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따부따
일인자들과의 1박2일
맥심커피배 이세돌 박정환 동행 취재기
2014-04-16 오전 11:20:09 입력 / 2014-04-26 오전 12:03:42 수정
▲ 신구 일인자들 박정환 이세돌.
지난 14일 오후2시 한국기원 주차장. 이세돌이 가벼운 짐 하나를 들고 서 있다. 필자가 다가서며 "이국수! 나도 대천으로 갈 거야."라고 말하자, 그는 심심한데 마침 잘 됐다는 눈치로 씽긋 웃는다.
맥심커피배 결승1국 장소는 대천(지금은 보령시)에 있는 죽도라는 섬이다. 필자의 큰 할머니가 사는 곳이라 바둑도 관전하고 문안인사도 드릴 겸 따라 나섰다. 오후2시30분 맥심커피배에서 14연승 행진을 하고 있는 '맥심불패' 박정환이 제 시간에 정확히 맞춰오자 일행은 보령으로 출발했다.
10번기 3국 얘기부터 시작했다. 박정환 김지석이 지난 달 춘란배를 마치고 10번기 응원차 청두로 이동했다. 주최 측에서 초청한 것이 아니니 당연히 호텔비는 자비로 해결해야 했다. 비공식 세계1위라는 박정환과 한국2위 김지석이 방문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선전이 되었을 텐데 숙박비를 내게 했다니 이럴 수가…. 이세돌이 그들에게 에둘러 미안함을 표했다고 한다.
"이국수! 10번기 4국은 신안군 증도에서 한다던데 어떻게 이동해?"
"(이)상훈이형 차로 가려구요. 미리 가봐야 할 것도 없어서 하루 전에 갈 것 같아요. 한 4시간 반 걸리려나."
"중국에서는 많이 오나?"
"원정길인데 많이 못 오겠죠? 니장건 회장은 참석한다고 해요. 지난번 3국 때도 뉴욕출장을 갔다가 곧장 청두로 왔다더군요. 3국 다음 날이 자기 생일이라고 하면서, 저녁 만찬 때 구리가 자신에게 최고의 생일 선물을 해줬다고 기뻐하더군요."
니장건 회장은 구리의 열혈 팬이다. 2012년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구리가 유리한 바둑을 두 번이나 반집으로 역전패 하자 구리의 명예회복을 위해 10번기를 만들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 맥심커피배 결승1국 복기장면.
국가대표 체제 얘기가 나왔다. 국가대표 코칭스텝에서 회의를 통해 이창호가 국가대표가 아닌 기술위원 직을 먼저 수락했다고 한다. 이세돌은 "영재를 키우는 게 중요하죠"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시합이 없을 때 같이 연구회를 한다면 어떨까 싶다"고 했다. 오후4시 경에 도착한 서해안 고속도로 행담도 휴게소에서 이세돌은 국가대표 기술위원직을 수락했다. 이로써 최강감독에 최강보좌진이 만들어졌다. 타이젬 뉴스에 '일지매 사단, 양이(兩李) 날개 달다'는 제목이 확 와 닿았다.
행담도 휴게소에서 커피를 한잔씩 했다. 박정환은 커피를 안마시니 보리차를 하나 샀다. 이세돌은 아메리카노에 샷 하나 추가. "전 뭐든 독한 걸 좋아해요. 술도 독한 고량주, 자장면에도 고춧가루 듬뿍" 이상하게 그런 것이 좋단다.
오후 4시10분 다시 출발. 100km이상 속도를 내면 묘하게 차가 달달달 거린다. 다음날 오후 3시 대국이라면 이세돌은 보통 당일 날 움직인다. 이번엔 2박 3일간 있겠다고 했다. 기러기아빠가 되자 집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그런가보다.
