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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지게꾼이 된 건 나의 행복”

내셔널바둑리그 서울천일해운 정연통 단장 인터뷰

2015-05-04 오후 5:38:01 입력 / 2015-05-07 오후 3:44:06 수정

▲ 서울천일해운 정연통 단장. 그는 천일해운의 회장님이지만 회장님보다는 단장님이란 호칭이 더 좋단다.

2015 내셔널리그가 한창인 서울 남산의 유스호스텔 3층. 대회장 한 편에서 말쑥한 정장차림의 노신사가 대형 대진표 앞에 서 있다. 한동안 선수들의 전적을 살핀 후, 곧 선수들 사이로 들어가더니 조용히 팔짱을 끼고는 관전에 열중이다. 

바둑계에는 크고 작은 후원자들이 있다. 게 중에서 프로보다는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는 아마바둑에 애정을 깊이 쏟는 분을 보면 먼저 존경심이 생겨난다. 후원사의 입장은 대개 기업홍보가 우선이기 때문에 눈에 잘 띄는 프로경기에 투자하기 마련. 그러나 아마바둑인의 열정에 탄복하여 순수한 의미로 후원하는 이도 가끔은 있다.

(주)천일해운 정연통 회장(80)도 그런 분 중 하나다. 굴지의 해운회사 회장님이면서도 바둑동네에 와서는 손자 손녀뻘되는 선수와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노라면 꼭 동네 할아버지의 친근함과 정겨움이 묻어난다.

내셔널리그는 전남 영암군, 경기도 의정부시, 대구시 등에서 지방투어를 한 적은 있지만 이번엔 처음으로 서울투어가 천일해운의 후원으로 성사되었다. 매번 경기를 치르던 한국기원도 훌륭한 대국장이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공기좋은 남산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도 아마바둑의 격을 높이는 일임은 불문가지.

이날의 호스트 정연통 회장은 오후1시에 시작된 개막식행사부터 오후7시 선수단의 저녁식사까지 챙긴 후에야 비로소 시간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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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통 단장이 손녀뻘 김수영 선수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김선수는 서울천일해운의 라이벌인 대구덕영 소속이다.

정연통 회장은 1934년생이니 만 80세이며 우리나이로는 82세. 화통하고 명쾌한 목소리로 보아 한눈에 건강함이 느껴진다. 그래도 팔순의 연세가 부담스러워 기자는 건강 얘기부터 꺼냈는데, 곧장 준비된 듯 답변이 돌아왔다.

"헬스는 주3회, 골프는 주1회 이상, 그보다 많은 시간동안 바둑을 즐깁니다. 고향친구와 기력이 비슷한데 서로 자신이 잘 둔다고 우기죠. 하하. 라이벌이 있다는 게 좋은 것이더군요. 몸건강과 정신건강 양면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배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해운회사 1만개 중 가장 성공한 회사로 꼽히는 천일해운은 하주(荷主)가 맡긴 화물을 선박이나 항공에 인도하는 것이 주업무. 정회장은 국제복합운송업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인정받고 있는 글로벌업체인 (주)천일해운을 비롯하여 한국화물터미널, (주)해강선박을 동시 경영하고 있다. 

그는 '해운왕'답게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고향은 경북 영천이고 경주에서 중고교를 다녔으니 바다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런데도 그가 해양대를 지원했던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해양대는 돈 한푼 들지 않는 호조건이었다.

"학창시절엔 공부를 꽤 잘했습니다. 해양대와 서울법대를 동시에 합격했지만, 가정형편상 특채로 합격한 해양대를 갔습니다. 입학하던 1954년은 종전 1년 후라 국가재건에 전력을 기울일 때였죠. 바다에 눈을 돌리면 상당한 미래산업이 될 것이라는 부모님의 권유가 있었죠."

그 길로 바다와 인연을 맺고 60여년을 외길만 보고 달렸다. 해양 전문인력이 부족했던 시절, 해양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모교에서 교수생활을 10년간 경험한 후, 34세에 극동해운에 픽업되었고,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중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 45세의 늦은 나이로 지금의 천일해운을 창업한다. 당시는 중동에 건설붐이 일어서 건축자재 수송을 위한 '중동특수' 덕에 천일해운은 승승장구했다.

▲ 서울천일해운 박지영 선수(좌) 뒤편에서 복기를 지켜보고 있는 정단장.

그가 회사를 이끄는 좌우명은 '이객위업(利客爲業)'. 즉, 고객을 이롭게 하기 위한 사업을 하겠다는 뜻이다. "남들이 일을 시키지 않으면 제가 사업을 못하니까, 남의 은혜를 입었으니 남과 더불어 사는 삶에 익숙해진 것이죠. 바둑도 그러한 가르침이 있어요. 상대를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서로가 배려하는 맘이 우선입니다."

수십 년 간 기업을 하다보면 굴곡 하나쯤 없을 리 없다. 1992년 예인선 면허를 취득해 울산에서 자신의 호 '해강(海岡)'을 딴 해강선박(주)을 설립했다. IMF직전 3600마력의 예인선을 500만 달러에 건조한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와 결국 전 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대마는 불사라고, 기적같이 주변의 도움으로 사활의 위기를 극복해냈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며 열성적이며 참여적이다. 수년전 부터 그를 접했던 기자는 그가 중견기업의 회장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선수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며, 한국기원에서 벌어진 매 라운드는 물론이고 대구 의정부 등 지방투어에도 직접 찾아가서 관심을 표명하는 모습을 많이 목도했다. 돈 몇 푼 후원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촌음을 아껴서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바둑에 무한한 애정을 보인 것.

