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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바둑, 스포츠화 되어도 문제다.

[칼럼] 바둑, 스포츠화 되어도 문제다.

2005-11-28 오후 8:14:36 입력

문용직 선생님과 박영배 논설위원님께서 바둑의 스포츠화를

걱정하시는 유사한 내용의 칼럼을 써주셨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뭘로 정할까 고심하다가,

[바둑, 스포츠화 되어도 문제다.]

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꾸벅

 

[바둑 한수] 바둑이라는 이름만이 남는가

[국민일보 2005-11-24 15:35]

바둑은 무엇으로 남는가. 두어진 기보만으로 남는가. 아니다. 바둑은 두는 행위,그 점을 떠나서 이뤄지지 않는다. 관전자의 감상을 떠날 수도 없기에 관전자의 이해와 대국자의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 의미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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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계대회나 국내대회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기전은 두어진 반상만이 존재하는 경향이 강하다. 바둑의 세계를 다양하게 구성하는 구상력은 사라지고 승부의 결과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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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향 속에서 관전자는 물론이고 대국자도 결과만을 볼 뿐 바둑을 구성하는 폭넓은 세계를 보지 못한다. 세상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바둑은 더 멀리,더 빨리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쪽으로만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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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둑은 스포츠처럼 ‘더 빨리,더 멀리’라는 한계를 시험해서는 안 된다. 바둑은 대국자에게도 관전자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것이 생명이다. 격렬한 승부만이 존재하는 반상에서 우리는 다채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없다. 급류로 굽이치는 반상 위에서는 대상을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대할 수가 없다. 바라보는 행위 그 자체도 의식하지 못하며 흘러가는 물결 또한 바라보지 못한다. 단지 순식간에 흘러갈 뿐이다. 남는 것은 무엇인가. 흘러갔다. 그 한 마디. 그러나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흘러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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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화상을 먼저 그리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세상만이 남을 뿐 나는 존재하지 않을 위험이 있다. 그렇다. 바둑은 사라지고 바둑이라는 이름만이 남을 수 있다. 행위,반복되는 의미 없는 행위만이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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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보는 속기 바둑 결승국. 백1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급박한 한 수. 속기이니 저 수에 대해서 대국자는 얼마만큼 생각했을까. 생각하는 그 과정과 내용과 바라보는 우리를 우리는 얼마나 음미할 수 있는가. 물론 백1은 의외로 만만찮은 급소이며 호수(好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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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한바둑협회가 창립된다. 대한체육회 준가맹 가입을 위해서다. 이제 한국기원은 프로를 관장하고 아마추어는 대한바둑협회가 관장한다고 한다. 바둑이라는 세계가 더 빨리,더 멀리에만 관심이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결과만 있을 뿐 감상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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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직[프로 5단]

 

[천자칼럼] 스포츠 바둑

[한국경제 2005-11-28 17:23]

지난 2001년 9월,한국기원에서는 '바둑을 체육으로 전환시키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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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불과 보름 만에 서명은 완료됐다.

이를 계기로 대한체육회는 다음 해 바둑을 스포츠로 인정했고, 바둑기사들의 호칭도 운동선수처럼 선수로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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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이 스포츠인가?" 지금도 계속되는 논쟁이다.

특히 체육계에서는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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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란 근육과 골격운동을 중심으로 그 안에 '경쟁'과 '유희성'이 있어야 하는데,바둑의 경우는 두뇌운동에 의한 합리적 선택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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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두뇌 스포츠는 시기상조라는 얘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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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두고 바둑계에서는 스포츠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스포츠의 신체동작은 정신과 분리되기는커녕 오히려 고도의 정신기능과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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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心)과 육체(身)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본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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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궁이나 사격에서 강인한 정신력이 더욱 강조되고,축구와 농구선수가 머릿속으로 거리를 계산하면서 볼을 차고 던지는 것 등이 그렇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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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작용이 없다면 로봇에 다름아니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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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추세를 반영하듯,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두뇌게임의 일종인 '브리지'를 이미 겨울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지정했고,바둑과 체스의 경우도 요건이 충족되면 올림픽종목에 넣을 수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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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별 바둑협회가 66개에 달해 오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정식정목으로 채택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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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대한바둑협회'가 창립되면서 '바둑은 곧 스포츠'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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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는 12월 중순에 열리는 대한체육회이사회에 준가맹단체 신청서도 제출해 스포츠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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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의 바둑실력을 자랑하면서 바둑인구만도 1000만명에 육박하는 한국이 두뇌 스포츠의 강자로 부상할 날도 멀지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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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

[i진선 한 마디]

 

바둑은 스포츠처럼 ‘더 빨리,더 멀리’라는 한계를 시험해서는 안 된다.