박정환은 조용하다. 비슷한 또래와는 얘기를 잘하지만 대선배 이세돌 앞에서는 물어보는 말에만 대답할 뿐. 10년 차이잖은가. 예전에 박정환 나이 때 이세돌은 이창호 국수와도 이런 근엄한 분위기였을까. 이세돌은 "전 할 말 다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같은 팀(신안천일염)에서 배울 기회가 많아져서 좋아요!" 라고 말한다. 그러자 박정환이 씩 웃는다. 랭킹1위지만 아직은 이세돌을 넘었다고 자신하기 어렵다. 만약 넘어서도 이런 관계일까. 하기야 이세돌도 랭킹1위일 때 이창호를 넘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웃음에서 분명 변화가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후5시를 약간 넘어 대국 장소인 죽도 상화원에 도착했다. 대천 해수욕장 방향에서 섬을 연결해 도로를 만들었다는 상화원. 연륙교가 아닌 방조제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육지와의 연결로 이젠 섬이 아닌 육지다. 섬 전체를 개인이 정원으로 꾸몄다. 조용하게 한옥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 시합하기엔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 그동안 중국의 멋진 대회 장소를 보며 얼마나 부러웠던가. 이곳은 앞으로도 중요한 대국장소가 될 듯하다.
행사 관계자들은 연신 멋진 대국 모습이 나오게 하려 구도를 잡고 있다. TV해설을 맡은 윤현석과 요즘 자주 얼굴을 비치는 진행자 도은교가 바닷가를 배경으로 사전 오프닝을 찍고 있다. 결혼식 화보를 찍는 줄 알았다. 배경이 원체 좋으니 아무나 서 있어도 캘린더 제작용 화보가 될 듯싶다.
▲ 죽도 상화원은 연육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 상화원은 필자가 다녀 본 대국장 중 단연 최고의 환경이었다.
숙소는 2층짜리 단독 빌라다. 1층엔 싱글 베드가 있고 2층엔 3명이 같이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옛날 양반들이 쓰던 보료(짐승의 가죽이나 솜 등으로 넓게 깔아두는 담요)도 있고, 앉으면 통유리를 통해 바다를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다. 근데, 가격이 후덜덜…. 무려 110만원이란다. 바둑관전 왔다 머리털 나고 가장 비싼 곳에서 하루를 묵게 된 것이다. 내 돈 내지 않고 묵어서 기쁘다고 할지, 내 돈 내고는 다시는 못 올 곳란 생각에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저녁6시30분. 대천 해수욕장 근처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해수욕장 주변은 횟집과 조개구이 집들이 대부분.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은 고기 집을 찾아냈다. 다음 날 횟집에서 점심 식사가 예정되어 있으니 오늘은 고기를 먹는단다. 이세돌과 박정환은 등심. 나머지 관계자들은 삼겹살. 추가 주문을 통해 단가는 결국 같아졌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서 생각하니 처신이 어렵다. 1,2층이 독립적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샤워하는 소리나 기침 소리 때문에 박정환이 잠을 못 잘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닌가. 다음 날 아침까지 부동자세로 누워 잔 것 같다. 이것도 경험이다. 대국자와 같은 곳에서 자는 일은 절대 피해야겠다.
15일 오전6시30분. 평소대로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오후 대국 3시까지 뭘 해야 될지 고민된다. 일단 섬을 한 바퀴 돌아보자. 1km구간을 열 번 쯤은 돈 것 같다. 그래도 9시가 안됐다. 방에 들어가 봐야 박정환 깰까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다시 5바퀴 더 돌기. 너무 걸었더니 지치는 것보다 오히려 배가 고프다.
오전11시. 2층으로 올라가 박정환을 깨우러 갔다. 이미 일어나 타이젬 바둑을 보고 있다. 새벽2시 넘어서까지 바둑공부 하고 아침에도 일어나서 다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 "타이젬에서 누구랑 많이 둬?" "판팅위 미위팅 탼샤오랑 주로 많이 둬요." "요즘 커제가 대세라던데 어때?" "잘 두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말하는 느낌이 '커제는 아직…'이라는 뉘앙스.