마침 서울투어가 벌어진 이 날은 그가 38년째 참여하고 있는 봉사단체 라이온스클럽 정례모임과 겹쳤다. 국제라이온스총재, 복합지구의장 등을 역임했던 그로서는 이도 저도 소홀할 수 없었다. 결국 양쪽 모두를 오가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바둑이 좀 더 끌렸을까.어린 선수들과 함께 일반배식대에서 줄을 서서 식사를 챙기는 등 솔선수범을 보여주는게 아닌가. 흔히 회장님들은 대회장 밖 근사한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에 익숙했던 기자는 매우 놀랐다. '이객위업'의 정신으로 봉사하는 삶, 주변과 상생하는 삶을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 서울천일해운은 내셔날리그 경기때마다 대회장 한편에 '이객위업(利客爲業)'이라는 사훈이 담긴 현수막을 건다.

그는 구단주로서 의무감보다 스스로 팀이 걱정되어서 자주 대회장에 나온다. 앉아서 소식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고. "모든 문제는 감독에게 맡겼는데 딱 한 가지만 부탁했어요. 조민수 선수만은 꼭 잡으라고 했죠. 좋은 실력을 가진 분이니까요. 그런데 작년 포스트시즌 때 조선수가 감기에 걸려서 컨디션이 그만…. 올해는 잘 할 겁니다. 하하." 작년 정규리그를 우승하고 포스트시즌에서 대구덕영에 역전패한 사실을 떠올리면서 하는 말이다. 꽤 아쉬웠던 모양이다.

정회장은 승부에 매몰되지는 않지만 승부욕도 은근히 많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승부욕이야 말로 자신을 자극시키는 좋은 효소라고 믿는다. "이왕 승부에 임하면 잘 해야죠. 이겨야죠. 절대 사업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회사와 붙었으면 반칙을 쓰지 않은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 이겨야죠. 못 이기면? 그야 할 수 없지요. 하하."

왜 이렇게 고마운 분이 이제야 나타났을까. 정회장이 본격적으로 바둑계에서 알려진 것은 대략 5년 전이다. 당시 여성연맹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었는데, 서울천일해운 고형옥 감독이 여성연맹의 수장을 이어받으면서 자연스레 내셔널리그 팀 창단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 이전 재경대구경북시도민회 기우회를 만들기도 했고 경북시도대항바둑대회도 매년 개최하기도 한 숨은 공로자였다.

"제가 경북시도민회회장을 한 적이 있어서 대구바둑협회 이재윤 회장님을 알고 있었어요. 그 분이 아마바둑을 위해 오랜 세월동안 봉사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고, 저도 이왕 바둑계에 발을 들여놨으니 좋은 의미로 봉사하자고 맘을 먹었지요."
▲ 작년 10월 제12회 재경 대구경북중고 동문바둑대회가 열렸다. 앞줄 왼쪽부터 윤종섭 프로,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정연통 천일해운 회장, 강명주 GG옥션 회장, 박상진 재경 대구경북시도민회 기우회장(이상 앞줄). (사진출처=재경 대건고 기우회)

'바둑은 얼마나 두세요?'
70년 내공이니 기력도 상당할 것 같다. 그러나 기력 얘기만 나오면 손사래를 친다. "학교 다닐 때는 어렵게 얻은 책 한권을 마르고 닳도록 보고 또 보고 했지요. 한 아마4단 쯤 될까요? 기원3급쯤 된다고 해요. 중학교 때부터 선친이 바둑을 두셨고 외조부께서 바둑을 잘 두셨어요. 가끔 외가를 방문하면 할아버지와 대국을 꼭 했죠"

정회장은 바둑을 통해서 인생의 교훈을 얻고 회사경영에도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바둑은 사람을 겸손하고 신중하게 만들어요. 바둑은 남을 배려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죠. 내 말이 튼튼해야 전투에 임할 수 있듯,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필수입니다."

그가 구체적인 위기십결 구절을 말하지 않았지만, 신물경속(愼勿輕速-경솔하지 말고 신중하라.) 동수상응(動須相應-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행동에 나서라.) 피강자보(彼强自保-어설픈 공격을 지향하고 자신을 보완하라.) 정도가 정회장이 강조한 내용이리라.

평생 바둑의 즐거움을 전달하는 '지게꾼'이라고 스스로를 칭한 정연통 회장. 인터뷰를 마치면서 혹시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보시라고 하자 또 바둑예찬과 바둑걱정이 이어진다.  

"저는 바둑을 좋아하고 바둑에서 얻는 교훈이 제 인생 그 자체며 바둑을 두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평생 바둑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제 자신이 자랑스럽고, 바둑계에 보탬이 되는 일을 더 하고 싶습니다. 다만, 젊은 기재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볼 때 너무 안타깝습니다. 프로의 문호가 넓어졌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남산에서 벌어진 내셔날리그 서울투어 중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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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통 회장은 서울천일해운 선수단과 함께 식사를 하는 등 단장으로서 일치단결된 모습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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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내셔널리그의 호스트 정연통 서울천일해운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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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지게꾼이 된 것은 나의 행복!"
TYGEM / 진재호 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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