 지나면 모두 새로 시작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을 숭배하는 사람은 엄청 많지만, 그분의 전략전술과 지도력을 배울 생각을 않는다. 그가 위인전기에는 꼭 등장하지만, 성인용 책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모르기 때문이고 배울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그분은 천재일 뿐이다. 하늘이 낸 인물일 뿐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그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기도의 대상일 뿐이다.

바둑계에서 한국의 고질적인 병폐를 없앴다. 거기선 누구도 천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천재로 인정하길 대단히 꺼린다. 천재라 자처하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 하늘 높은 고수라 해도 전혀 기죽지 않고 숨구멍이 아직 덜 여문 아이조차 그의 기보를 샅샅이 분석하여 배우고 감히 고사리 손을 내밀고 도전한다.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경쟁한다. 경쟁할 뿐만 아니라 공동 연구라 하여 협동도 경쟁 못지 않게 잘한다. 대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때는 사부, 선배, 형, 아우를 깍듯이 대접하고 챙긴다. 조훈현은 꼭 후배들을 1년에 한번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흥겹게 지낸다. 미국이 '학문에 대해 열린 사회'라면 한국은 '바둑에 대해 열린 사회'이다. 인재가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은 인간미가 있다. 바둑은 바둑, 인간은 인간이다. 삭막한 미국의 학계보다 훈훈한 한국의 바둑계가 훨씬 낫다.

이창호는 한국의 문화가 거의 긍정적인 측면으로만 작용하여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다. (한국의 문화가 거의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작용하여 배출한 인물들은 정치계에 김포 매립지의 쓰레기처럼 그득하다.) 그는 한국의 장점을 골고루 몸에 익힌 큰그릇이다. 전통과 현실을 접목시켜서 '미래의 문'에 한 발을 먼저 들여놓은 사람이다.

그 미래의 문은 바로 '확률'이다.

조치훈의 바둑 철학에 대해 '이기는 철학'이라고 하는 데서 그는 바둑에서 '확률'의 의미를 가장 먼저 안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반 집과 끝내기도 '운'이나 '대세'에 맡기지 않고 한국인특유의 집요함과 창의력으로 현대의 '확률'로 끌어내린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읽고 찾아내어 가장 높은 '확률'의 길을 간다. 항상 반상 전체를 바라본다. 부분적인 모양과 손실은 전체의 조화를 위해서 기꺼이 양보한다. '확률의 미학'으로 보면 그의 바둑은 가장 아름답다. '운명이나 행운의 미학'으로 보면 그의 바둑이 때로 흉하거나 평범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남들이 '신고전파'나 '후기 낭만파'에 머물러 있을 때 남 먼저 불협화음과 무조음이 뒤섞인 현대 음악으로 옮겨간 사람이다. 소리의 지평선을 넓힌 것이다. 남들이 '사실주의'나 '인상파'에 머물러 있을 때 과감히 '입체파'로 옮겨간 사람이다. 선과 색의 지평선을 넓힌 것이다. 피카소가 사실적인 그림을 못 그려서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동원했을까. 그는 젊었을 때에 사진보다 정교한 그림을 그렸었다. 마찬가지로 이창호가 몰라서 남들이 다 아는 수를 두지 않았던 게 아니다. 피카소가 그림에 입체의 형태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담았듯이 이창호는 '평면의 반상을 입체의 반상'으로 바꾸었다. X축과 Y축에 이어 홀로 Z축을 더 그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창호의 '바둑 미학'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경이적인 승률로 10년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서서히 그의 미학을 이해는 못해도 따라 배우게 되었다. 이제 자기도 모르게 한국은 거의 그의 '확률' 바둑을 둔다. 중국이 뒤따라오고 일본도 서서히 그 뒤를 따라 이창호의 '확률'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과히, "세계가 이창호 뒤를 따른다."

일찌감치 남 먼저 '확률'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그는 국내 기전이나 국제 기전이나 거의 똑같이 80%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승률을 자랑한다. 천재는 100%이겠지만, 그건 보통 사람이나 수재나 영재가 제 능력을 개발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이다. 천재 바로 아래의 영재, 그 바로 아래의 수재가 천재 못지 않게 노력할 때 100%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신 70~80%의 '확률'은 가능하다. 이창호는 바로 이 '확률'의 길을 어릴 때부터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무도 그가 가는 길을 몰랐다. 그래서 그는 때로 둔재나 범재로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2004. 7. 4.)

*인류 역사상 천재를 딱 한 사람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이순신 장군을 들겠다. 멀리서 조총 소리만 들어도(임금과 그 가족, 조정대신이 새벽에 쥐새끼처럼 성문을 빠져나가고 이를 안 백성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일삼아 천연요새 한성이 순식간에 폐허가 된 후에 한강을 지키던 겨우 1,000명의 조선군은 왜병이 몇 명 한강에 뛰어들어 수영으로 건널 흉내를 내자 도원수 김명원을 필두로 혼비백산 한 명도 남김없이 달아나 버렸다.) 너나없이 간이 콩알만해져서 달아나는 '붓의 나라'에서 그는 '홀로' '큰 칼'을 차고 '홀로' 군량과 무기와 전선을 마련하고 전라좌수영보다 두 세 배 컸던 경상좌수영, 경상우수영 등 왜병이 나타나면 싸움 한 번 안 하고 장수가 맨 앞장서서 다 달아났지만, '홀로' 군사들이 한 명도 달아나지 않게 다독거리고(명량대첩 때는 군사도 한 명 한 명 직접 모아야 했음), 철저한 훈련과 치밀한 '정보' 분석과 빈틈없는 전략전술과 불굴의 용기와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까지 사로잡는 경이적인 '따스한' 지도력으로 싸우면 언제나 '퍼펙트승'을 했다. 적선을 무려 935척이 불태우거나 깨뜨렸지만, 우리 전선은 단 한 척만 잃었을 뿐이다(최석남-구국의 명장 이순신). 그것도 한 장수가 그의 말을 안 듣고 해안 너무 가까이 갔다가 좌초된 것이다. 승률 100%에 손실 0.001%였다. 천재는 모름지기 이런 분이 천재다.

