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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의 은퇴: 이세돌의 은퇴를 기념하며

철학 전공인 중국 프로기사 리저의 글

2020-03-09 오후 9:05:56 입력 / 2020-03-10 오후 3:31:05 수정

중국 프로기사 리저가 웨이보(중국 최대의 블로그 사이트)에 ‘이세돌 은퇴’에 관련된 장문의 글을 올렸다. 89년생 리저는 북경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 중이며, 2013년 LG배 4강에 오른 적이 있는 실력자다.

철학을 공부 중인 리저의 글은 중국 바둑팬들이 150여개의 댓글을 달 정도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한국에서도 이 소식을 들은 네이버 블로거 ‘hox’는 “바둑 커뮤니티에서 우연히 리저6단이 쓴 좋은 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내용이 흥미로워서 번역을 해봤다.”고 전했다.

네이버 블로거 ‘hox’가 번역한 리저의 ‘한 시대의 은퇴: 이세돌의 은퇴를 기념하며'를 감상해본다.

 

 

 

 

 

‘이세돌의 은퇴는 한 시대의 끝을 상징한다’

 

이세돌 본인은 이러한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세돌에게 바둑은 개인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두는 바둑이 단지 우리 개인의 사고의 한계, 정신력, 경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두는 바둑은 지속적인 훈련으로 형성된 관념, 영감, 격정, 때문에 우리가 혼자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당신은 다른 기사를 대표할 수 없고, 하나의 공동체를 대표할 수 없으며, 더욱이 전 인류를 대표할 수 없다. 개인의 바둑은 개인의 존재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2016년 알파고의 충격적인 등장 이후를 바둑사의 전환기로 본다면 2019년 말 이세돌의 은퇴는 이 전환기의 완결을 알리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뒷세대에게 이를 사실대로 말하고, 결산하고, 시간이 흘러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지 상상하는 것이다. 미래의 흐름이 우리의 인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더라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단지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다.​

 

 

 

 

바둑 인공지능의 인간 추월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피할 수 없는 이 질문을 두고 지난 2-3년간 바둑 분야 종사자들이 나름의 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훈련 방식의 전환, 수업 방식의 전환, 해설 방식의 전환, 업종 구조의 전환이러한 변화들은 우리의 과제와 성취들을 되돌아 보고 적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전진하고 있다.

 

프로기사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이해는 나뉘고 있다. 기량의 절정에 있는 기사들, 또는 발전의 여지가 있는 기사들에게는 바둑AI의 출현이 훈련 방식의 혁신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당연히 이성적인 인식으로, 역사적 경험으로 미루어보아도 새로운 훈련 방식에 신속하게 적응하는 것이 기술 수준을 향상시키는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 없었다. 과거의 훈련 방식이었던 집단연구, 온라인 대국에 적응하지 못한 기사들은 부진한 성적을 보이거나 심지어는 도태 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AI라는 새로운 훈련 방식은 혁신의 정도와 그 효용이 전에 비할 수 없이 크다. 새로운 훈련의 방식은, 요컨대 대국 중 특정한 국면에 맞닥뜨렸을 때 AI가 제공해주는 ‘표준답안’을 갖고 일종의 시험을 치르는 수수께기 맞히기가 되어버렸다.

 

그 동안 바둑은 기억력이 전부인 종목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억력과 암기는 오늘날 프로 바둑에서 매우 중요해졌다. 만약 당신이 삼삼 정석의 변화도에 익숙하지 않다면, 그 이후의 수순은 용기 없이는 풀어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개인의 감각을 통해 AI의 승률 데이터에 대항한다는 것은 단지 승률 수십 퍼센트를 손해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나의 두뇌 능력의 소모, 심리적 열세 '우리가 항상 바둑을 잘못 두고 있는지, 상대방은 이미 활로를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이 계속된다. 이것은 대국자에게 단순한 승률의 손실보다 더 큰 위협이 된다.

