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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내가 아는
형제
베이징(北京)에서 이영호 씨를 만났다. 영호 씨? 쓰고 보니 어쩐지 좀 징그럽다. 실은
5,6년 전
몇 개월간 같은 직장에 몸을 담은 인연도 있고 나이도 제법 차이가 나서 평소에는 ‘영호’라고
부른다. 그래도 필자 대접을 해드려야 할 점잖은 지면이니까.
이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가 바둑 주간지 편집국장을 맡고 있던 시절이라
‘국장님’으로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고 직장이 바뀌어도 그때의 호칭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아마도
사람들은 첫 대면의 인상이나 호칭을 가장 강하게 기억하는 것 같다.
글을 써달라. 글쎄, 무엇을 써줘야 할까. 흔한 말로 ‘그까이꺼!’ 하고 대답은 시원하게 해줬
는데 적잖이 고민이다. 이미 중국에서는 ‘워더 꺼거 리창하오(我的 哥哥 李昌鎬)’라는 책이
출간됐다. 몇 개월 전 영호 씨로부터 이창호 홈페이지에 실린 칼럼을 묶어 책으로 낼 것이
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어떤 내용인지도 안다. 요란한 수식어를 동원한 추천사를 원하는
것도 아닐 테고 진솔한 이창호 이야기에 덧칠이 필요할 이유도 없다. 결국, 이들 형제와의
첫 만남 그 작은 인연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것이 손종수가 쓸 수 있는, 이 책에 가장 어울
리는 글일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내가 아는 이창호
1991년
2월 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층 아테네가든. 점심 휴식 시간이 12시 30분부터
1시 10분까지였으니 12시 50분에서 1시 사이였을 것이다. 대국장 옆에 바깥 정원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쾌적한 휴게실이 있었는데 막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가 창가에 서서 정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격전장을 벗어나
승부를 잊고 바깥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그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심이 솟구쳤다. 카메라를 들이밀고 렌즈의 초점을 맞추려는 순간 그가 돌아
섰다. 그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의 눈 주위로 잔물결 같은 경련이 일어났다. 결코,
휴식을 방해했다는 노여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휴식 시간이고 대국이 재개될 때까지는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불쑥
열고 들어왔다. 상대는 나이가 나보다 두 배쯤 많은 기자. 잠시 혼자 있게 해달라는 말을
어떻게 할까. 짧은 시간이지만 혼자만의 공간을 지키려면 상대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 한다. 찰나에 뇌리를 스치는 이런저런 갈등이 눈가의 경련으로 드러난 것이다. 노여움이
아니라고 단정지은 이유는 이어진 작은 목소리 때문이다.
"저…… 죄송하지만 혼자 있고 싶은데요." 솔직히 당황했었다.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물러난
기자의 상상처럼, 잠시 격전장을 벗어나 바깥 경치를 감상하는 승부사의 여유 따윈 애초에
없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입단 5년차 15세의 신예지만 엄연한 한국 바둑의 정상.
그 내면에는 ‘한국의 대표 기사로서 일본의 신인왕쯤은 반드시 꺾어줘야 한다’는 격랑이
들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드시!’라는 의지가 강하면 그 압박감도 따라서 커지는 법.