 

문용직 5단의 윗 말에는 공감합니다.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과연 스포츠화된 바둑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명국은 사라지고, 통쾌한 바둑만 난무할 것 아닌가...말하자면 베틀 바둑만 된다는

우려가 있는 것 이지요.

 

바둑판이 베틀화된다면 나이든 프로들은 무척 힘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즘 판에도 나이든 프로의 실직화가 가시화되는 판에 스포츠화 베틀 바둑이

본격적으로 시행된다면, 시대적 조류를 따라가지 못하는 프로들은 사실상 퇴출될

것이 눈에 보입니다.

 

요즘에 여러가지 속상한 일들이 많아서 음악 같이 올렸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마찬가지 일 것 입니다.

한국 사회는 서로 잘 모를때 관용적으로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쌈 부터 하고 봅니다. 그것 때문에 나중에 정들지 더 가까와지는 지는 잘

모르겠구요... 정말 이런 모습 하도 빈번히 보니 무척 피곤합니다.

 

나중에 풀면 다 인가요. 지금 화나고 피곤한데.

 

업글 중 입니다. 

 

ijinsun http://memolog.blog.naver.com/ijinsun/1
출처 : 에-셋
♪~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이 세상은 나로 인해 아름다운데 ~♬

 

 

칵테일 사랑 / 마로니에

 

 

 

 

 

 

 

 

 

 

 

 

 

 

 

 

 

 

 

 

 

칵테일 사랑 / 마로니에

 

마음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파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그 음악을 내 귓가에 속삭여주며

아침햇살 눈부심에 나를 깨워 줄

그런 연인이 내게 있으면

 

나는 아직 순수함을 느끼고 싶어

어느작은 우체국앞 계단에 앉아 

프리지아 꽃향기를 내게 안겨줄

그런 연인을 만나봤으면

 

창문에는 우울한 비가 내리고 있어

내 마음도 그 비 따라 우울해지네

누가 내게 눈부신 사랑을 가져줄까

이 세상은 나로 인해 아름다운데


칵테일 사랑 (아카펠라) - 마로니에

 

 

 

 

12년만에 첫 고국 콘서트 연 ‘칵테일 사랑’의 가수 신윤미

[레이디경향 2005-11-09 00:41]

“혈혈단신으로 힘들게 지낸 미국 생활…남편을 만난 건 운명이었죠”

 

1990년대 히트곡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을 부른 가수 신윤미.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과 해야 하는 음악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녀는 애틋한 동포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그토록 원하는 노래를 찾았다. 그리고 12년 만에 첫 고국 콘서트를 위해 귀국한 신유미와 나눈 프라이빗 인터뷰.

 

‘칵테일 사랑’ 립싱크 사건 다룬 재판에서 승소

 

‘마음 울적한 날에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마로니에가 부른 ‘칵테일 사랑’은 11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귀에 익숙하다. 그리고 립싱크 사건으로 유명한 노래로 기억된다. ‘칵테일 사랑’이 히트할 당시 마로니에 여자 멤버가 립싱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노래를 부른 가수와 무대에 선 여가수가 달랐다는 이야기. 노래를 부른 가수는 신윤미(41)다. 신윤미는 이화여대에서 작곡을 전공, 1987년 직접 MBC대학가요제에서 ‘겨울비’란 곡으로 금상을 수상하여 가수로 데뷔했다. 그 뒤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고, 수많은 가수의 코러스 작업과 CM송 작업에 참여했다.

