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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바둑 패러다임 - 이창호 국수의 경우 (상)

[칼럼] 바둑 패러다임 - 이창호 국수의 경우 (상)

2005-01-13 오후 11:51:29 입력

바둑 패러다임 - 이창호 국수의 경우 (상)


바둑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말할 때, 흔히 도사쿠나 황룡사(黃龍士) 등이 물리학계의

뉴튼과 비교돼 왔다.


그렇다면 바둑계의 아인슈타인은 누가 되는가? 단연 우칭웬 기성이다. 비교적 근래에

나온 이광구 기자의 ‘명예의 바둑전당’[관련자료1] 이 그랬고 또 문용직 4단이 쓴 ‘고금의

명인을 가볍게 비교하면’[관련자료2] 이라는 칼럼이 그랬다.

그렇다면 과연 문용직 4단이 말하듯, “이창호의 바둑은 오청원의 기본적인 골격에서

 변한 것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 이창호 국수 출현 이전, 한국바둑은 우칭웬 기성의 기본적인 골격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을까?


정말 우칭웬 기성의 주장처럼, “300년 전, 황룡사가 (홀연) 오늘에 이른다면 3개월간

의 적응기간”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무의미한 수사와 의미 있는 전제의 구분은 이후 논리의 항진이나 결론에 어떻게 연결되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만일 무의미한 수사로부터 논리의 항진이나 모종의 결론이

유도되고 있다면, 그 무의미한 수사조차 의미 있는 전제로써 보다 더 엄밀하게 짚어져야

한다.


따라서 “300년 전, 황룡사가 오늘에 이른다면 3개월간의 적응기간”만 거치면 될 것이라는

명제가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그런 전제를 입증할 수 있는 몇 가지 전제부터가 검증

되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관점이 과연 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 일반성을 갖느냐

는 문제이다.


뉴튼이 오늘의 세계로 시간여행을 온다면, 오늘의 양자론이나 상대성이론에 대한 이해는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보다는 월등 빠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현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

보다 빠를 것이냐는 쉽게 단정 짓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이유는 물리학상에

나타난 패러다임의 변화를 한 순간을 통해 보게 될 뉴튼의 이해가 빠르냐 아니면 이제까지

 맥스웰의 전자기이론,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을 거쳐 그 변화를 계기적, 축적적으로 받아들여

 온 현 시대의 평범한 사람의 이해가 빠르냐는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에 대해서는 물리학이 수사가 아닌 수리언어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뉴튼

의 손을 들어주기로 하겠다. 또 어쩌면 그것이 먼 세월을 달려 시간여행을 온 손님에 대한

예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데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뉴튼의 이해는 그나마 양자론이나 상대성이론, 또는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

의 세계관에 동의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다.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 닐스 보어의 양자가설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냉소에서

 보듯, 동 시대 최고의 학자들 간에도 세계관의 불일치는 이론에 대한 불일치, 그 이전에 몰

이해와 불인정으로 먼저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결과는 두 개의 세계, 따라서 두 개의 패러다임

을 대우(對偶)관계에서만 보았던 아인슈타인으로써는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이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있다.


뉴튼이 오늘의 물리학을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과연 새로운 ‘프란키피아’를 써낼 수 있느

냐는 점이다. 추측컨대 나는, 뉴튼이 사과가 하늘로 올라가는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여 그것

을 일반화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로 믿고 있다.


만일 이런 나의 믿음이 타당성을 갖는다면, 오늘 우리 눈앞에 나타난 뉴튼은 더 이상 뉴튼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17세기의 과거 속에서만 존재하는 뉴튼일 뿐이다. 따라서 그와 오늘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된다.

다음으로 “이창호의 바둑은 오청원의 기본적인 골격에서 변한 것이 없다”, 라는

말은 ‘오청원의 기본적인 골격’이 무엇인지 먼저 설명되었을 때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말이다. 만일 그 ‘기본적인 골격’이라는 것이 신 포석에 바탕을 둔, 중앙을

향하는 두터움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라고 한다면 이런 주장은 다음과 같이 모호한

진술과도 같아진다.