 

이전에는 이세돌과 같은 기사도 집단연구를 통해 발견한 포석의 틀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집단의 수준에서 이루어졌어도 그것은 국면의 이해에 대한 스타일의 차이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AI의 포석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개인적인 경험으로 집단의 경험에 대항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개인적인 경험으로 ‘표준 답안’에 대항하는 것과 가깝다.​

 

 

 

 

물론 이것은 기초 경험을 새로 쌓는 과정이다. AI가 발견한 새로운 수많은 수순들이 바둑의 기초지식으로 자리 잡았고, 프로 지망생들은 이 일련의 과정을 반드시 배워나가야 한다. 젊은 기사들에게는 낡은 정석을 새로운 정석으로 대체하는 것이 필수 코스가 되었다. 전성기를 넘긴 기사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바둑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열정을 가진 기사들은 변혁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모든 바둑 지식의 혁신은 결국 기사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오늘날의 진짜 어려움은, 더 이상 기사들이 혁신의 창조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범서병, 시양하, 오청원이 보여준 새로운 포석에서 그들의 혁신의 이념적 맥락을 찾을 수 있고, 창조자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시공을 넘나들며 이들과 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바둑을 발전시킨 이 길에서 선현들이 스스로의 재능으로 어떤 사고의 공간을 개척해 냈는지, 또 어떻게 바둑에 대한 인간의 전반적인 인식을 바꾸어 놓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사활과 포석은 기사들이 그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산하는 낙원이었다. 물론 바둑의 중반부 역시 창의력과 전략능력을 요구했지만, 바둑의 초반부에 비해 선택의 우열을 가리기 쉬웠다. 기사들은 바둑의 초반부에 대해 가장 많은 이론을 발전시키고 정형을 연구했지만 공감의 정도는 제일 낮았다. 정석과 포석은 바둑의 결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상관성이 낮기 때문에 기사들은 그 단계에서 가장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한 기사의 사활능력과 수읽기의 강약은 비교적 평가하기 쉽지만, 그 기사의 포석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신중한 접근을 요한다. 기사의 포석은 그 바둑의 중반, 후반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으며, 곳곳에 포진해 있는 돌들의 배치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포함하고 있고, 이에 더하여 “미지의 공간에 대한 의식과 느낌”을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포석은 바둑에 대한 전반적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부 실력 있는 기사들은 표준화된 초반부 대신 자신이 잘 아는 습관화된 포석을 통해 판을 장악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기도 한다. 이런 스타일은 그들의 승리의 경험에 대한 관성 추구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승부파'와 '구도파'의 구분을 그렇게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승부는 프로바둑에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여기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자체가 ‘구도’와 구분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승리를 추구하는 것 이외에도 기사들의 바둑을 움직이는 다른 힘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기사의 스타일, 성격, 인생 역정과 그것을 감지하는 강도의 차이가 있으며 이는 기술기예의 높낮음이나 승부의 결정과는 다르다.

이는 바둑 자체에 대한 인식을 결정한다. 이성과 비이성, 의식과 잠재의식이 혼재해 있는 이러한 구동력은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바둑 자체에 대한 인식의 힘의 강약이 곧 창조감의 강약이며, 이것이 바둑이 예술인지 경기인지에 대한 기사의 성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세돌은 창조감이 매우 강한 기사이다. 그의 기보는 낯선 영역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때로는 절벽에서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활공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가 은퇴를 앞두고 “나는 바둑을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내 마음의 바둑은 둘이 힘을 합쳐 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의 은퇴는 한국기원과의 불화와는 별개로 바둑AI가 그의 기사로서의 창조감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AI가 가져다 준 바둑 기술의 비약은 천년 후의 바둑을 만난 것과 비슷한 충격이었다.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이 신화적인 충격을 심지어 우리가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동안 ‘이견’의 형태로 남겨져 있던 다양한 형태와 변화도들은 AI를 통해 정리되고 있다. 묘수, 완착, 전략은 승률과 피승률을 통해 ‘정해와의 거리’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바둑AI는 모든 기사들의 지도자가 됐으며 시험지를 채점하는 채점관이 되었다.

우리 세대의 기사들은 매우 운이 좋았으며, 미래의 기사들은 우리처럼 AI이전 세대와 포스트 AI시대의 전환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매우 어릴 때부터 복잡한 삼삼정석을 익히고 AI로 자신의 대국을 분석할 것이다. 바둑AI가 가져온 안개 속에서 우리는 바둑의 신의 한 쪽 얼굴을 보았고, 누군가는 바둑의 신이 내뿜는 탄식을 들었다.

 

AI시대가 열리고, AI의 기법을 배우고 따라하는 것이 프로기사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길이 되었다. 바둑을 예술로 보는 기사들에게 이는 스스로를 창조의 주체에서 모방자로 격하시키는 것과 다름아니었다. 물론 기사의 창조의 영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므로, 여전히 이해력과 재현력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창조와 창작의 영역은 명백히 모방으로 대체되고 있다. 오늘날 나타나는 모든 초반부 포석의 변화는 AI가 그려내거나 사람이 AI로 연구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축적될수록 창작의 공간은 좁아질 수 밖에 없다. 과거에는 기사들이 개인적인 몰입을 통해 신수를 생각해 냈다면, 그 후 수백 판의 대국과 수 개월의 집단 연구를 거쳐야만 그것을 검증할 수 있었다.