그는 그 시간, 누구에게도 내비치지 못하고 홀로 한일 간의 자존심이 걸린 특별한 승부가
주는 극도의 긴장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창호와의 첫 만남이었다. 오래전에 썼던 칼럼의 한 장면을 옮긴 이유는 ‘눈에 비친
외면의 현상과 내면의 진실은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입단 초기부터 5,6년쯤 이창호는
바둑 저널로부터 ‘어둡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중앙일보에 왕위전 관전기를 집필하던 소설가
김성동 씨도 ‘이창호의 바둑에서는 흑도(黑道)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쾌도난마(快刀亂麻)로 천하를 제패한 스승 조훈현과는 전혀 다른, 두텁고 느린 행마와 툭툭
던지는 응수타진 비슷한 새로운 수법들이 안개처럼 모호한 데다 대국이 끝나도 그 선악에
대해서 속시원히 말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바둑판 위의 현상만으로 내려진 평판. 이창호는 원래가 조심스
럽고 사려 깊은 사람이다. 이창호는 바둑도, 성격도 두터운 껍질 속에 부드러운 속살을 가진
갑각류(甲殼類)다. 타고난 성품이 그렇고 프로 입문의 길로 이끌어준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과 당대 최고의 승부사 조훈현과 때이른 사제의 연을 맺게 된 환경의 여러 조건
들이 그런 성품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조심스러운 성격이 프로 입문 이후 나이차가 아버지쯤 되는
선배 기사들과의
승부를 통해서 더욱 조심스럽게 바뀌었다. 생각해 보라. 대부분 승자의 처지였을 국후 감상
에서 마주 앉은 어른이 ‘여기서 이렇게 두었더라면 내가 나쁘지 않았을 텐데……. 네 생각은
어떠냐?’라고 묻는데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두시면 이렇게 받는 수가
있거든요. 그 이전에 저기서 이렇게 저렇게 두셔야 했어요. 여기서부터는 어떻게 해도 질 수밖
에 없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은 같지 않은데 ‘그렇지 않냐’고 물어오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패자의 정서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선한 마음, 어른들의 말에 반박하지 않으려는 공손함 또는 반박해야 하는 어려움의
갈등 앞에서 나름으로 찾아낸 최선이었을 것이다. 이창호는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 같은, 나이가
어린 신진 기예들이 대거 정상권으로 진입한 이후에야 그 두터운 껍질을 벗어 던질 수 있었다.
비로소 제 나이를 찾았다고 할까. 요즈음 후배들이 아는 이창호는 말이 없고 가까이 다가서기
어려운 음습한 사람이 아니다. ‘시간만 되면 언제든 밥도 사고, 술도 사고 잘 놀아주는 만만한
선배’다.
이창호의 독서 습관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창호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씹어먹듯, 아니 초식동물이 되새김질을 하며 소화시키듯 천천히 책을 읽는다. 하긴, 책을
읽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빠르게, 좀 더 빠르게’를 외치는 이 시대에 홀로 태연히 느리고
두터운 발걸음으로 정상에 올라선 사람이 바로 이창호다. 그가 쌓은 기록의 금자탑은 그 두터운
생활의 연장일 뿐이다.
담박명지(澹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
마음이 깨끗해야 뜻을 밝게 가질 수 있고 안정된
고요한 마음가짐이라야 원대한 포부를 이룰
수 있다던가. 이 말은 제갈무후(諸葛武侯) 계자서(戒子書) 중에서 발췌돼 널리 인용되고 있는
명문이다. 바둑에 관한 한 이창호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내가 아는
이영호
5년 전 나의 뇌리에 새겨진 그의 첫인상은 팬더곰이었다. 얼굴도 둥글고 몸도 둥글고 이런,
가까이 대하고 보니 마음도 둥근 친구. 언젠가 ‘20대 초반에 이런 물렁살이!’라며 배를 손가락
으로 쿡 찔러보고는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부잣집 도련님(전주에서도 유명짜하다는 이시계점의 아들, 설명이 필요
없는 이창호의 동생
이란 건 알고 있었으니까)들이 흔히 그렇듯 운동도 안 하고 그저 엄마, 아빠가 챙겨주는 맛난
것만 넙죽넙죽 받아먹어 그렇게 됐으려니 짐작했는데 그 ‘토실토실’이 온통 근육이었다니.
이시계점의 아이들은 남자로만 삼형제다. 초등학교 무렵의 꼬마들이 흔히 그렇듯 사내아이들
끼리 모여 있으면 형제간의 놀이라도 여간 극성맞은 게 아니다. 둘째 창호, 셋째 영호는 그런
놀이에서 맏이 광호에게 어지간히도 얻어맞았던 모양이다. 언젠가 ‘왜 그렇게 토실토실한
근육(?)이 생겼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형제끼리 전쟁놀이를 하면 주로 저랑 창호 형이
힘을 합해서 광호 형에게 대항하곤 했어요.