(일본에는 유도에 천재가 한 명 있다. 500년만에 한 번 날까 말까 한다는 무제한급의 산하태유[야마시타 야스히로]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 전국 대회에서 딱 한 번 지고 국내 대회든 국제 대회든 모조리 승리하여 203연승을 했다. 그리고는 은퇴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에겐 비길 수가 없다. 일본은 유도에 '열린 사회'였지만, 조선은 칼에 '닫힌 사회'였기 때문이다.)
 
 

동양증권 우승당시의 해프닝

천재 소년 기사 이창호 9단의 첫 세계챔피온 도전국이던 제3회 동양증권배 세계 바둑 대회 결승...

16세의 나이에 세계 바둑 대회에 참가한 것도 놀라운데 일본과 중국의 무수한 강호들을 가볍게 누르고 결승까지 오르자 일본과 중국의 바둑 관계자들은 거의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때 일본 기자들이 이창호에게 지어준 별명은 '외계인'이었다. 도대체 사람일 수가 없다는 거였다.

16세의 나이에 그토록 깊은 바둑의 이치와 진리를 깨우칠 수는 없다고 했다.
바둑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창호가 누구인가. 한국이 낳은 '믿거나 말거나' 아니던가? -_-;;      
일본의 한 기사는 이창호를 보고는 요절한 일본의 바둑 천재 본인방 수책의 환생이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 일본 기사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이창호는 수책보다도 더 잘 둔다. -_-;;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일본의 이중허리 임해봉 9단.
당연히 모두들 임해봉 9단의 승리를 예상했다.
제 아무리 천재소년이지만 이중허리 임해봉을 넘기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측도 막연히 이창호가 이기기를 기대했지만 결승까지 오른 것도 잘 한 거라고  자위했다.
한 판만 이겨도 성공이라는 방정맞은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임해봉이 누구던가...
일본의 전설적인 기사 면도날 사카다의 화려한 전성시대를 마감하게 하지 않았던가.
그의 이중허리엔 조치훈마저 자주 쓰러졌다. 그리고 중국의 철의 수문장 섭위평 9단을 후지쯔배 결승에서 만나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이겨놓질 않았던가...

하지만 창호는 이미 임해봉을 이길 준비가 돼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임해봉을 궁지로 몰고 갔다.
임해봉이 먼저 한 판을 이기면 다음 판은 창호가 이기는 식으로 끈질기게 임해봉을 물고 늘어졌다.

국후에 임해봉은 이창호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 무엇보다도 표정이 없어서 무서웠다. "
그렇다.
이창호는 시종일관 ' -_- ' 표정으로 바둑을 뒀던 것이다. 임해봉으로선 무서웠을 것이다.
어린 놈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 게 어디 있을 수나 있는 일인가?

임해봉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 5번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런 말을 한다.
" 이창호는 내 아들보다도 한살 어립니다. 아마 이번 5번기 동안 저는 심히 괴로움을 맛볼 것입니다. "
그렇다.
임해봉은 5번기 내내 괴로움을 넘어 고문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린 아이와 진검 승부를 벌인다는 게 어른으로서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지면 망신 아닌가?

4국까지는 흑번을 쥔 기사가 이겼다.
이른바 흑번 필승이다. 운명의 마지막 5국.

그 전까지는 흑백을 번갈아 가며 잡지만 결승 다시 돌을 가려야 한다.
여기서 백을 잡으면 곧 패배를 의미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제발 이창호가 흑을 잡기를 빌고 또 빌었다.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오고 돌을 가렸다. 창호는 한움큼 잡은 돌을  바둑판 위에 펼쳤다.
수십개의 돌이 나왔다. 거기서 홀수가 나와야 한다.
홀수 나와라! 홀수 나와라! 홀수 나와라!! 홀수 안 나오면 자살한다!! -_-;;

드디어 돌이 가려졌다.
오우 마이 갓! 창호가 펼친 돌은 짝수였다. 여기저기서 나즈막한 탄식이 흘러 나온다.
흑번을 잡은 임해봉은 거의 천하무적이 아니던가. 하늘이 창호를 외면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창호의 국후 소감을 들어 보자.
" 백을 잡아서 기분이 나빴어요. 그래서 승부를 길게 끌고 가는 작전을 써야 했어요. 그러면 기회가 한 번은 온다고 생각했어요. "
바둑계에서 흑번이 유리하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응창기배에서는 백에게 5집반이 아닌 파격적으로 8집의 덤을 준다. 아니나 다를까 백을 쥔 이창호가 시종일관 끌려 다니는 형국이다. 누가봐도 창호의 백돌에게 패배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한 번이라는 기회는 올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곧 쓰러질 것 같은 창호는 쓰러지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일어났다.
그리고 임해봉의 이중허리의 비좁은 틈새를 조금씩 파고 들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도 어느새 형세는 미세해 졌다.
창호는 이미 3시간을 거의 다 소비해 초읽기에 들어가 있었다.
이미 1분짜리 초읽기도 10개 중 9개를 소비하고 마지막 하나를 남겨두고 있었다.  