 

당시 ‘칵테일 사랑’의 립싱크 사건은 법적 공방까지 이어졌는데,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1993년 ‘칵테일 사랑’의 녹음 작업을 끝내고 신윤미는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떠났다. 그 뒤 한국에서 데모 음반이 나왔고, 음반 기획자들이 홍보를 위해 방송국 PD들에게 앨범을 돌렸다. 그런데 예상외로 좋은 반응을 얻었고, 방송국에서는 가수의 출연을 재촉했다. 신윤미가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떠난 상태에서 기획사 측도 당황했고, 하는 수 없이 립싱크를 선택하기에 이른 것. 립싱크 여가수가 참여한 ‘칵테일 사랑’이 방송을 타자마자 인기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미국에 있을 때 선배 가수의 전화를 받았어요. 제가 부른 것 같은 노래가 TV에서 나온다며 한번 확인을 해보래요. 들어보니 제 노래가 맞더라구요. 레코드사에 전화를 걸어 다른 것은 바라지 않고 앨범에 제 이름 ‘신윤미’만 넣어달라고 했어요. 음반엔 가수 이름이 마로니에로만 나와 있었거든요. 그러나 기획사 쪽에서는 자신들이 거짓말한 게 탄로나는 거니까 머뭇거리더라구요. 그런 상태에서 6개월이 지났고, 노래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며 더욱 상승가도를 탔죠. 더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 소송을 하게 됐어요.”

 

소송은 그녀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었지만 많은 사람은 ‘노래가 뜨니까 한몫 잡으려는 거 아니냐’고 비난의 화살을 던졌고, 동료 가수들은 ‘가수가 어떻게 레코드사를 상대로 소송해서 이길 수 있겠냐”며 포기하라고 했다. 여러모로 쉽지 않은 소송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승소했다. 당시 그녀의 재판 기록은 가수가 제작사를 이긴 유일한 판례가 됐고, 음악저작권협회의 모범이 됐다. 그녀는 재판을 치르면서 이 나라에서 가수로 산다는 게 얼마나 열악한 상황인지 실감했다고 한다.

 

한때 ‘잠적’이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로 신윤미의 미국행은 급작스러웠다.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건 음악적 욕심 때문이다. 그녀는 가수로서 하고 싶은 음악과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 사이에서 심하게 갈등했다. 그녀는 가수로 활동하면서 꼭두각시가 된 느낌이었단다. ‘대중적으로 살아 숨쉬는 음악, 시대나 사회를 반영한 음악’을 하고 싶던 그녀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노래보다 ‘양심적인 노래’를 하고 싶었다. 그러한 가운데 그녀는 몇몇 무대에 서면서 결단을 내리게 된다.

 

“자폐아들이 있는 곳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아이들이 좋아서 박수를 치고, 사지를 뒤틀어 ‘으~ 아’라고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면서 음악이란 저런 게 아닐까, 온몸으로 자신이 나를 표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번은 공장 노동자와 철거민들 앞에서 노래를 했는데 손뼉을 치며 음악에 동화되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 같았어요. 그걸 보면서 자신이 부끄러워졌어요. 저런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음악적으로 더 순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에….”

 

미국행을 결심한 그녀는 조금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했단다. 미국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누가 자신을 기억해줄까라는 생각 때문. 하지만 그곳에서 많은 일을 겪고 치열하게 고민한 뒤 돌아왔을 때 발전한 모습이라면 누군가는 기억해줄 것이라 믿으며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미국 생활 2년 만에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된 사연

 

미국에서 당분간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랭귀지스쿨에서 영어를 배우고 뮤지컬을 보면서 가수가 아닌 평범하게 지냈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원봉사 활동을 하기 시작한 신윤미. 그녀는 미국 내 소수민족의 권리 옹호를 위한 단체에서 활동했다. 많은 이의 팍팍한 삶을 들여다보게 됐고, 그러면서 그녀의 사고방식이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에는 꾸미지 않는 여자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자기 개발 없이 희생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의심하려 했어요. 하지만 미국에서 열심히 일하는 동포들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어요. 한번은 버스를 탔는데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남루한 옷차림에 손에는 직업이 캐셔임을 짐작케 하는 검은 때를 묻힌 채 피곤한 모습으로 자고 있더라구요. 삶의 무게를 짊어진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집에 모셔가 따뜻한 된장찌개라도 끓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녀는 자원봉사 활동 일환으로 영어를 하지 못하는 한인들을 위해 영문으로 편지를 써주는 일을 했다. 그로 인해 동포들의 애틋한 사연을 많이 접하게 됐고, 그러면서 동포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은 지 2년 만에 그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음악을 찾게 됐다. 그때부터 손에서 음악을 놓지 않은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무대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미국에서 두 장의 앨범을 냈고, 또 매년 한 번씩 콘서트를 연다.

