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3부 박정환 대 커제 용호상박 혈투
박정환 자전해설로 감상하는 상세관전기 제3부
2016-06-24 오후 3:33:42 입력 / 2016-06-27 오후 9:59:41 수정
▲ 박정환이 백1로 날아들자 커제는 흑2로 반발한다. 이 때 준비된 백3을 터뜨리는 박정환. 대국 당시, 타이젬 김형환 해설자는 "역사에 길이 남을 수법이다. 응씨배 하이라이트로 손색이 없는 훌륭한 수"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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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보(86~88)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백86, 고심 끝에 놓인 한 수다. 커제는 빠른 손길로 흑87을 선택한다. 백86은 생소한 수였고, 흑87은 일견 급소 같다. 하지만, 백88이 놓이자 분위기가 바뀐다. 더구나, 박정환은 백88을 거의 노타임으로 두었다.
참고도24

"백1로 무난하게 지켜두는 건 흑2로 활용당하는 게 싫었습니다."(박정환 9단)
백A가 아니라 1로 돌을 높게 배치한 점이 눈길을 끈다. 지금은 중앙이 중요하기 때문에 돌이 한 줄이라도 위로 향해야 한다. 흑이 2,4를 재빠르게 선수하고 흑6으로 좌변을 선점하면 백이 당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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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백1에 흑이 2로 받아준다면, 이 교환으로 활용이다. 백3으로 지켜두기만 해도 만족스럽다. 커제가 이걸 모를 리 없다. 제12보 흑87 갈라침이 나온 배경이다.
제13보(89~93)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흑89로 침착하게 막아둔 커제는 박정환이 백90으로 밀고 올라오자 흑91로 변신한다. 백92 흑93, 서로 한 점씩 제압한다.
"커제가 바꿔치기를 선택한 게 좋았습니다. 만약 흑▲ 한 점을 살리려고 했다면 백이 우세한 결과를 얻었을 겁니다."(박정환 9단)
흑93이 놓인 장면에서 점심 휴식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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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 한 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흑1로 둬야한다. 백은 2로 넘어가고, 흑3과 백4는 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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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흑이 5,7로 귀를 지킬 때, 백은 8~12까지 실전적인 수법으로 선수를 뽑는다. 흑13까지 기분 좋게 돌파해봐도 손에 쥔 현찰은 없다. 반면에 백은 중앙 요처 14를 선점하며 손바람을 낸다.
기세로, 일감으로 두는 게 아니다. 고수들이 두는 수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
제14보(94~105)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점심 휴식시간이 끝나고 오후 대국이 재개됐다. 미리부터 자리에 착석해있던 박정환은 오후 대국 개시 선언과 동시에 백94에 착점한다.
기자들 움직임도 분주해진다. 박정환이 백94를 내려놓는 장면에 플래시를 터뜨린 후, 재빠르게 이동해 이번엔 커제를 렌즈에 담는다.
커제는 흑95를 결정짓고, 흑97로 향한다. 백102까지 수순이 판 위에 주르륵 놓인다.
TV중계와 타이젬 동영상 등을 통해 커제 특유의 느릿한 착점 손길을 알고 있는 바둑 팬들이 많다. 나풀나풀 날아가는 나비와 같은 손길로, 커제가 흑103에 두었다.
불과 몇 수 전까지, 중앙은 분명 가능성일 뿐이었다. '중앙은 집이 안 된다'는 격언도 있다. 착실하게 실리를 챙기고 있는 박정환(백) 우세가 점쳐졌다.
분위기가 바뀌는 건 순간이었다. 흑105까지 놓인 장면에서 처음으로 상하이 현지 중국 검토실이 시끌벅적해졌다. 좌상귀 패싸움 이후 독서실을 연상시키는 조용한 분위기였으나, 이제는 시장에 온 느낌이다.
중앙은 몇 집이 날까? 언뜻 봐도 약 20집은 가능해보인다. 계산서에서 순식간에 20집이 추가된다면, 형세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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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보 백100, 102로 응수하는 바람에 후수를 뽑았다. 흑103을 허용하게 된 연유다. 그렇다면 본도처럼 백1로 임시방편을 해두고 백3, 요처로 손을 돌리는 건 어떨까?
"흑4가 급소라서…"(박정환 9단)
이 변화 역시 생각해봤지만, A와 B를 맞보기로 하는 흑4가 따끔하다는 얘기다.