1분 동안에 한 수를 두는 건... 피를 마르는 작업이다.
그건 16세의 어린 소년에겐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마지막 남은 1분 중 50초가 지나면 초읽기는 인정사정 없이 시작된다.
국제 시합이라 초읽기도 영어로 해야 한다.

"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씩스,  세븐.... "  
으아악, 거의 지켜보는 이는 실신할 지경이다.
저러다 실수로 돌을 놓다가 놓치기라고 하면 시간패가 아닌가?
나인에 가서야 돌을 놓는 창호의 손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돌리기 바쁘게 다시 초읽기 시작된다.

"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
초읽기는 거의 가학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승부사는 그래서 고독하다. 누구하나 도와주는 이 없고, 혼자서 난관을 헤쳐나가야 한다.
오죽하면 박수동의 "만방 아저씨" 라는 만화에서 초읽기에 몰려있는 만방 아저씨가 인정사정 없이 초읽기 하는 아가씨의 입을 향해 바둑돌을 던지는 장면이 다 있을까.
그 돌은 정확히 아가씨의 입에 들어 간다. 만화니까...

다시 피도 눈물도 없는 마지막 초읽기 시작되고 모두들 가슴을 졸이며 지켜 보아야 했다. 마지막, 마지막, 마지막....

"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

아니, 이럴수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파이브 다음은 씩스인데 그 날은 아니었다.

초읽기 아가씨의 초읽기를 리플레이 해서 다시 들어 보자.  
"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초조하게)마지막 입니다. 빨리 둬 주세요!  씩스..."    

오마나, 빨리 둬 주세요, 라니..
초읽기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
아니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초읽기 하다 말고 "마지막이니 빨리 둬 주세요!" 라고 한 사람은 여지껏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초읽기 하는 사람은 초읽기 외에는 어떠한 말도 해선 안된다.

" 마지막이니 빨리..." 라고 말할 동안에 4초가 흘러가 버린다. -_-;;
한마디로 그건 사고다. 중립을 엄격히 지켜야할 계시원이 노골적으로 창호편을 들고 만 거였다.
해설자인 김수영 7단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생방송임을 의식해 초읽기의 돌발행동에 대해 간단히 언급만 하고 넘어 간다.
" 초읽기가... 쩝.. 오바했네요. "  -_-;;;

초읽기 하는 입장에선 이창호 9단이 마지막 초읽기를 하는데 그것도 다섯을 셀 때까지도 두지 않으니    
혹시나 이창호가 시간을 착각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불쑥 그런 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른바 초읽기 아가씨의 작은 애국심?에서 나온 돌발행동이었다.

나는 그 날 그 바둑을 보면서 혹시나 저 여자가 또 무슨 망발이나 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읽기 하다가 창호가 또 안 두면
이번엔 "제발 좀 둬 주세요" 라고 할 것만 같았다. -_-;;

만일 일본측에서 나중에 딴지라도 거는 날이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예전에 명인전에서 계시원이 조치훈 9단에게 패감의 순번에 대해 말했다가 노게임이 된 적도 있었다.
어쨌든 그 아가씨의 뜨거운 피는(?) 이해가 되지만 도가 지나친 행동이었다.

반집을 다투던 바둑도 어느덧 끝이 났다.
계가를 해보니 창호가 한집반을 이겼다.
최연소 바둑 세계 챔피온이 된 것이다.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그리고 이 기록은 깨어지기 힘들 것이다.
왜냐? 요즘 애들은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에 너무 빠져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최연소 세계 챔피온이 되고 난 후, 창호에게 따라 다니던 수식어에도 변화가 있었다.

되기전 - 신동, 괴동, 애늙은이, 강태공, 능구렁이...
된   후 - 터미네이터, 외계인, 기신, 신산...  

이제는 신이란 표현이 그를 따라 다닌다. 그리고 덤으로 하나 더 얻은 게 있다면, 이중허리 임해봉을 이긴 댓가로 '삼중허리'란 별명까지 얻었다.
마지막으로 임해봉이 패전 후 기자회견 때 한 말이다.

" 그는 나보다 강했다. 그의 미래는 정말...무시무시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

세계를 향한 창호불패의 신화는 서서히 시작되었다.


한국 왕따를 종식시킨 이창호

바둑 강국인 우리나라도 이창호가 나오기 전에는 일본과 중국에게 왕따를 당했었다.
근대 바둑을 꽃피운 일본... 그리고 바둑 후진국이던 한국...