 

“1994년 LA에서 흑인 폭동이 있었잖아요. 자신이 순수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민자가 너무 많다, 이민자들이 사회에서 주는 보상금을 너무 많이 타간다, 이민자에게 들어가는 돈을 줄여서 미국인에게 쓰자라는 골조의 개혁안을 냈어요. 안건이 상·하원 의회에서 통과하고 대통령사인만 남겨둔 상태였는데, 그때 제가 미주 7개 도시를 돌면서 노래 운동을 펼쳤어요. 이민자로 인해 미국의 일자리가 더 많아진 사실을 알리고, 소수민족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것이었어요.

 

뉴욕 맨해튼 경우도 한국 사람들이 들어가서 경제를 살린 경우거든요. 한인들이 세금도 착실히 냈구요. 공연 수익금 5만불로 제가 워싱턴 포스트지에 소수민족 권리에 대한 내용의 광고를 냈어요. 또 클린턴 대통령에게 이민자들의 서명 내용을 전달했구요. 결국 클린턴이 개혁안을 거부해서 국회 통과가 안 됐어요. 소수민족이 승리한 거죠.”

 

그녀는 뉴욕 라디오 코리아에서 ‘신윤미의 노래세상’을 진행하고 있다. 라디오 방송의 상황이 열악하다 보니 작가와 PD가 따로 없이 그녀가 직접 글을 쓰고 음악 틀을 짠다. 하지만 사람들과 좀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그녀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한다. 사연을 바탕으로 그녀가 직접 노래를 만들어주는 코너가 있는데 잊지 못할 일이 많다.

 

한번은 영주권을 받지 못해 10년간 불법 체류를 하게 된 아주머니의 사연이 방송국으로 배달됐다. 가슴 아파하는 부모님 때문에 아주머니는 전화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고, 영주권 취득 문제도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만이라도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중 신윤미는 부녀의 전화통화를 연결하게 됐는데 그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고 한다. 그들의 사연을 토대로 신윤미가 직접 만든 노래를 들려주는 동안에도 늙은 아버지는 “딸이요? 우리 혜련이요? 우리 혜련이 좀 보내주세요.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흐느끼기만 했다고. 방송을 들은 많은 동포들도 함께 울었다.

 

그 뒤 아주머니가 어렵게 영주권을 얻어 한국으로 갔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그녀가 너무 큰 상처를 받을까 봐 알리지 않은 것. 그녀에게 방송중 들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마지막 육성이 된 것이다.

 

“동포들의 이야기로 음악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그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것, 제가 진정으로 원하던 음악이란 이런 거구나 강하게 느껴요. 그리고 행복하구요. 예전 한국 노동자들 앞에서 노래 불렀을 때 그 사람들의 삶을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조금 다른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똑같은 노래를 부르더라도 마음이 중요하잖아요. ‘나는 가수, 저 사람은 노래 듣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으로 노래를 불렀다면 훨씬 따뜻한 노래를 불렀을 것 같아요. 예전엔 일종의 교만 같은 게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구요. 이제는 진솔한 마음을 담아 노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과의 운명적인 만남

 

노래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으로 족하고, 돈은 일해서 벌 생각이라는 신윤미. 그녀는 뉴욕 ‘애플 프로덕션’의 대표로 광고 기획을 한다. 그녀는 한국에서 MBC-TV 제작부 음악감독으로 일했고, ‘주부가요열창’ ‘우정의 무대’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등의 프로그램을 맡았다. 또 그녀가 10년 동안 만든 CM송이 90개가 넘는데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녀는 우리의 70, 80년대 분위기의 한인사회 광고 시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애플 프로덕션은 이제 미국 큰 회사의 광고들을 작업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미국 생활이 언제나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그녀는 공연 이벤트 기획 건으로 한국에 온 적이 있는데 큰 손해를 봤다. 계약료를 한화로 받기로 했는데 IMF가 터진 것. 1달러에 8백원 하던 것이 천8백원까지 올라가 그녀는 심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고, 한 회사의 사장으로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특히 그녀는 미국 생활 초기에 돈 때문에 힘들던 기억이 많다.

