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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남철 9단, 한국 현대 바둑의 어버이

[한국] 조남철 9단, 한국 현대 바둑의 어버이

2005-05-08 오후 6:17:39 입력

 
영원한 국수 입신 조남철


1941년 가을 일본기원. 갓 프로가 된 18세 소년이 승단 대회에 처녀 출전합니다. 조선 출신인 소년의 이름은 조남철. 열전을 펼치던 수십 명의 동년배 초년병들이 점심시간을 알리는 벨 소리에 우루루 일어나 대국장을 빠져나갔습니다.

드넓은 홀 한가운데 소년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됐죠. 따사로운 햇살이, 식사를 마친 소년들의 떠들썩한 담소 소리와 함께 유리창을 넘어와 바둑판을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문득 고개를 쳐 든 소년의 눈자위가 붉게 물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도 모자라 자신의 입까지 틀어막은 채, 소년은 꺼이꺼이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습니다.

도일 유학 4년 째. 처음엔 밥 한 끼 함께 할 가까운 벗 하나 없다는 외로움뿐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결국 나라가 없어 생긴 일이란 데 생각이 미치자 설움이 폭발했던 거죠. 웬만해선 잘 울지 않는 조남철에게 그 것은 평생의 첫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1944년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 이듬해 해방을 맞습니다. 22세 청년으로 성장한 조남철은 본격적인 바둑 보급에 온 몸을 던집니다. 1950년 6월 20일, 갖은 고초 끝에 마련된 낙원동 대한기원에서 단위 결정 시합이 시작됐습니다.

은은히 들려오는 포성(砲聲) 속에서 대회는 27일까지 계속됩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조남철은 그제서야 가족들과 함께 피난에 나섰지만 이미 한강 다리는 폭파된 후였죠. 거리엔 붉은 마크의 탱크가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 온 조남철은 기원이 궁금해 견딜 수 없어 거리로 뛰쳐나옵니다. 목숨을 건 행동이었지만, 기원은 그에게 바로 목숨이었기 때문이죠. 회관은 치안대의 임시숙소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아아! 마구 내 팽겨 쳐지고 버려진 바둑판들…. 구석의 일본식 화로에선 더욱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검은 잿더미 속으로 흑 백 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을은 바둑알들이 파묻혀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바둑알을 몇 개 꺼내 옷으로 문질러 닦아보았습니다. 하얀 얼굴을 드러낸 채 비로소 미소 짓는 바둑알들. 조남철은 바둑알이 그렇게 예쁜 것인지 처음 깨달았다고 훗날 술회하죠.

바둑알들을 주섬주섬 꺼내 쌓으면서 조남철은 마침내 오열합니다. 어떻게 마련한 바둑알, 바둑판인데…. 시커먼 잿구덩이 속에서 바둑알을 꺼내는 작업은 그에겐 불에 타죽은 자식을 찾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았죠. 조남철의 평생 두 번째 울음, 그의 나이 27세 때였습니다.

피눈물 속에 바둑판과 알들을 얼추 추스린 조남철은 여명기 개척자 중의 한 분인 김명환(김재구 8단의 선친)의 도움을 받아 이 기물(棋物)들을 바둑계 유지에게 맡깁니다. 두 사람이 바둑판을 실은 리어카를 함께 밀고 끌며 옮기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1968년 관철동에 한국기원의 거대한 신축 건물이 들어섰을 때 조남철은 세 번 째 눈물을 뿌립니다. 1945년 한성기원으로 출범한지 22년, 부산 피난 시절을 포함해 무려 16번의 이사(移徙) 끝에 얻은 ‘내 집’에서 그는 축사를 하다가 기어이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 조남철 선생의 올해 연치(年齒)는 81세. 인생을 하루에 비유한다면 석양(夕陽)도 서산 너머로 숨고 땅거미가 깔리며 초저녁에 진입한 시점입니다. 바깥출입은 엄두도 못 내고 산소(酸素) 호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니까요. 최근엔 청력이 많이 떨어져 보청기 없이는 대화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 조선생의 지금 소원이 뭔지 아십니까.

“아직 단 한 가지의 소망이 남아있다. 프로와 아마가 동락(同樂)할 수 있는 바둑회관의 건립이다. 노욕이라 욕해도 좋다. 나는 이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눈을 감고 싶다.”

최근 한국기원서 출간한 [한국바둑의 대부/조남철 회고록 ]서문에서 선생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토록 한 평생을 오직 바둑에서 시작해 바둑으로 끝낸다는 게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인지…. 한국 바둑의 개척자란 사실에 앞서 이 같은 외길 정신이야말로 제가 선생을 존경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숱한 위인들이 배출됐지만 한눈팔지 않고 자기 분야에 완벽하게 투신했던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에게 바둑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신앙이자 종교였던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선생은 소위 팔방미인 형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둑 한 분야에서만은 그가 안 해본 일이라곤 없습니다. 한국 바둑의 유아기라고나 할 20세기 초 일본에 건너가 선진 문물을 전달한 선교사였고, 순장바둑에서 현대바둑으로 옮겨간 조타수(操舵手)였습니다.