일본은 70년대에 처음으로 한국과 교류전을 갖는다.
결과는 8-2, 9-1... 한국의 2년 연속 대참패였다. -_-;;        
바둑 선진국으로 자부하던 일본은 한국과 교류전을 해봐야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여 3년째에는 일방적으로 한국에 오지 않는다.
한국은 그렇게 일본에게 가볍게 따 당한 것이다. -_-;;    

일본은 80년대 들어 국가 대항전을 만든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을 끼워주지 않는다.
이름하여 중일슈퍼대항전!
이번엔 중국과 합세하여 한국을 왕따 시킨 것이다. -_-;;
한국은 중일슈퍼대항전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일본과 중국이 우리나라를 따 시키더니 이번엔 대만이 가만 있지 않았다.
88년... 대만의 갑부 응창기 씨가 응창기배라는 우승 상금만 4억인 초 슈퍼 울트라 바둑 대회를 만든다.
응창기 배의 주최국인 대만은 각국에 출전권을 부여했다.
일본과 중국에는 각각 6,7명의 출전권을 준다.
그리고 한국에는... 1명씩이나~ 되는 엄청난 출전권을 준다. -_-;;
바둑 실력이 개뿔도 없는 대만에게마저 따를 당한 것이다.
응창기 배에는 아마추어 수준인 미국, 유럽, 남미에도 각각 한 장씩의 출전권이 주어졌다.
결국 한국은 아마추어 취급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갖은 설움을 뒤로하고 한국의 간판스타 조훈현이 응창기배에 홀홀단신으로 참가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서러움...철저한 무관심...
조훈현은 중국과 일본의 고수들 사이에서 그런 왕따를 다해야 했다.

하지만 조훈현은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싸웠다.
왕명완을 가볍게 물리치더니 일본의 최고수 고바야시 마저 이기고 4강에 안착했다.
그리고 준결승에서 벅찬 상대 임해봉을 이겨서 중국의 섭위평과 꿈에도 그리던 결승 5번기를 두게 되었다.

철의 수문장인 초일류의 고수 섭위평...
그는 선천적으로 심장에 천공이 뚫려 있어 바둑 두는 도중에 휴대용 산소 호흡기로 산소를 마셔 가면서 바둑을 둬야 했다.
그리고 섭위평은 문화 대혁명 당시 유한 계급으로 분류되어 하루 아침에 흑룡강 돼지우리 반장으로 신분이 하락되기도 한 특이한 이력의 사나이다.  
어찌보면 불쌍하기도 한 섭위평...
하지만 한국이 왕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꼭 섭위평을 이겨야 했다.
심장에 천공이 뚫렸다해서 조훈현이 져줘야 할 이유는 없다.
허파에 왕따시 만한 구멍이 뚫렸건 뇌에 똥파리가 살건 그건 개인 사정이지 져줘야 할 이유는 못 된다. -_-;;

둘은 치열하게 승부를 주고 받았다.
2-2 타이 스코어에 운명의 마지막 대국...
마지막 5국은 싱가폴에서 열렸다.
사람들은 그걸 두고 싱가폴 대첩이라 표현했다.

조훈현의 어깨는 무거웠다.
응창기배를 우승함으로써 그동안 한국이 당했던 왕따의 수모를 벗겨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그를 짓눌렀다.

하지만 조훈현은 강했다.
한 판에 4억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자기만의 바둑을 뒀다.
산소 공급이 안 되어서인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얼굴이 부은 섭위평은 중간에 돌을 거뒀고, 옆에서 지켜보던 섭위평의 부인 공상명 9단은 얼굴을 감싸 안고 대성 통곡을 했다.      
섭위평과 부인 공상명은 그 후 갈등이 심해져 이혼까지 하게 된다.
만일, 섭위평이 응창기배를 우승했으면 부인과 이혼까지 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생일대의 승부에서 진 후유증은 그렇게 큰 것이다.

감격의 응창기배 우승!!

단장으로 간 김수영 7단은 그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TV로 공개 해설하던 노영하 8단은 조훈현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만세 삼창을 했다.
차갑고 이지적인 해설자 노영하 8단. 평소에 별명도 선비다.
난 그가 그렇게 이성을 잃고 배가 튀어나올 정도로 만세 삼창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선비가 저렇게 망가져도 되나 괜히 나 혼자 걱정했다. -_-;;

조훈현은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바둑 기사로는 처음으로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조훈현은 한국 바둑을 왕따의 수렁에서 구해낸 용사였던 거였다.
응창기배 우승 이후 상황은 급반전 했다. 한국 바둑을 대하는 눈을 달라졌다.
이제 어느 나라가 한국 대신 왕따를 당하느냐만 남은 상황이었다.
키는 한국이 쥐고 있었다.

응창기배 우승에 고무된 한국은 90년대 들어 진로배 국가 대항전을 개최한다.
국가 대항전인 만큼 바둑을 둘 줄 아는 아시아의 네 나라가 모두 붙어야 하건만...
거기엔 대만이 빠져 있었다.
그렇게 한국은 가볍게 대만을 따 시켰다. -_-;;              

대만측에서 불만을 토로했지만 일본과 중국도 은근히 대만이 빠진 거에 대해 찬성했다.
대만이 참가하면 대회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대만... 그러게 왜 응창기배 출전권을 한국에는 달랑 한 명만 주고 지랄이었니... 세 명만 줬어도 따 당하지 않았을 것을...

한국의 자랑 이창호, 초슈퍼울트라메가캡숑을 자랑하는 바둑 신 이창호...
이창호는 90년대 중반 국내 도전기 전념을 위해 일본의 후지쯔배에 불참을 선언한다.

