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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주의 이창호론(論)]
1990년대에 이창호가 명성을 얻어감에 따라 그에 관한 얘기들도 갈수록 많아졌다. 그는 새로이
등장한 젊은 세대 우수한 기사들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그가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했을 때 일본
바둑계에서는 그를 두고 지나치게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이길 생각만 하는 현실주의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렇게
가다가는 기력이 오히려 퇴보할 것이라는 가차 없는 표현도 주저하지 않았다. 비교적 정중한 표현으로, 이창호가
바둑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상대의 실수를 기다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비꼬는 기사도 있었다. 결국 상대방이
실수하지 않으면 이창호는 대단할 것도 없다는 얘기였다.
이런 평가는 중국 바둑계도
마찬가지였다. 이창호와 일본의 '오다케 미학(美學)'을 비교하며 평론하기도 하였으며, 또 그와 다케미야의
'우주류(다케미야 9단의 기풍으로 중앙을 두텁게 경영하는 큰 스타일의 바둑-편주)' 같은 일본의 다른 유파와도
비교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창호가 어떤 기풍이든 관계없이 시합에 이길 수 있다면 거기에는 정당한 이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다케미야가 뛰어난 건 많은 사람들이 중앙을 경영하고 싶어하면서도
다케미야처럼 잘 두지는 못하는 데 있다. 큰 모양을 만들려 해도 그가 하는 것 처럼 중요한 점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시대에 다케미야는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점이 많았으며, 또 다른 사람이 생각지 못했던 것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것과 비교해도 우리는 이창호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대부분의 기사들은
감히 큰 모양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단이 낮은 기사라도 빨리 큰 모양을 파괴하는 요점과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 바둑계에서 어떻게 큰 모양을 대처할 것인가 하는 면에 대해 큰 발전이 있었으므로 이제는
큰 모양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설령 그렇게 두더라도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오다케가 유명할 때 그는 좋은 모양과 바둑의 흐름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오다케 미학'이라는 찬사를 받았었다. 오다케 9단은 자신이 추구하는 바둑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맨
처음 사람들은 돌과 돌의 호응은 모르고 일반적인 전법만 알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도사꾸(道策)에서부터는 한 수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면서, 돌과 돌의 호응을 연구하여 더 큰 발전을 꾀하게
되었습니다."
'오다케 미학'은 주로 하나의 형상이 어떻게 더 큰 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가,
다른 돌과 어떻게 호응해야 보기 좋은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가령 포석 단계에서 빵 때림(돌 한 점을 사방에서 네
수로 포위해 때려낸 것을 말함-편주)을 하거나, 중앙에서 빵 때림을 하면 30집의 위력이 있다는 것인데, 이
이론은 당시 세계 바둑계에서 비교적 보편적이었고 기력의 향상에도 도움이 컸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1990년대에 와서 그 이론에 틈새와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령 빵 때림은
포석 단계에서는 위력이 컸지만, 중반 단계에서는 돌과 호응해야 했으므로 구체적인 상황을 보아야만 정할 수
있었다. 더구나 끝내기 단계에 와서는 그 작용이 미미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바둑계에 미친 이창호의 업적이 크다고 본다. 매번 대국에서 모든 돌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이창호는 모든 돌과
행마, 그리고 모양이 모두 다 가장 큰 효율성을 갖도록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이창호가 이제껏 바둑계에서
엉망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을 두기도 하고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건 무슨 뜻이냐고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 흉한 바둑을 둔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창호가 대국 전체에서 어떤 행보에 가장
가치가 있는가를 이해하는 면에서 다른 사람을 훨씬 뛰어넘어섰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모두들
이창호의 바둑을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어떤 것이 뛰어난 경계인가? 어떤 것이 효율이 높은가? 당시
상황에서 이창호가 두었던 바둑은 모두들 흉하고 설명하기 어렵다고 여겼지만, 사실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한 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둑 미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이다.