“제임스 죠이스의 ‘율리시즈’는 호메로스가 썼던 ‘오디세우스’의 기본 골격에서 변한 것이

없다.” 이런 진술은 명제 자체가 상호 모순 되는 두 개의 진리값을 동시에 갖게 된다.

그것은 틀림없이 맞는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틀리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애매한 진술은 과거의 ‘기본적인 골격’과 오늘 우리가 몸소 경험하고

있는 ‘변화의 속도’에 대한 한 개인의 상대적 관점의 표현으로만 머물게 된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코페르니쿠스의 경우에서 보듯 거시적 현상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고

 또 하이젠베르크나 겔 만의 경우에서와 같이 미시적 현상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동일한 가치

로 나타날 수 있다.  


우칭웬 기성의 ‘기본적인 골격’은 거시세계 쪽에 가깝다. 이 같은 표현이 결코

우칭웬 기성이 치밀한 수읽기가 동반되는 ‘잔 수에 약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창호 국수가 도달한 미시세계가 거시세계의 결정론적 구조를 벗어나

확률적 현상 가운데 있음을 강조했을 때의 상대적 비교일 뿐이다.


현대 바둑을 통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창호 국수에게서 보여 진 미시세계에서의

‘도전과 응전’의 관계로써 나타나고 있다.

한 때, 세계바둑계를 풍미했던 다케미야 명인의 바둑은 일찍이 우칭웬 기성이 창안했던

신 포석 이론 가운데 한 측면의 극단적인 구현이자 실험이었다. 디케미야 명인은 반상에

우주를, 아니 그 자신의 말대로 자연을 재창조해 냈다. 그러나 다케미야 명인의 우주 오딧

세이는 이창호 국수의 블랙홀에 휘말리며 번번이 좌초될 수뿐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결과를 통해 이유를 설명해 내기는 쉽다. 한 판의

바둑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내부밀도의 차이이다. 그것은 보다 압축된 내부밀도를

갖는 미세함이, 마치 실개천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온 누리를 덮어가듯 광활함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upkorea

[관련자료1]

[바둑산책]명예의 바둑전당

[뉴스메이커 2004-11-26 15:09]

일본 도쿄 시내에는 구단시타(九段下)라는

거리가 있다. 거기에 일본기원이 있다. 일본기원

건물을 지을 때 거리 이름까지 고려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재미 있다. 우리 식으로 풀자면

구단(九段)은 전문기사의 최고 단위인데,

그 아래라니.

큰 건물은 아니다. 10층이 안 되니 높지도 않고,

바닥 면적도 100평이 조금 넘어 보이는 정도니

넓은 것도 아니다. 지하는 창고로 쓰는데 바둑용

품들이 잔뜩 쌓여 있다.

바둑회관 건물로만 치자면 우리가 선배다.

종로2가 관철동에 한국기원 건물이 세워진 것은 1967년이다. 당시에는 주변에서

제일 높고 그럴 듯한 건물이었다. 건물이 세워진 후 얼마 있다가 일본 바둑계의

거물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9단이 한국을 찾아와 한국기원 건물을 보고는 정말

부럽다면서 감탄을 거듭했다.

ㄴㄴㄴㄴㄴ

물론 지금은 많이 변했다. 한국기원은 관철동을 떠나 1994년 홍익동으로 이사를

갔다. 관철동 시절 바둑동네에서 살던 사람들은 사랑하는 관철동 건물을 한국

현대바둑의 요람으로 추억할 수 있기를 희망했으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관철동은 젊은이들이 먹고 즐기는 거리로 변했고, 옛 한국기원 회관은, 퇴락한

상태로나마 건물은 남아 있으나 추억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졌다.

ㄴㄴㄴㄴㄴㄴㄴ

칠순의 고령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바둑문화연구가 이승우

선생이 소식 하나를 전해주었다. 일본기원이 지하창고를 개조-수리해 바둑의

전당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둑과 바둑인을 위한 명예의 전당 같은 것.

ㄴㄴㄴㄴㄴㄴ

바둑사에 공적을 남긴 네 사람의 이름을 제1차로 올려놓았으며 앞으로 매년 4명씩

추가한다고 한다. 최초로 바둑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간 네 사람은 누구일까.