 

“지하철 탈 동전 하나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손에 꼭 쥐고 또 그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 적이 있어요.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그것밖에 없고, 만약 잃어버리면 너무 먼 길을 걸어가야 했거든요. 얼마나 꽉 쥐었는지 나중에 손이 잘 안 펴지는 거예요. 겨우 손을 펴서 보니까 손금에 꼬질꼬질하게 동전 때가 끼어 있더라구요. 그때가 또 여름이었거든요. 또 한번은 일주일 치 장을 봐서 집에 들어갔는데 룸메이트들이 그 음식을 하루 만에 다 먹어치운 거예요. 얼마나 허탈하던지 식탁에서 앉아 울기도 했어요. 지금은 추억이 됐지만 재미있는데 그땐 무척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런 것들 겪었기 때문에 제가 사람들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미국에 사는 동안 그녀는 가장 슬픈 일 하나와 기쁜 일 하나를 겪었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평생의 반려자를 운명처럼 만난 것이다. 대학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상심해 계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대학가요제에 나간 그녀. 모든 딸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러하듯 그녀에게도 어머니는 평생 투정부릴 수 있는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그녀는 어머니가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했다.

 

“제가 한국에서 가수로 활동할 때 엄마가 그러더라구요. 남들에게 당신의 딸이 가수라고 얘기하면 딸 노래 한번 불러보라고 하는데 자신은 부를 수가 없다구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제가 엄마 위해 노래를 하나 만들었는데 못 듣고 가셨어요. 병원에 혼수상태로 누워 계셨을 때 노래를 들려드렸는데 우시더라구요. 전 엄마가 노래를 듣고 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사가 자연적으로 나오는 눈물이라고 하더라구요. 엄마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그녀는 잠시 귀국을 고민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임종할 때 옆에 있어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 아팠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미국에 남아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너무 많은 것이 빨리 변해가는 한국과 이전에 함께 노래하던 가수들이 아무런 소식 없이 지내는 것을 보며 자신이 한국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있으니 뭐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신중하게 한국행을 고려하던 차에 남편 김인섭씨(54)을 만났다.

그는 예전에는 펀드 매니저로 활동했으며, 현재 IT 회사에서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남편은 그녀의 오랜 팬이었다. 하루는 김인섭씨가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고 그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척 따뜻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단다. 길을 걷다가 동시에 비틀스 노래를 부르는 등 텔레파시가 잘 통했고, 그녀와 비슷한 점도 많았다.

 

“이 사람 만나면서 천생연분이라는 느낌, 꿈에서 엄마가 보내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사람 만나기 3일 전 꿈을 꿨는데 제가 어떤 남자를 만나 포옹을 했어요. 그 느낌이 너무 따뜻하고 행복했는데 깨어나서도 잊혀지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이 사람 헤어지면서 인사로 포옹을 하는데 꿈의 그 느낌인 거예요. 소름이 쫙 끼치더라구요. 결혼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은 저보다 더 젊게 사는 사람이어서 좋구요, 또 저를 많이 배려해주고 도와줘요. 이제 그 사람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예요. 이번에도 저와 함께 휴가를 내서 한국에 온 거구요.”

 

신윤미의 이번 한국 방문은 좀 특별하다. 12년 만에 첫 고국 콘서트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인터넷 카페를 통해 그녀를 기억하고, 기다리는 한국 팬이 많았다. 그녀는 수적으로 많은 팬보다 적은 수의 팬이라도 함께 호흡하는, 노래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삶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한국에서의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팬들과 함께 하는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는 신윤미. 그녀는 크고 멋있는 콘서트가 아니라 가슴이 훈훈한 콘서트이기를 바랐다. 그녀가 이번 고국 콘서트를 크게 홍보하지 않은 것도, 작은 공간에서 소박하고 따뜻한 무대를 마련한 것도 그 때문. 그녀가 꿈꾸는 음악이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장소협찬 / 레스토랑 한그린(3461-3461) 글 / 신현화 기자 사진 / 유승현 - 대한민국 새신문!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i진선 한 마디]

신윤미씨는 정말 한국 가요 사상 불멸의 명곡으로 손 꼽히는 "칵테일 사랑"의 가창자이면서도 그 이름 석자를 내놓지 못한 정말 황당한 가수였죠.