 

 

 

 

이세돌은 모방자가 되는 자기격하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또한 이 때문에 벌어지는 대국의 열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은퇴는 거의 유일한 이성적 선택이었다. “예술은 당신 자신의 색깔을 무언가에 투입하는 것이고, 그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세돌의 발언은, 그의 앞에 나타난 고차원의 심판이 보여주는 예술과 시합의 공존 불가능함이 그에게 얼마다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인지 역설한다.​

 

객관적인 정해가 스스로 우리 앞에 나타날 때, 정해를 향한 우리의 창조는 그 존재의 뿌리를 잃은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약함을 발견하고 대신 이성의 겸손함을 얻었다. 물론 완벽한 모방은 여전히 매우 어려우며, 오늘날과 추후 프로바둑의 길을 걷는 기사들은 모방에 앞서 자신을 훌륭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예술 이론에서조차 진리에 대한 모방은 여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제시한 유명한 이론을 참고하면, 이창호의 바둑은 ‘아폴론(태양신)’적이고 이성질서와 정확성으로 가득 차 있는 반면, 이세돌의 바둑은 ‘디오니소스(술의 신)’적이라고 볼 수 있다. 태양신은 과학정신에, 술의 신은 예술정신에 가깝다. 오청원의 바둑은 태양신과 주신의 결합, 즉 과학과 예술의 중화, 종교의 색채를 더 느끼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AI의 등장은 태양이 떠올라 모든 사람에게 봄볕을 내리쬠과 동시에, 술의 신은 자취를 감춰버린 것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바둑의 예술은 여기서 끝나버리는 걸까? 나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정답을 지향하는 프로바둑에서 인간의 자기표현으로서의 예술, 내면적 성찰, 규칙적 지식의 합리적 확인과 보편적 응용을 숨길 수 밖에 없을 때, 오히려 바둑에는 여전히 커다란 발전 잠재력이 있게 된다. 이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과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을 열 만한 용기와 지혜가 있을까?

 

 

 

 

이것은 ‘각성’의 시대이며, 바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술, 문학, 철학에서도 ‘탈-마취’의 과정은 받아들여져오고 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 이후 신화적 권위가 무너졌고, 모든 가치관이 새롭게 재평가되어야 했다. 과학주의와 소비주의는 규율의 결합된 힘을 형성하고, 사람들의 일상은 점점 동질화되고 있으며, 개인 경험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드문 일이 되어가고 있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말하며 문학에서 탈주체화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이 죽음은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는 ‘강제된 퇴보’에 가깝다. 작가의 후퇴, 작품의 동질화와 일상화, 창의성의 소멸, 새로운 형태의 결여- 이러한 위기가 문학에서는 일부의 예리하거나 전문적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만 제시되어 온 반면, 바둑계에서는 AI이후 말 그대로 모두의 앞에 이 위기가 놓여 있었다.

바둑 기사가 더 이상 바둑을 삶과 정신이 응축된 숙명의 예술로 보지 않을 때, 또는 더 이상 바둑을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과 창조성을 통해 바라볼 수 없게 될 때, 바둑은 명성과 부를 얻기 위한 도구로 간주되어버린다. 시장 논리 하에서의 노력을 통한 지위의 획득이라는 이 무성의 '불쾌함'은 '기사의 죽음'에 대해 비합리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21세기의 두 번째 10년, 오청원은 떠났고 이세돌은 은퇴했다. 어떻게 기사가 재발명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고, 인간의 철학과 예술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을 때, 미래의 사람들은 2016년 3월 13일을 반드시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이세돌이라는 기사는 그 날 그 시대에 포함되지 않은 대국을 했다. 그리고 유일한 공식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세돌은 인류가 아니라 단지 자기 개인을 대표할 뿐이라고 했지만, 이세돌의 수는 인간 자유 사상의 상징이였으며, 수백만 년 동안 이어져 온 인간의 창조성과 영감의 빛을 응축하여 디오니소스의 양식으로 완성한 바둑의 예술이었다.

 

 

 

 

▷리저 웨이보 원문: card.weibo.com/article/m/show/id/2309404475844541153439
▶네이버 블로거 ‘hox’의 번역 원문: m.blog.naver.com/hoxnation/22182627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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