1번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다. 초대 본인방(本因坊) 샨사(算沙), 제4대

본인방 기성(棋聖) 도사쿠(道策), 제17대 본인방 기성 슈사쿠(秀策)가 그 뒤를 이었다.

ㄴㄴㄴㄴㄴㄴㄴ

난세의 영웅 도쿠가와는 바둑을 사랑해, 바둑의 고수 샨사를 군승으로 앉히고

'본인방'이라는 성(姓)과 녹봉을 내렸다. 1602년의 일이다. 이후 본인방 가문은

20세기 초엽까지, 300년 동안 수없는 명인-고수를 배출하면서 일본 바둑계를

이끌었다. 본인방은 일본 근대 바둑의 상징이자 기관차였다. 그 단초를 열어 준

도쿠가와와, 근대 바둑과 바둑 전문화의 개조(開祖)인 샨사가 첫차를 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둑사의 뉴턴과 같았던 도사쿠가 그 차에 동승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ㄴㄴㄴㄴㄴㄴㄴ

슈사쿠는 그 눈부신 기재(棋才)로 일찍이 차기 본인방 장문으로 내정되었으나

콜레라에 걸려 33세로 요절하는 바람에 정식으로 본인방 장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를 본인방이라 부르는 것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의 별명은 또 있다.

'영원한 프린스'다. 그게 더 걸맞은 별명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프린스 슈사쿠는

본인방의 봉우리 중에서도 뭇 봉우리들을 압도하는 걸출한 봉우리였다.

ㄴㄴㄴㄴㄴㄴㄴㄴ

내년에는 아마 우 칭위엔 9단이, 바둑사의 기성 세 사람 가운데, 도사쿠-슈사쿠의

뒤를 잇는 마지막 기성으로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우 칭위엔 9단이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면 이번에 같이 올랐을 것이라는 소리도 있으나 단견이다.

일리 있다 해도 장강의 거품 같은 것.

ㄴㄴㄴㄴㄴㄴㄴ

요즘은 한국의 실력이 제일이고, 중국이 한국을 바짝 따라오고 있으며, 일본은

정체와 서행을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일본은 보여줄 것이 있고, 보여줄 것을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에게는 근대 바둑은 편린만 남아 있고 현대 바둑은 역사가 짧다.

문화는 역사가 말을 한다는데, 쌓아가지 않고, 시도하지 않으면 역사는 물리적

시간이 될 뿐이고, 물리적 시간 위에서 문화의 꽃은 피어나지 않는다.

ㄴㄴㄴㄴㄴㄴ

이광구[바둑평론가

[관련자료2]

[바둑 한수] 고금의 명인을 가볍게 비교하면…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진다. 이창호 9단의 실력이 바둑 역사상 몇 번째가 될 거냐고. 지난

1980년대 중반엔 일본에서 조치훈 9단을 사상(史上) 최강의 기사라고 불렀다.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 평가했다.

고금(古今)의 명인들을 비교할 수 있는가? 있다. 옛 명인보다는 현대의 명인 바둑이 더욱더

 수준 높다. 우리는 백년 전보다 더욱 발전된 내용의 바둑을 둔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창호

가 1930년대의 오청원보다 더 잘 두는가? 1국을 이창호가 이길 확률을 70%라고 하자. 그러

면 2국을 이창호가 이길 확률은 60%가 될 것이며,3국은 50%가 될 것이다. 4국은? 그건 모

른다. 두 기사의 절대적인 재능과 상대적인 승부기질에 달린 것이다.

300년 전 중국 국수였던 황룡사가 이창호와 둔다면 어떨까? 답할 수 있다. 1국을

이창호가 이길 확률은 99%가 될 것이다. 2국은 98%,3국은 97%,…,75,72,67,55,

…. 아마도 그 정도에서 멈출 것이다.

이창호와 오청원은 70년. 이창호와 황룡사는 300년 터울. 바로 그 때문인가? 아니다. 그 때

문이 아니다. 그 시간 속에서 일어난 바둑관의 변천과 두터움의 이해,수법의 발전을 기준으

로 한 것이다.