후지쯔로선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후지쯔 측에선 그야말로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이미 세계 기류는 이창호의 참가 여부에 따라서 일류와 이류 대회로  분류되는 시대인 것이었다.
골프에서 타이거 우즈가 참여하면 그 대회가 더욱 빛이 나듯이 이창호의 참여 만으로도 그 대회의 격이 상승된다.
후지쯔 측에선 이창호를 참가 시키기 위해 별의별 짓거리를 다했다.
(원본에 충실하다보니... 그냥 틀린글자만 고쳐올렸습니다. ^^;)
빌고 또 빌어도 안 되니 나중엔 협박까지? 했다 한다. -_-;;
갖은 연줄을 다 대고 한국의 고위층에까지? 이창호를 설득해 달라고 연줄을 대 보지만 이창호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창호는 개인적으로 가볍게 일본의 거대 기업 후지쯔를 왕따 시킨 것이었다.
아, 우승 상금이 일억 오천인 대회를 불참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모두들 참가하지 못해 안달인 것이다.
그런 대회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왕따 시키는 이창호의 마음 속이 정말 궁금하다.

하지만 이창호도 후지쯔 측이 불쌍했던지 다음해에는 기꺼이 참가를 해준다.
그리고 결승에서 창호는 그의 영원한 밥, 아니 운명적으로 밥일 수밖에 없는 중국의 마효춘을 가볍게 누르고 우승한다.

중일슈퍼대항전...
한국을 왕따시키고 자기들끼리 꿍짝이 맞아서 신나게 대회를 열어 나가더니 90년대 들어 소리 소문 없이 그 대회는 사라진다.
중일슈퍼대항전 주최측은 거기에 대해 이런 이유를 댄다.
' 한국이 참가하지 않는 대회는...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둬요.. T_T '  
그렇다.
이제 한국이 출전하지 않는 대회는 의미가 상실되는 시대다.

그렇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던 한국 바둑... 이젠 왕따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세계의 중심에 선 것이다.

중국의 '중국식 포석'과 일본의 우주류 다께미야의 '3연성 포석'이 80년대를 주름잡을 때 우리나라 기사들은 그들이 창안한 걸 따라하며 기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연 90년대도 그럴까?
정동진에 가면 '고현정 순대'니 '이정재 김밥' 있듯이 요즘 세계 바둑계에는 '이창호 정석' 이란 게 판을 친다. 덩달아 '조훈현 정석'도 난리가 아니다.
이미 다께미야의 '3연성 포석'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일본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기성전에서 마저 '이창호 정석'이 난무하여 따로 저작료라도 받아야할 지경이었다.

왕따... 한국 바둑은 이창호가 있었기에 완전히 왕따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이창호 같은 천재도 노력을 할까?
이창호는 새벽 2,3시까지 바둑돌을 놓지 않는다.
천재도 노력해야 한다는 걸 이창호는 몸소 보여준다. (부단히 노력합시다... ^^;)    

다시 뛰는 한국인... 한국은 다시 뛰어야 한다.
IMF라는 이름의  왕따의 굴레를 벗기 위해선 이창호처럼 쉬지 않고 뛰어야 할 것이다.
한국인은 사실 정말 뛰어난 민족이다.
그걸 이창호가 확인해 줬다.
일본과 중국의 날고 뛰는 기사들이 이창호 앞에 두손두발 다 들었다.
노력하는 한국인의 모습이 그의 모습 속에 투영돼 있다.
자충수와 패착으로 일관하는 부패한 인간들만 없으면 우리의 앞날은 밝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왕따는 없다...


93년 동양증권배 결승 ①
조치훈, 이창호 드디어 조우

서봉수와 오타케가 잉창치배를 놓고 막바지 승부를 벌이고 있던 1993년 봄,
제주도에선 또 하나의 흥미진진한 대결이 시작되고 있었다.
조치훈과 이창호, 두 희대의 천재가 세계 4대 기전의 하나인 제4기 동양양증권배 결승에서 격돌한 것이다.
이때 조치훈 37세, 이창호 18세.

조치훈은 6세 때 숙부 조남철 9단의 손을 잡고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의 떠오르는 별인 린하이펑(林海峯) 9단에게 5점 시험기를 두어 이긴 뒤 곧 바둑계 최고의 명문 기타니 도장에 입문했다.

처음부터 시련이 찾아왔다. 까마득한 저 위에 기타니 9단이 있었다.
그 다음은 기도(碁) 덩신에 누구보다 준엄한 가지하라(梶原武雄) 9단이 도장을 호령하고 있었고, 막 20대가 된 린하이펑과 쌍벽인 청년 강자 오다케가 문하생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조치훈에겐 그들은 모두 대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세 사람이 더 있었다.
훗날 '기타니 도장의 삼총사'라 불리게 되는 14세의 이시다, 15세의 가토, 11세의 다케미야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지기 싫어하는 조치훈을 데리고 치수고치기로 바둑을 두었다. 5점에서 시작해 7점, 8점, 9점. 조치훈의 눈에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당대의 1인자 사카다 9단과 정상에서 겨루는 린하이펑을 5점에 이겼는데 아직 프로도 아닌 이들에게 9점이라니···.
신사 린하이펑은 어린 치훈의 사기를 위해 슬슬 뒀지만 씩씩한 이시다 등은 전혀 봐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기타니 도장은 풍요로운 땅이었다.
나중에 일본바둑을 휩쓴 인재들이 이때 도장에 다 모여 있었다. 김인 9단도 때마침 그곳에 와 있었다.
그 속에서 고집불통 조치훈은 바둑 두다 울고 싸우다 울었다.

당시 도장의 사범이었던 김인 9단은 이렇게 술회한다.
"치훈이는 투지가 대단했다. 고집 세고 말썽도 심해 여자애들을 잘 울렸다.
그래도 선생의 부인은 '객지생활을 하는 철부지'라는 이유로 항시 치훈의 편이었다.
나중엔 누구도 치훈하고는 싸우지 않게 됐다."