완고한 노국수들을 설득해 단위 제도와 전문기사 제도를 뿌리내린 선각자였고, 빈손으로 한성기원 조선기원 한국기원으로 이어지는 토대를 마련했으니 보기 드문 경영인이기도 했죠. 최초의 바둑 책 ‘위기 개론’을 쓰고 용어(用語)를 정비한 문화인인가 하면 신문 기전을 개척한 행정가였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매력을 꼭 이런 업적에서 찾고 싶지는 않습니다. 휴매니티 넘치는 하나의 인간이란 점이 우선 사람을 잡아 끕니다. 회고록 도처에서 만나는 그의 에피소드들은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합니다. 조남철이 이끄는 조선기원과 옛 국수급 노장들을 배경으로 한 경성기원이 팽팽히 대립하던 시절 일화 하나. 대회 준비로 동분서주하던 조남철이 노국수 민중식(閔仲植)과 맞섰습니다. 몸살로 열이 펄펄 끓던 조남철은 리그전서 1패를 안았고, 노국수들의 암묵적 밀어주기에 힘입은 민중식은 전승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대국이 시작되자 민중식은 “술이 없으면 수가 안 보인다”며 소주를 꺼내놓고 마셨습니다. 상대 기세를 꺾으려는 의도였죠. 조남철은 냉수에 아스피린 두 알을 녹여 마신 뒤 필사적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더 이상은 정말 싸울 몸이 아니었건만, 노국수 들은 동률 재대국을 연기하자는 조선기원 측 요청을 일축했지요.

조남철은 혼미한 가운데서도 또 한번 승리, 기어이 주도권을 유지합니다. 그 승리에 힘입어 개혁 노선(?)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뜻이었는지도 모릅니다. 6.25가 터진 뒤 공사장 노동과 채소 장사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조남철에게 입대 영장이 날아들었습니다. 배웅 나온 아내는 12월의 삭풍을 맞으며 말없이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죠. “대마불사라고 당신도 들어봤지? 내가 곧 돌아오리다.”

농담으로 아내를 안심시킨 조남철은 허리춤에서 보퉁이 하나를 꺼내 내밉니다. 틈틈이 써 온 바둑 원고였죠. “혹시라도…내가 잘못되거든 꼭 책으로 내달라”며 그는 훈련장으로 향합니다.

압록강을 향해 북상할 당시 어느 전투에서 조남철은 왼쪽 팔과 오른 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후송되죠. “바둑은 둬야 하니까 오른 팔만은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평소에 빌었다. 기도가 효험을 본 셈이었다.” 회고록 속에서 조남철은 이렇게 말하며 파안대소합니다. 그는 6개월간 대구 육군병원에 입원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장경근 고재필 등 바둑계를 도와주던 군 고위층들과 얽힌 숱한 에피소드를 쏟아놓습니다.

요즘엔 일주일이 멀다하고 각국에서 국제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 역시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남철과 만나게 되죠. 해방 후 숱한 고난을 헤쳐가면서도 그는 언젠가 벌어질 세계 대회를 염두에 두고 준비해 나갔습니다.

대만과의 교류전을 위해 그는 평소 꾸준히 연락을 취했고, 1954년 마침내 한국 최초의 국제전이 타이페이에서 열렸습니다. 그 경비를 환전(換錢)하는 과정에서 저 유명한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대국이 이승만 당시 대통령 앞에서 치러지기도 했지요. 기도보국(棋道報國)의 일념으로 동분서주하던 조남철. 그는 어느 날 아내로부터 가슴이 내려앉는 충격적인 소리를 듣습니다. 빨래터에 나갔던 아내를 향해 이웃 아낙네가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하더라는 겁니다. “송연이 아빠(조남철)가 도박의 두목이라면서요?”

놀란 아내에게 이웃 여자는 “다들 그러던데요 뭐. 얼마 전엔 중국까지 가서 도박을 하고 왔다면서요?”하며 쐐기를 박았습니다. 눈물 그렁그렁한 아내를 보는 조남철의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그가 우리 바둑계를 일구고 씨 뿌리며 수확해 오면서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이 같은 주위의 시선이었을 겁니다.

모든 것이 ‘한국 1호’인 조남철이 9단 승단만큼은 조훈현보다 늦었지만 여기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후배들과의 실력차이가 워낙 많이 나자 승단을 기피했던 거죠. “아직 몇 판 더 이겨야 승단”이란 직원의 말을 믿고 이겼는데, “계산을 잘못했다. 승단하셨다”는 바람에 7단에서 8단이 된 조남철입니다. 8단에서 9단으로 오르는데 20년이 걸린 것도 뭔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회고록은 본인이 직접 쓰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그렇지 못했던 건 건강 때문이었죠. 회고록은 월간 ‘바둑’지에 만 3년간 연재됐으며 한국기원 홍보실 양형모 팀장이 선생의 구술(口述)을 받아 소설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취재 초기 무렵만 해도 주요 장소를 찾아 함께 따라나섰던 선생은 이듬해부터 산소 호스를 착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거실 구석에 놓인 산소통과 5~6미터짜리 줄로 연결된 산소 호스가 선생의 삶을 이어주는 생명선이라니 참으로 비감할 뿐입니다.