이창호는 오청원이 만들어낸 바둑의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다. 1930년대 오청원이

발견한 신포석 패러다임은 70년이 흐른 지금까지 우리의 시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황룡사가 알던 세계는 힘바둑 패러다임이라 불리는 것으로 세계에의 인식이

우리와는 달랐다. 오청원을 아인슈타인에 비춘다면 황룡사는 뉴턴의 시대에 살던

사람이다.

오청원 선생은 말했다. 황룡사가 현대에 온다면 3개월 정도의 적응기간이 필요할 것

이라고. 그 후엔 곧 명인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라고. 오청원과 황룡사의 간격이 3개

월이라면 이창호와 오청원의 간격은 사흘에 해당된다. 왜냐? 이창호의 바둑은 오청

원의 기본적인 골격에서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의문하시는 분은 풀어보시라. 기보는 언제 적 바둑일까? 누구의 바둑일까? 중앙에서 백1 둔

장면이다. 답은 좌하귀에 있되 끝은 우상귀 흑16이다.

문용직[프로5단]

[관련자료3]

[바둑 한수] 돌아보는 근세 중국의 바둑

[국민일보 2005-01-13 15:07]

저번에 글을 썼다. 청나라 때 국수였던 황룡사(黃龍士)는 현대에 와도 명인이 될 것이라고.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왜 황룡사는 그리 잘 두었을까? 황룡사만 그러한가. 아니면 어느 시대나 명인은 존재하는 것일까.

ㄷㄷㄷㄷㄷ

솔직히 잘 모르는 영역이지만 가벼운 추론 하나 해보았다. 틀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행히 추론의 근거가 맞으면 하는 기대로 여기 글 하나 남긴다.

실력으로 볼 때 청대(淸代)는 중국역사에서 가장 빛나던 시대다. 당나라 때는 괜찮은 국수들이 나왔지만 뒤를 이은 송(宋),원(元),명(明) 때는 빼어난 국수들이 없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달랐다. 왜 그랬을까.

ㅈㅈㅈㅈ

나는 그 원인이 명말청초(明末淸初) 고증학(考證學)의 발전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닌가 본다. 공허한 송학(宋學)을 벗어나려는 한족(漢族) 지식인들의 태도가 바둑에도 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실로 그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지 않다.

ㅇㅇㅇㅇㅇㅇㅇ

첫째,고증학이 발달한 강남땅에서 태어난 국수급들이 많다는 것. 황룡사,서성우 등이 바로 그들이다.

ㄹㄹㄹㄹㄹ

둘째,겸산당혁보(兼山堂奕譜),혁리지귀(奕理指歸),매화천혁보(梅花泉奕譜) 등 수다한 대국보가 바로 이때 태어났다는 것.

ㅅㅅㅅㅅㅅㅅ

셋째,송나라 때의 망우청락집이나 명나라 때의 현현기경은 묘수풀이에는 정의입신세(精義入神勢) 등을,대국보에는 우선도(遇仙圖) 등 현실과 유리된 이름을 붙이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에 청대의 바둑책은 묘수풀이보다도 대국보를 중심으로 했으며 대국자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는 경향을 보였다.

ㅇㅇㅇㅇㅇㅇ

실로 청대의 바둑책은 실천에 관심이 많았던 고증학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자세였다. 고증학의 기본 정신은 고전을 실증적으로 밝혀 진실을 밝히려는 실용적 태도. 바둑도 강해지려면 실로 책 없이는 누구도 불가능하다. 책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아는 바를 가감없이 밝힌 것이다.

ㅇㅇㅇㅇㅇㅇ

나는 안타깝다. 휴대전화를 늘상 손에 들고 다니는 학생들과 내용없는 무가지(신문)를 읽는 청년들의 몽상적인 태도가 아쉽고 안타깝다. 황룡사가 둔 흑3의 맥점 정도는 보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흑3 이후의 수순은 백A 이하 흑H까지. 대단한 수읽기요 감각이다.

문용직 프로 5단

 

[i진선 한 마디]

바둑 통달인의 upkorea님의 글 입니다.고개가 끄덕이져지요^^::?

2편을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립니다. 내용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칼럼에서 언급한 글의 원문을 관련자료로 첨부합니다.

 

꾸벅

 

[관련자료3]은문용직님의 가장 최근 글이라서 첨가했습니다^^::

 

TYGEM / i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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