괴동환(怪童丸)이란 별호를 지닌 일본의 거목 기타니 9단은 이런 조치훈에게서 일찌감치 대성의 싹을 본 것 같다.
노년의 기타니는 누구보다 치훈의 손을 잡고 외출하기를 즐겼다.
1969년 13세의 치훈은 일본기원 최연소기록을 세우며 입단의 관문을 뚫는다.
일본에 온 또 한 사람의 천재 조훈현이 프로가 된 지 2년 뒤였다.

조훈현의 스승은 세고에(懶越憲作) 9단이고 세고에는 기타니의 스승 스즈키(鈴木爲大郞) 9단의 라이벌이었다.
세고에는 강성해 가는 기타니 도장을 응시하며 견제세력을 키웠으니 바로 관서기원의 충수 하시모토(橋本宇太郞) 9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혈육처럼 키운 조훈현이다.
세고에는 자신의 제자들이 일본의 정상에 서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타니 일문이 바둑계를 휩쓸고, 기대했던 조훈현이 귀국해 버리자 낙심한 세고에는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세고에가 좀더 오래 살아 조훈현이 세계를 휩쓸고 조훈현의 제자로 이창호란 인물이 나타난걸 지켜봤더라면 그는 어떤 심정이었들까.

조치훈은 점점 무서운 승부사로 커갔다.
74년, 그러니까 18세 때 그는 획기적인 한 해를 보내게 된다.
그는 이 해에 사카다, 후지사와, 오타케, 린하이펑, 그리고 기타니 문하 삼총사 등 7인과 싸워 7전 전승을 기록한다.
6세 때 하늘처럼 보였던 강자들, 자신을 9점으로 놀렸던(?) 선배들을 모두 잡고, 명인, 본인방(本因坊) 2관왕에 빛나는 이시다도 꺾고 사카다와 일본기원 선수권전 결승에서 격돌했던 것이다(이때 이창호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막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조치훈은 일본의 모든 고수들을 무릎꿇게 만들었다.
조치훈은 핏줄은 한국인이지만 일본 바둑계의 가장 비옥한 땅에서 일념으로 승부의 정수를 꿰뚫어온 정예 중의 정예였다.

세월이 흘러 그 조치훈 앞에 이창호가 나타났다.
원숙해진 조치훈은 감회에 젖어 말했다.
"이창호가 자랑스럽다."

이창호는 이미 세계타이틀 보유자였다.
최고 엘리트였던 자신의 '18세'보다 한 단계를 더 뛰어넘은 이창호의 '18세'.
그것이 뭉클한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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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동양증권배 결승 part ②
결승 1번기 내용입니다.

이창호, 그는 누구일까

조치훈은 건너편에 엉거주춤 앉은 이창호를 지그시 본다.
이례적인 일이다.
일본에서의 趙 9단은 대국개시 30분이나 1시간 전쯤부터 대국장 입구의 의자에 홀로 앉아 명상에 잠기곤 했다.
고개를 숙인 채 누구와도 눈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趙 9단은 '화염'이었다.
내면의 불길을 다스리며 정신을 한 점으로 모아 '목숨을 걸고' 바둑에 임하는 것이다.
투혼으로 온몸을 공처럼 팽창시킨 채 고뇌의 늪으로 스스로를 몰입시키는 趙 9단의 모습은 항시 인상적이었다.

거의 언제나 1백수 안에 초읽기에 몰렸다.
짓이기는 듯한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죄없는 성냥개비를 무수히 부러뜨렸다.
(이후 주최측은 으레 커다란 성냥통을 趙 9단의 자리에 대기시키곤 했다).

열정적인 趙 9단은 패하면 눈물이 솟구쳤다. 자정이 넘도록 밤길을 헤메며 술에 취했다.
어느 날 대선배 사카다 9단이 이렇게 충고했다.
"명인은 우는 게 아니다. 명인은 공인(公人)이다."

이후 趙 9단은 울지 않았다.
그러나 대국전에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거나 관전자와 말을 나누는 등 승부의 기합을 허물어뜨리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창호란 존재는 말 할 수 없이 강렬한 호기심의 대상이어서 趙 9단조차 한눈 팔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친구의 어디가 그토록 세단 말인가.
기보(棋譜)를 보면 굼뜨고 평이했다.
고수들이 동경하는 '눈부신 비상'을 찾을 길이 없었고, 다만 굵은 선 하나가 수평으로 곧게 지나가는 느낌이 있었다.

이창호는 고개를 어색하게 기울인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趙 9단이 18세일 때는 예기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와 닿는 것은 모두 찌를 듯했다.
초점없이 눈을 껌벅이는 이창호는 정체불명이었다.

1993년 4월 22일 오전 10시, 제주도 서귀포의 하얏트 호텔 특설대국장.
돌을 가리니 趙 9단의 黑.
천재 조치훈의 '30년 공부'와 대우(大愚) 이창호의 '10년 공부'가 드디어 대결을 시작했다.

5번기로 펼쳐지는 동양증권배 세계대회 결승전 제1국.
예상대로 이창호는 지구전으로 나왔고, 조치훈은 특유의 극단적 수법과 대세감각으로 앞서 나갔다.
'과연 조치훈'이라고 모두 감탄했다.