바둑의 승부와 기력은 통일에
있다. 효율적으로 잘 둔 바둑이라도 질 수 있기 때문에 단정해서 말하기 어렵다. 바둑은 결국 승부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창호의 경우를 예로 들고 싶다. 이창호는 그의 스승과 여러 번 맞붙어 싸웠는데, 일단
자신이 우세를 장악하면 그 우세가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천천히 밀고 나가며 우세를 확보해 가거나 적어도 우세를
유지할 줄 안다. 일단 위험이 있을 때는 때와 형세를 살펴 가능한 한 위험을 피해 가며 끈기 있게 참아 반 집
차의 우세라도 끝까지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 집 차로 승부가 갈렸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이창호가 반 집
승을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오랜 경험상 모두들 이창호를 신임하게 되었다. 이창호가 반 집
차의 우세를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은 그의 수준이 그만큼 높다는 걸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어떤 평론에서는 이창호에 대해 옛 선인들의 바둑을 연구해서 얻은 옛날 포석과 정석을
운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썼다. 이 말엔 사실 편파적인 면이 있다. 이창호와 조훈현의 '사제대전(師弟大戰)'이
가장 치열했던 1, 2년 동안 이창호는 한 해에 백 판 이상을 두어야 했다. 다시 말해 3일 걸러 한 판씩 둔
셈이다. 그때 그는 새로운 수를 수없이 두었다. 물론 이창호의 새로운 수는 옛 정석의 기초 위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모양은 보기에는 하찮은 것 같고 실패 가능성도 큰 것 같아 보이지만 이창호는
옛 정석을 재연구하여 용기 있게 시합에 쓸 줄 알았으며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창호가
더욱 용감하고 창조적인 기사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정석들이 재발견되어 더 깊이 연구되고 발전되는 데 이창호의
공이 크다. 현대 바둑에서의 이창호의 업적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국 바둑에는 새로운 기사, 새로운 연구, 새로운 정석이
부단히 생겨나는데 이것은 리더 이창호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일찍이 이창호가 두각을 나타내며 서봉수 선생을
이기고 조훈현 선생에게 도전하여 그에게서 우승을 빼앗기 시작했을 때 유창혁이라는 또 다른 새로운 별이 출현하며
바둑 애호가들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아마추어 기사 출신인 유창혁은 마르고 약해 보여 서생같지만 바둑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격형 기사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창호가 침묵하는 빙산이라면 유창혁은 한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창호와 유창혁의 기풍은 첨예하게 대립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유창혁은 이창호가 한국 바둑을 한손에 거머쥐고 있던 시기에 한국에서 규모가 크고 가장 크고 상금이 많은
왕위전을 틀어쥔 채 연속 3회나 지켜냈는데, 3회 모두 이창호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도 꿋꿋하게 버텨내어서 모든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들은 같은 문하생으로 나이가 비슷하여 바둑을 연마할 때면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그들이 격렬하게 싸우던 그 몇 년 동안 유창혁은 아직 미혼이었고 젊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서로
교류하며 지냈다.
우리는 여러 차례의 세계 대회를 거치면서 한국의 기사들은 시합이
끝나도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서 승패에 관계없이 함께 연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99년 일본에서
거행된 LG배 8강전에서 이창호는 마샤오춘을 반 집 차로 힘겹게 승리했는데, 그는 자신의 포석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시합이 끝난 후 이창호와 유창혁, 조훈현 선생, 최규병, 나이웨이는 식당
직원들이 청소를 다 끝마칠 때까지 함께 바둑을 연구하며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다른 기사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국 기사들은 바둑을 둘 때면 바둑에 관한 이야기만 한다. 우리는 예전에 바둑을 두면서
내일 날씨가 어떻다는 둥, 상하이에 또 무엇이 유행이라는 둥 다른 말들을 꺼내곤 했다.
우리가 막 한국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한국의 전문적인 분위기에 익숙지 않아서 아주 형편없는
바둑을 두었다. 우리가 이창호에게 가르침을 청하면 그는 언제나 공손하게 응했다. 때로는 진심 어린 칭찬까지
해주었다. "와, 장 선생님의 행보는 아주 좋은걸요." 이창호는 단이 낮은 기사가 바둑을 둘 때도 기보에 있는
것이기만 하면 금방 알아볼 정도로 사려 깊은 사람이다. 우리가 일본의 기보와 중국의 기보를 연구하고 있자면 그는
"이거 누가 둔 거죠? 내가 어떻게 못 봤지? 저 좀 보여주세요"라고 하기도 한다. 리더가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배우기를 좋아하니 한국 바둑계의 학습과 연구를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또 이창호의 바둑 두는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는
이창호가 바둑돌을 소리 나게 내려놓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원래 '탁'하고 소리 내며
놓는 것은 일본에서 전해진 것이다. 전에 내가 중국 국가대표팀에서 바둑을 둘 때에 대표나 코치는 항상 우리에게
바둑을 놓을 때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기력을 잘 나타내는 동작이라고 알고있다. 요다 노리모토는 바둑돌을 놓을
때 '탁' 소리가 나게 했고, 위기일발의 순간에는 소리 나게 내려놓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는 언제나 가볍게 놓고 조용히 둔다. 리더가 이러하니 한국의 젊은 기사들 가운데 소리를 내는 사람이
거의 드물다.
일본 기사가 바둑을 둘 때 종종 부채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일본 부채는
부채질을 하면 '파, 파, 파'하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그 부채 소리는 상대방의 집중력에 영향을 줄 수가
있다. 한국 기사는 바둑을 둘 때 부채질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한국 기사들은 상대방의 집중력에 방해를
주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고수들은 서로 격의 없이 빈번한 교류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기력도 빨리 발전하는 것 같다. 이 밖에 그들은 사심 없이 배우기를 좋아한다. 이창호는 몇
번이나 저우허양(周鶴洋)에게 졌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다거나 몸이 좋지 않아서 졌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기력에서 원인을 찾았으며 저우허양과의 시합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큰 시합이 끝났을 때 어떤 고수들은 다른 데서 패인을 찾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흐르면 그런 태도가 자신의 발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경험과
교훈을 잘 결론지을 줄 아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이창호, 유창혁 같은 고수에게서는
바둑을 깊이 사랑하는 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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