배가 고팠나 보다. 점심시간을 묻는다. 12시 점심시간이 15분 빨라졌다. 이세돌도 배고프기는 마찬가지. 늦게 점심을 먹을 이유가 없다. 근처 횟집에서 회 정식을 시켰다. 두 고수들은 회엔 관심이 없다. 매운탕과 밥으로 일관한다. 사이좋게 한 공기 반씩 뚝딱 해치웠다. 회는 모두 필자의 몫이다. '우하하하' 뿌듯했다. 비싸서 못 먹는 회를 배가 불러 남기는 사태가 벌어지다니.
이세돌은 아침 6시30분까지 날밤을 세웠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드라마 다운받아 온 걸 빨리 보기로 55편을 모두 봤다고 한다. 드라마 스토리를 계속 얘기해 준다. 잘 모르는 드라마다. 자신도 막장드라마인걸 눈치 챗지만 궁금해서 끝까지 봤다고 했다. 한 사람은 바둑공부해서 늦게 자고 다른 한 사람은 드라마로 날밤 깐다. 컨디션 조절 방법이 이렇게 극과 극이다.
▲ 상화원은 그 자체가 힐링코스. 두 고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식사 후 오후 행사장은 북적거린다. 이세돌은 잠시 눈 좀 부친다고 숙소로 갔다가 30분 만에 다시 행사장으로 왔다. 도저히 잠이 안온다고 했다. 대국 시작까지는 아직 2시간이나 남아 있다. 누군가랑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눈치다. 필자가 천상 파트너다.
첫 번째 주제는 다시 10번기. 일생에 한번쯤은 해 볼만한 승부라고 했다. 10번기 중간 중간에 끼어있는 다른 시합이 긴장감 해소에 도움이 될까. 1주일에 한판 정도라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프로의 전성기는 언제인가. 본인은 2003년부터 2009년까지였다고. 휴직 이후 근근이 버티다 지난해 확실히 하락세를 맞이하는 게 아닐까한다고. 그럼 박정환은 올해 21세가 되니 전성기의 시작? 올해 세계대회를 하나 이상은 우승할 것으로 이세돌은 예상했다. 이세돌이 10번기에서 승리하면 2015년엔 박정환과의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아, 상상만 해도 기대된다.
맥심커피배는 지난해에 이어 이세돌-박정환 결승 대결이다. 예정시간보다 15분 앞당겨진 2시45분 대국 시작. 초반부터 이세돌이 쉬운 수를 깜박했다. 검토실에서 조훈현국수가 "설마 그 쉬운 수를 못 본건 아니겠지"라고 한다. 실제 복기 때 이세돌은 그 쉬운 수를 못 봤다고 했다. 큰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박정환이 패하고 말았다. 충격이 큰 것 같다. '맥심불패'도 14연승에서 멈추었다.
숙소로 같이 이동하면서 박정환은 왜 가볍게 하변처리를 못했는지 연신 후회했다. 바로 가방을 싸서 서울로 이동하려고 한다. 관계자들에겐 예상치 못한 비상사태다. 타이틀 보유자가 후원사와의 저녁 만찬에 불참하면 관계자들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기원 관계자들의 통사정(?)으로 다행스럽게 만찬에 참석하고 서울로 이동하는 것으로 마무리.
저녁 만찬은 6시가 되기전에 시작됐다. 후원사 쪽 건배 제의에 이어 사회를 본 전문 리포터가 이세돌에게 건배 제의를 부탁한다. 이긴 사람이 패자 앞에서 신난 모습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다. 정중히 거절했다. 만찬이 끝나고 저녁에 이세돌은 소주 한잔 생각이 있었던 모양인데 필자는 다른 일정 때문에 고사한 것이 맘에 걸린다.
TYGEM / 김성룡 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