중반이 끝나갈 무렵 黑은 반면 10집이나 우세해 승부는 역전 불가능으로 보였다.
이때부터 이창호가 한발한발 추격을 개시했다.
수순을 비틀어 바늘끝 만한 빈틈을 찔렀다.
조치훈의 '심리'를 두드려 보이지 않는 양보를 얻어냈다.
이창호가 '물러서라'고 속삭이면 조치훈은 물러섰다.
어느 순간 위기를 느낀 趙 9단이 '안돼' 하고 부르짖으며 강수를 던지자, 이창호는 무시무시한 완력으로 조치훈의 등뼈를 꺾어버렸다.
쌍방 마지막 1분 초읽기 속에서 대역전극이 펼쳐졌다.

산방산을 앞에 둔 해변의 생선횟집.
검은 파도를 응시하며 말이 없는 패자 조치훈에게 '이창호 바둑이 어떤가' 하고 물었다.
趙 9단은 동석한 조훈현 9단을 바라보며 '선생보다 약하다'고 단언했다.
승부에서 제자를 좀더 엄하게 다루지 않는 조훈현을 책망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일세를 풍미해온 曺, 趙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미묘하게 교차했다.
曺 9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이창호에 대한 패배를 마음으로부터 승복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이창호, 그는 누구일까. 이 새삼스런 화두에 사로잡혀 장내는 한동안 숙연했다.
왜 뭇 고수들은 이창호에게 지고서도 승복할 수 없는 것일까.
이창호는 왜 사람들을 경복시키지 못하면서도 꾸준히 이기는 것일까.
그는 승부기계인가.
아니면 그는 남들이 모르는 새로운 경지를 외롭게 개척하고 있는 중일까.

이틀 후 제2국이 열렸다.


93년 동양증권배 결승 ③
결승 제 2국편

'대우(大愚)'앞에 무릎 꿇은 조치훈  

조치훈은 1984년 일본의 정상에 오른 뒤 그의 저서에 이렇게 썼다.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선생은 돌의 리듬감이 뛰어나고,
린하이펑(林海峰) 선생은 살집이 두텁고 대국관이 밝다.
오타케(大竹英雄) 선생은 전국적인 리듬이 놀랍고,
이시다(石田芳夫)는 은장도의 날카로움을 지녔다.
가토(加藤正夫)는 단도직입적인 공격이 무섭고,
다케미야(武宮正樹)는 세력과 전투의 응용이 뛰어나며,
고바야시(小林光一)는 이상주의적 강함은 지녔다.
나는 그것들을 훔쳐 배웠다.
훔친다는 말은 흉하지만 스포츠든, 예술이든 누구나 1류의 기예를 훔치는 데서 출발한다."

"목숨을 걸고 둔다"던 조치훈보다 훔쳤다고 고백하는 이때의 조치훈은 분명 한 걸음 성숙해 있었다.
그로부터 9년 후 이창호와 대결하고자 제주도에 나타난 趙 9단의 얼굴엔 고독함과 우수가 짙게 배어 있었다.
지금도 목숨을 걸고 두느냐고 물으면 그는 얼굴을 붉힌 채 약간 더듬거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승부는...... 나의 업(業)이랄까. 숙명 같은 것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9년 동안 趙 9단은 인생의 정점과 나락을 동시에 맛보았다.
불의의 교통사고, 의사의 만류를 뿌리친 휠체어에서의 방어전(그때 사람들은 조치훈의 투혼과 프로정신을 얼마나 극찬했던가), 그리고 정상에서의 추락. 정상탈환은 연속 좌절됐고, 그는 비로소 패배와 좌절의 깊은 맛을 알게 됐다.
승부는 빛나는 쟁취가 아니라 일생의 '업'이었던 것이다.
삭막한 승부세계에 한 번 발을 디딘 이상 결코 벗을 수 없는 업.

4월 24일 오전 10시. 동양증권배 결승 제2국이 시작됐다.
白을 쥔 趙 9단은 제6수에 30분을 쓰며 처음부터 대 장고하는데, 인생경험이 전혀 없는 이창호는 고뇌하는 趙 9단 앞에서 강태공처럼 덤덤히 앉아 있었다.
이창호의 행마는 때로는 고개 숙인 들꽃처럼 소박했다.
때로는 깊은 밤 심산유곡의 안개처럼 느릿하게 피어올랐다.

팽팽한 중반, 趙 9단의 묘수가 번쩍하더니 폭풍처럼 판을 뒤흔들었다.
이창호는 절벽에서 몇 점을 주르륵 미끄러졌다.
승부가 끝났는가 싶었다.
그러나 한발한발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억겁의 세월을 윤회하며 어둠을 헤쳐온 늙은 수도자처럼 역경에 처하자 그의 승부호흡은 더욱 느릿하고 장구한 힘을 토해냈다.
1분 초읽기에 몰린 趙 9단이 귀신에 홀린 듯 작은 실수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소리를 억누르듯 趙 9단의 얼굴은 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소년은 어른으로부터 신중함을 배우고, 세월의 흐름과 시련 속에서 끈기를 익힌다.
승부사는 삶의 부침을 겪고 그걸 포용하면서 타오르는 심화(心火)를 다스려 나간다.
적어도 조치훈은 그랬다.

이창호는 달랐다.
18세의 청년 이창호는 지난 몇 년간 수백 년의 상식들을 허망하게 만들어왔다.
인간의 능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천지간의 비밀 같은 것이 이 젊은이에게 있었다.
마지막 1분을 남겨놓고 이창호는 별을 헤아리는 도사처럼 무아의 계산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름하여 '신산'(神算).