이번에 귀국 공연을 했다니 너무 기쁘네요...

 

아마 이 노래를 들으면서 추억에 잠기시는 분들 많을 겁니다. 그 당시에 젊은이의 사랑

풍속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노래라고 합니다.

 

레이디 경향의 신현화 기자님의 차분하고 멋진 글 솜씨 정말 가슴에 다가옵니다.

혹시 신윤미님의 자매님은 아니신지요^^::?

 

또한 위에서 이렇게 이쁜 음악과 그림을 손수 만들어 주신 에쎗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세상이 피곤하고 추해도 이런 음악을 만들어 주시고 불러주신 덕분에

잠시라도 휴식을 취할 수가 있다고 말 한다면 과장일까요?

 

음악인들께  감사드립니다. 

 

꾸벅 


칵테일 사랑’의 그 목소리, 신윤미


1987년 MBC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하나’란 여성 듀오를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그들 소식도 접하기 어렵지만 그때 대학가요제에서는 ‘작품하나’ 못지않은 대단한 여자 가수가 탄생했다. 그가 바로 신윤미다.


신윤미는 1987년 MBC대학가요제에서 ‘겨울비’란 곡으로 금상을 수상했다. 신윤미를 가장 쉽게 떠올리게 하는 음악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건 바로 마로니에 3집의 ‘칵테일 사랑’이다. 신윤미의 목소리로 음반 작업을 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방송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를 대신한 다른 가수가 방송에서 이 노래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그러나 정말 이 노래 가사에도 나오는 ‘봄의 프리지아 향기’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낸 신윤미의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라면 그를 쉽게 잊지 못할 거다. 청아한, 그러나 급격하게 뻗어가는 힘을 가진, 그저 넘겨 들을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신윤미다.


이화여대에서 작곡을 전공한 신윤미는 대학가요제 이후 1988년 첫 독집을 발표했다. 이 독집 앨범에는 작곡을 공부한 ‘음악도’답게 스스로 작사, 작곡 능력을 선보였다. ‘새장을 열고’, ‘귀로’, ‘돌’, ‘왠지 우울할 때’, ‘창밖에 비친 겨울’ 등 곡들을 만들었고, 그 중에서도 ‘새장을 열고’는 지금까지 신윤미 마니아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신윤미의 독집 중 가장 대표적인 곡은 1992년 두 번째 앨범에 수록된 ‘이젠 됐어’다. “하지만 이젠 됐어. 그대가 지금 있잖아~”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신윤미 특유의 맑지만 힘 있는, 또 그 목소리를 컨트롤하는 재능이 엿보인다. 그래서인지 신윤미는 코러스로 각광 받던 가수이기도 했다. 공일오비 3집의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5월 12일’에서 그의 절묘한 코러스에 멤버들은 찬사를 보냈다. 또 박광현 4집 앨범의 코러스와 드라마 파일럿 주제곡 코러스, 윤상 2집 part 2의 ‘고백’에서 피처링을 하기도 했다.


1994년 마로니에 3집에 참여해서 ‘칵테일 사랑’같이 지금까지 사랑 받는 곡을 부르던 신윤미는 그 뒤 유학을 떠나면서 잠적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팬 까페를 통해 접한 신윤미의 소식은 그가 여전히 ‘음악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던 신윤미는 현재 미국 뉴욕에 거주하면서 목회활동과 더불어 뉴욕 소재 플러싱 교회의 지휘자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애플 프러덕션의 대표이기도 하다. 지난 2002년에는 뉴욕 ‘더글라스 메너’에서 가을 콘서트를 성황리에 치렀다는 소식도 있다.


이 외에도 일년에 한번 정기적 콘서트와 ‘신윤미의 노래세상’이란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예전의 대중적인 가수에서 조금은 종교적 색채가 짙은 듯한 느낌이 들지만, 팬 까페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된 그의 글에서는 가슴 벅차게도 여전히 ‘노래를 가슴에 품고 산다’는 음악인으로서의 신윤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그의 그리운 목소리가 전파를 탈 어느 날이 올 것이 기대된다.

TYGEM / i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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