50대에 폐기종 수술을 받은 선생은 작년에야 60년 경력의 담배를 끊었습니다. 어지간한 애연가였고, 또 어지간히 상태가 나빠졌음이 느껴지네요. 초기 취재 때 그토록 또렷하던 기억을 후반부엔 거의 메모 자료에 의존해야 했다지요.

그러나 선생은 잡지에 실리기 전 원고를 반드시 보여 달라고 요청했고, 날자와 이름 등 잘 못된 곳을 바로잡아 줄 만큼 꼼꼼했습니다. 어떤 때는 이미 나간 잡지의 한 부분을 오려놓고 “이게 틀렸더라구”하며 웃으시더랍니다.

지주(支柱)가 소중한 시대입니다. 국부(國父), 대가(大家), 거장(巨匠), 비조(鼻祖), 마이스터, 태두(泰斗)…이런 존재의 유무는 그 세계의 흥망을 좌우합니다. 처칠 워싱턴 드골 손문(孫文), 또 베토벤 셰익스피어 괴테 엘리어트 톨스토이 이태백 미켈란젤로 세잔, 그리고 뉴턴 파블로 다윈 아인슈타인 플라톤 칸트 데카르트…. 이 분들이 없었다면 인류 역사도 수 백 년은 늦춰지지 않았겠습니까?


중국 바둑계가 요즘 때 아니게 ‘오청원 우상화’에 열중하고 있는 현상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선생을 일본 바둑의 일원으로 간주해 온 중국의 이 같은 태도 변화는 말 할 것도 없이 바둑 발상국의 체통을 되찾기 위함입니다. 지난 가을 촬영에 들어간 영화 ‘우칭위안’은 오랜 준비 기간과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거작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일본 역시 지난여름 바둑 ‘명예의 전당’을 만들고 첫 헌액 멤버로 도쿠가와(德川家康) 등 4명을 선정했죠. 세계 최강을 외치고 있는 한국은 어땠나요? 외국의 그같은 움직임들이 그저 ‘흥미로운 해외뉴스’로만 머물러 왔습니다.


“들여다봐야 헛거여! 조남철이가 와도 못 산다니께….” 노인들은 바둑을 두다가 이렇게 외치곤 했죠. 언젠가부터 조남철이 조훈현이되고 다시 이창호로 바뀌었습니다만, 불과 20년 전만해도 우리 서민들에게 바둑은 곧 조남철이고 조남철은 곧 바둑이었습니다. 그런 선생의 존재를 뒤늦게나마 깨달아 자서전이 출판되고 다큐멘터리도 제작도 시작한다니, 죄 없는(?) 저부터 신부님 앞에 돌아와 선 탕아처럼 약간은 떳떳해 지는군요.


다큐멘터리 기획안을 방송위원회에 제출, 우수 컨텐츠 선정과 함게 지원금을 받게 된 케이블 TV ‘바둑채널’은 이 역사(歷史)적 역사(役事)에 크게 고무된 듯 의욕적인 자세로 벌써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기다니(木谷實) 도장을 비롯해 일본과 중국 현지 촬영에도 나서고, 생생한 인터뷰와 대역(代役) 재연까지 동원한다니 신년 벽두 개국 1주년 특집 방송이 자못 기대되는군요.


1994년 71세 때 세계 최고령 본선(18기 국기전) 기록을 세운 뒤 1999년 4월 제4회 LG배 세계기왕전 예선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난 조남철. 하지만 일제와 전화(戰禍) 속에서 ‘노름 왕초’ 소리까지 들어가며, 온갖 고초 속에 한낱 사랑방 소일거리였던 바둑을 동호 인구 1000만명의 융성으로 이끈 그의 외길 기도(棋道) 정신은 영원히 살아 숨쉴 것입니다. 부디 선생이 건강을 되찾아 장수(長壽)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이홍렬 / 조선일보 바둑 전문기자 겸 LG배 세계기왕전 관전필자

 

조남철 선생을 회고하며

업글중

[i진선 한 마디]

 

조남철 선생님 건강이 걱정되어서,

 

오늘 어버이 날이기도하여...제가 모아두엇던 

자료를 기사화 했습니다.

 

정말 오늘 같은 날에 딱 맞는 아주 훌륭한 글 이지요?

 

윗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조남철 선생님은

 

한국 바둑의 영원한 거목이시죠.

 

또한 한국 현대 바둑의 어버이이시기도 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업글하겠습니다.

TYGEM / i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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