제15보(106~113) 주목! 눈을 크게 떠야 보인다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최근 바둑 해설자 자격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이세돌과 알파고 대결 때 정점을 찍었던 이 논란은, 해설자가 팬들에게 대국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해설자는 바둑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팬들에게 전달할 때는 재미도 있어야 한다. 말은 쉽지만 보통 일이 아니다. 박정환과 커제 대결을 누구라도 정확한 해설과 함께 감상하고 싶겠지만, 당대 세계일인자를 놓고 혈투를 벌이는 양웅의 수를 실시간으로 해부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바둑 수에만 초점을 맞춰서도 안 된다. 팬들은 재밌는 이야기, 에피소드 등 뒷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다. 감상하는 쪽 기력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어려운 바둑 수만 해설하면 인기를 얻기 어렵다. 여러 가지 고충이 있다.
그럼에도, 이 바둑에서 조명 받지 못했던 부분이 몇 군데 있다. 본보가 그 중 하나다. 박정환은 백106과 백110으로 좌중앙에 착점한 걸 "졌으면 패착"이라고 평했다.
타이젬 생중계에서도, 바둑TV에서도 또 다른 어떤 매체에서도, 어떤 해설자도 얘기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커제가 흑111,113으로 우상귀를 젖혀잇자, 형세는 흑 우세다.
박정환은 지금 시점부터 패착이 된 커제의 세 번째 실수가 나오기 전까지 내내 '흑이 유리한 바둑'이라고 분석했다.
원인은 백110과 흑111 교환에 있었다. 지금부터 박정환이 그린 그림을 함께 감상해본다. 쉽게 전달하고 싶지만, 내용이 어렵다. 눈을 크게 뜨고 봐야 손에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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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106으로는 1,3으로 젖혀이었어야 합니다. 자체로도 9집 정도 되는 자리에요. 이후에 백A~C로 두면 D와 E가 맞보기에요."(박정환 9단)
부수입도 있다. 백1,3이 놓이면 백 돌은 완생이 된다. 중앙에 가로 젖혀 패를 거는 수단이 강력한 노림이 된다. 백 돌만 살아있다면 꽃놀이패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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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1은 사실 '반 선수'라고 보고 둔 수였어요. 흑이 손을 뺀다면(가령 흑2), 백3으로 젖혀서 중앙에 흠집을 내는 수가 있습니다. 백7까지 돌파하면 중앙 흑 모양이 모두 지워집니다."(박정환 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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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제가 흑2,4로 먼저 젖혀이은 자리가 급소였던 이유는, 이제는 백5를 결행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흑10,12로 대마를 잡으러 가는 수가 생겼습니다. 백 대마 사활을 장담할 수 없어요."(박정환 9단)
무시무시한 수단이 숨어있었다. 흑2,4는 자체 집으로도 9집, 게다가 백이 둘 경우 우상귀 흑을 괴롭히며 우변 흑 한 점을 잡는 수를 노릴 수 있다.
이 자리를 흑이 차지하자, 백 돌이 미생이 됐다. '미생마 근처에서 싸우지 말라'는 격언이 유효해진다. 백5로 중앙을 돌파하기 위해 둔 수였으나, 커제는 할 테면 해보라고 대응했다. 중앙을 내어주고 박정환 대마를 잡으러 가겠다는 무서운 노림이었고, 이를 간파한 박정환은 백5를 결행하지 못한다.
제16보(114~120)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박정환이 백114,116을 서둘러 결정한 건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백△ 체면이 말이 아니다. 다음을 보고 둔 수인데, 스스로 뒷맛을 없애버리고 말았다. 이 시점에서 바둑은 흑 우세.
지금부터 박정환은 이 바둑을 역전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여기서부터 대국자와 해설자 판단이 갈린다. 현지 검토실에서도, 국내 해설자들도 아직은 형세를 낙관하고 있었다. 적어도 팽팽한 국면 정도로 해석했고, 덤이 8점(7집반)인 만큼 아직 우세하다는 전망이 대다수였다.
박정환이 백118로 패를 걸고 다시 백120으로 치중하는 모습을 보고, 국내 생중계 해설진은 "박정환이 흔들리고 있다"고 평했다.
팬들은 해설자 멘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바둑을 패했다면, '팽팽한 혹은 우세한 국면에서 흔들린 박정환이 무리수를 두다가 역전패 당했다'는 식으로 총평됐을지 모른다.
박정환은 흔들리지 않았다. 형세를 정확하게 보고 있었고, 지금 상황에서 뭔가 하지 않으면 진다고 판단했다. 지금부터 백의 수순이 최선일 수는 없다. 당연하다. 유리한 쪽은 최선으로 두면 승리를 쟁취한다. 불리한 쪽은 최선으로만 둘 수는 없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조금이라도 흔들어서 실수를 만들어 내느냐, 역전 빌미를 만드느냐. 그게 중요하다.
박정환이 지금부터 두는 수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지금 불리한 상황을 수치로 환산한다면 몇 집 정도일까요?"(기자)
"그건 너무 어려운데…(웃음) 반면 9집~10집, 대략 한 집반 정도로 보입니다."(박정환 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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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GEM / 이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