거 왜 한참 클 때는 1년 차이에도 체격이 다르고 힘이 세잖아요. 혼자서는 도저히 맞설 수가
없었죠. 그런데 창호 형이 바둑을 배운다고 서울로 훌쩍 가버린 거예요. 어린 마음에도 앞날
이(?) 캄캄했죠.”
그때부터 태권도를 배우고 닥치는 대로 운동을 했다고 한다. 한참 자랄 나이에 먹성이
좋으니
키가 부쩍부쩍 자라고 살도 찌는 게 당연한데 목숨 걸고(?) 운동까지 하니 근육 같은 살이 붙게
된 것이라고. 하, 그 참 별난 사연도 다 있다. 태권도 유단자가 된 이후 형의 압제에서 벗어
났다고 하는데 글쎄, 그래서라기보다 형이 진학도 하고 철들 나이가 되어 동생을 힘으로 누르며
우쭐거리는 재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그때 전횡을 일삼던 큰형은 지금 실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다).
아무튼 이 친구는 형하곤 모든 면에서 달랐다. 적당히 다른 게 아니라 ‘어쩌면
형제라면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정반대였다. 우선, 체격부터가 확연히 다르고 서글서글하니
붙임성 있는 성격이 크게 달랐다.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도 아무 거리낌 없이 금세 친해졌다. 그런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이 친구는 장사를 하면 절대 망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날인가 “손 국장님,
저 중국 가요.”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훌쩍 베이징으로 떠나버
리더니 삼 년 만에 어엿한 사장님으로 변신했다. 비록 호프집을 겸한 자그마한 식당이지만 ‘음식
맛 하나는 인근에서 손꼽아준다’며 자랑이 대단하다. 베이징에서 만난 영호 씨는 두 가지로 나를
놀라게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에게 용돈을 타 쓰며 취업 걱정을 해야 할 나이에 집안의
별다른 지원도 없이 타국에서 자립을, 그것도 음식점을 개업한 수완과 배짱. 물론, 훗날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름의 준비도 많았고 고생도 할 만큼 했는데 그런 사정을 모두 감안한다고
해도, 그저 원고지나 채워 밥을 해결하는 재주밖에 없는 나로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또
하나는 언제 그렇게 공부를 했는지 현지인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탁월한 언어
구사
능력이다. 중국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보려면 전화를 할 때나 현지인과 대화를 할 때 ‘네거~,
네거~(우리 말로 하면 대화 중 필수 양념인 아, 저, 그에 해당한다)’란 단어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많이 쓰는지를 보면 된다. 그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중국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 베이징의 중국
친구들은 그를 ‘쭈빠지에(저팔계)’라고 부르며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팬더곰이 엽기돼지로
변신을?).
더욱 대단한 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영호 씨를 ‘이창호의 동생’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영호
를 알고 보니 그의 형이 이창호였더라’는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바둑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명사 대접을 받는 형의 후광 없이 스스로 일어섰다는
것만으로도 자랑할 만한데 이창호 9단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중국 원정 때면 그림자
처럼 따라붙는다. 통역은 기본이고 숙식과 이동은 물론, 사소한 신변 문제까지 전담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매니저가 없다.
그러고 보니 이들
형제가 꼭 닮은 면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복제할 수 없는 피물림인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근면함과 성실함, 그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지속력이다.
‘이제 베이징에는 이창호보다 이영호와 더 가까운 프로 기사가 많다’는 중국 친구들의 말을
생각하면 소설 상도(商道)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거상 임상옥이 말년에 깨달은
진리라던가. 이 책의 성공과 더불어 영호 씨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2005년 12월
손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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