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박상언] 2007년 2월 한국바둑 랭킹 1위는 이세돌 9단이다. 하지만 아직 지존은 아니다. 바둑계 ‘불세출의 영웅’ 이창호 9단이 아직 건재한 이유에서다.
비록 슬럼프 기미를 보이기는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천하제패는 이창호에게 ‘떼논 당상’이란 분석이 아직도 힘을 얻고 있다. 지난 8일 중국 상하이 후아팅호텔에서 열린 제8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3라운드 제3국에서 중국의 ‘떠오르는 강자’ 쿵제 7단을 상대로 보여준 뚝심이 이를 잘 설명한다.
●세월에 장사 없다 ‘1인 천하 종식’
최근 이창호의 성적은 심각한 지경이다. 지난해 이창호는 국내기전 4관왕에 머물렀을 뿐 국제대회에서는 우승컵에 입을 맞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리고 지난달에는 삼성화재배에서 자신이 천적으로 군림했던 창하오 9단에게 0-2로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었다. ‘천하의’ 이창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치욕이다.
이창호는 지난 1992년 한국바둑의 1인자가 된 이후 10여년간은 그의 적수가 없었다. 조훈현과 유창혁이 간간이 저항했지만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승컵을 모두 휩쓸다시피 했다. 심지어 다른 기사들을 배려해 이창호의 출전 대회를 제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이세돌·최철한·박영훈 등 신예들이 등장하면서 이창호의 아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한국바둑대상에서 MVP를 이세돌에게 내줬고. 이번달 프로기사 랭킹에서도 이세돌에게 밀리는 상황까지 왔다.
특히 중국의 약진이 이창호의 부진과 맞물려 있는 듯해 더욱 충격적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바둑은 이창호를 앞세워 중국에 절대적인 우위를 보여왔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창호가 뒤에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은 안심할 수 있었다. 반대로 중국이나 일본 바둑에는 저승사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이창호의 부진을 틈타 중국 바둑이 고개를 들고 있다. 중국은 최근 각종 국제기전에서 약진하고 있는데. 이창호를 2-0으로 꺾은 창하오가 최근 대표적인 사례다.
바둑계는 이를 놓고 ‘이창호 시대의 종말’이란 표현을 인용한다. 그 이유로 기사간의 실력차가 거의 없어졌다는 점을 꼽는다. 이세돌 등 20대 초반 기사들은 처음 바둑판에 앉을 때부터 이창호의 기보를 연구해왔다. 당연히 이창호의 기풍은 물론. 습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90년대 후반부터 마샤오춘·창하오 등 중국 기사들을 번번이 녹아웃시켰던 기록. 특히 지난 2005년 농심신라면배에서 이창호가 기적 같은 5연승으로 한국에 대회 6연패를 안긴 사실은 중국 바둑계에서 아직도 ‘신화’로 통한다. 그런 그를 보고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일시적인 슬럼프일 뿐
단순히 일시적인 슬럼프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1975년 생으로 어느덧 나이 30을 훌쩍 넘겼다. 11세 인 86년 입단했으니 21년째 바둑과 씨름하고 있다. 바둑판이 질릴 때도 됐다. 또한 팔팔한 20대 초반의 후배들에 비해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스승이자 대선배인 조훈현 9단은 30대 중반인 89년 잉씨배를 차지했고. 66년생인 유창혁 9단도 30대 중반까지 이창호의 대항마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큰 이유로 개인적인 문제를 꼽는다. 이성. 즉 결혼이다. 우리 나이로 서른셋.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주위의 관심보다 자신이 더 급할 수도 있다. 게다가 결혼 후 더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이세돌이나 창하오를 보면 더욱 답답할 듯하다.
이창호는 지난 2000년 국내기전 3관왕에 그치는 최악의 부진을 딛고 이듬해 국제대회 2회 우승을 포함해 6관왕에 오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전까지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했던 기풍은 상당히 전투적이면서도 격렬한 바둑으로 변해 있었다.
올해 이창호는 여기에 조금 더 변화를 가미했다. 이젠 상대가 약점을 보이면 이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기어코 항복을 받아내는 ‘싸움닭’ 기질마저 보이고 있는 것이다.
8일 쿵제 7단과의 대국에서 이를 잘 보여줬다. 유리한 상황임에도 어정쩡하게 침투한 상대를 용납하지 않고 무 자르듯 단칼에 숨통을 끊어놓았다. 승리에 대한 가능성이 보이면 슬며시 살려주면서 계가로 승부를 냈던 예전의 이창호가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볼 때 ‘이창호의 시대’는 분명 끝났다. 그러나 이창호는 아직 건재하다. 이창호는 변하고 있다. 이 변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제2의 이창호 시대’를 향해 다시 한번 힘찬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상하이(중국)=박상언 기자 [separk@ilgan.co.kr]
[관련자료]
| 중국 언론 "한 사내가 관문 지키니 천군만마도 벌벌"
|
|
|
|
| “한 사내가 관문을 지키고 있으니, 천군만마도 공략하지 못하는구나.”(일부당관 만부막개·一夫當關 萬夫莫開)-현대쾌보(現代快報)
“돌부처가 손을 움직이자 공기에 화학반응이 일어나더니 분위기가 변해버렸다.”(石佛一出手, 空氣立卽發生了化學反應, 味道變了:석불일출수 공기입즉발생료화학반응 미도변료·:)-양자만보(揚子晩報)
한국의 국보(國寶) 기사 이창호 9단에 대한 중국인들의 ‘칭송’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축구 경기에서 한국팀에 지면 저질스런 욕설을 서슴지 않던 중국인들도 이 9단에 대해서만은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농심배 세계바둑대회가 끝난 지 3일째인 지난달 28일, 중국 쓰촨(四川)성의 성도상보(成都商報)는 이 9단을 ‘백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천재기사’라며, “그대는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이토록 깊은 상처를 주는가”라는 역설법으로 실력을 칭찬했다.
현대쾌보는 당(唐)대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나오는 구절인 ‘일부당관 만부막개’를 인용해, 중국과 일본의 고수 5명을 차례로 무너뜨린 이 9단의 신기를 극찬했다.
중국 난징(南京)에서 발행되는 양자만보는 “바둑 기사로서 이창호와 동시대에 산다는 것은 잔혹한 일”이라며 “그의 상대가 되는 기사는 엑스트라로서 역사에 기록될 뿐”이라고 한탄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자국 기사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중국바둑협회 천쭈더(陳祖德) 주석은 “패배한 기사들은 마땅히 자극을 받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