그 불세출의 능력이 조치훈의 30년 공부를 압박해 갔다.
끈기의 화신이요 수양 갚은 조치훈이었으나, 이창호의 끈기엔 또다시 동요되고 말았다.
그 찰나에 이창호가 치고 나갔다.
결승라인에서 이창호쪽이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이창호의 반 집승.
조치훈은 1국을 역전 불계패했고, 2국에서도 역전당해 '반 집'이란 극미의 차이로 분루를 삼켰다.

도저히 마음으로부터 패배를 승복할 수 없었으나 5판 3승의 승부에서 두 번을 잇따라졌다.
이창호는 실로 강인했다.
조치훈은 쓰러지지 않았으나 내면으로부터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93년 동양증권배 결승 ④
결승 제 3국

마법의 '신산(神算)', 기적의 반 집 승

이창호의 종반은 한 폭의 거대한 추상화다.
그의 뇌는 어둠에 덮인 공간을 탐사해 1초에 10여 장씩의 그림을 그려내고, 그것들은 파노라마처럼 이어져 하나의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 추상화를 판독해 골프공을 찾아내는 인공위성처럼 '반 집'을 찾아낸다.
반상에 존재하지 않는 반 집이라는 허수(虛數)를 신비롭게 추적해 낸다.

이것은 서봉수 9단이 가장 갖고 싶었던 수수께끼 같은 능력이다.
"그 비밀만 안다면...." 하고
徐 9단은 목마르게 장탄식하곤 했다.

아아, 그 비밀만 안다면.

바둑사에 전례가 없는 이 불가사의한 능력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 나는 이창호에게 '신산'(神算)이란 별호를 선사했다.
몇년 전인가. 한 독자가 "어린애한테 '神' 자를 붙일 수 있느냐, 아마추어적인 터무니없는 과장"이라며 거세게 항의를 해왔다.
일리 있는 항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창호의 '허공을 계산해 내는 능력'은 점점 무서워졌다.

동양증권배 제2국에서 '반 집'으로 역전패한 조치훈 9단은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일본에서 趙 9단은 끈기의 화신으로 불렸다. 뒷심은 누구보다 강했다.
그런데 이창호란 청년에겐 그게 통하지 않았다.
이창호 바둑은 강한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조훈현 9단보다 아직 약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종반 끝내기가 문제였다.
마법사의 주술(呪術)같고 요기(妖氣)같은 정체불명의 힘이 분명 있었다.

6월 8일. 서울 호텔 롯데 특설대국장에서 제3국이 시작됐다.
스코어는 2대 0.
趙 9단에겐 막판이었다.
10년 전 趙 9단은 후지사와 9단에게 3연패후 4연승해 일본 최대의 기성 타이틀을 따낸 일이 있었다.
이듬해 명인전의 오타케 9단과 92년 본인방전의 고바야시 고치이 9단도 모두 3연패 후 4연승이란 기적의 제물이 됐다.
'역전의 명수' 조치훈이 이창호마저 똑같은 코스로 보내버리기는 힘들겠지만 영패는 최소한 당하지 않을 것이다.
관계자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과연 조치훈은 다시 앞서 나갔다.
黑을 쥔 趙 9단은 제한시간 3시간짜리 바둑에서 초반부터 한 수에 47분씩 장고하며 전력을 기울였고, 점심 무렵에는 이미 상당한 차이로 이창호를 따돌리고 있었다.
시합 때면 쑤셔오는 다리를 담요로 덮고 그 위에 고뇌의 상징인 양 부러뜨린 성냥개비 조각을 무수히 뿌려놓은 채 趙 9단은 중반의 험로를 무사히 넘어갔다.

이창호 쪽은 여전히 기적이 없었다.
趙 9단은 의아했으나 1, 2국의 쓰라린 실패를 되새기며 마음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드디어 종반전. 이창호가 서서히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한두 집씩 날아가더니 차이가 휙 좁혀졌다.
그래도 결승점은 코앞에 있었고, 더 이상 추격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하나 이 순간에도 최후의 고비가 남아 있었음을 趙 9단은 대국이 끝나고서야 알았다.

제195수와 제201수.
분명 정수라고 믿었는데 이 사소한 막판의 두 수에 패배의 악령이 숨어 있던 것을 그는 먼 훗날에야 알았다.
이창호는 그 찰나에 신들린 듯 날아들었고, 계가 하니 白을 쥔 이창호의 반 집승.
또다시 반 집이었다.
그건 운이나 실력이라기보다 차라리 마법사의 주술 같은 것이었다.

趙 9단은 망연자실했다.
그는 넋을 잃고 기보를 살피더니 이창호에게 물었다.
"반 집 맞아?"
이창호가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18세의 이창호는 3대 0으로 조치훈을 꺾어버렸다.
세계대회를 2연패하며 1억 원의 상금을 거머쥐었다.
세 판 다 역전승이었고 기적 같은 반 집이 두번이나 있었으나, 조치훈의 30년 공부는 이창호의 괴력 앞에서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졌다.

서울을 떠나며 조치훈은 다시 말했다.
"이창호는 아직 조훈현만큼 강하지 않다. 그러나 이창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끝내기 하나만 강한 것은 아니다."

폭파전문가의 자존심을 걸고 조치훈은 패배를 끝끝내 승복할 수 없었고, 이창호는 여전히 안개 속에 숨어 있었다.

 

TYGEM / i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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