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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라이프
<1989년의 첫 도전기>
아무튼 창호는 서봉수를 쉽게 넘어선 덕분에 88년 생애 처음
도전자가 되었고 스승 조훈현 9단과 대망의 5번기를 펼치게 됐다. '도전 5강'이 젊음을 다 바쳐 넘으려 했으나 끝내 넘지 못한
서봉수라는 벽을 창호는 이런 식으로 쉽게 넘어선 것이다. 1989년 벽두에 스승 조훈현 9단과 어린 제자 이창호의 도전기가
화제속에서 시작됐다. 사람들은 승패보다도 두사람이 어떤 심정일까 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었다. 두사람은 아침에 조훈현의 부인
정미화씨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나란히 타고와 함께 대국장으로 올라갔다. 대국 개시까지 曺 9단은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주위사람들과 느긋하게 대화를 했다. 그 앞에서 창호는 고개를 푹 숙인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린 제자와 승부를
겨룬다는게 몹시 부담스러웠다. 주위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곧 잊어버리고 좋은 바둑을 두자고 생각했다." (조훈현) "괜히
죄송스럽고 거북했다. 등에서 식은 땀이 났다." (이창호)
曺 9단은 徐 9단과 달리 창호를 아직 자신의 적수로 여기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판 가르친다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창호는 쏟아지는 시선과 카메라 프래쉬에 우선 주눅이 들었다. 창호는
그리하여 스승과의 도전기 첫대국을 불과 80수만에 던지고 만다. 첫 도전기는 1승 3패로 끝났다. 하지만 내용은 자못 충실해서
제3국에선 아슬아슬한 승부 끝에 창호가 반집을 이겼고 제4국에선 화려한 대사석작전으로 국면을 리드하기도 했다. 창호는 3월에 또한번의
도전 기회를 잡았으나 이번엔 스트레이트 3연패. 바둑계 인사들은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 : 어린 비둘기 아직 재를 넘지
못한다)란 옛 문자를 들먹이며 창호가 인물은 인물이지만 조 9단에겐 아직 멀었다고 평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해에 서봉수가
조훈현을 격파하고 국기(國棋) 타이틀을 쟁취한 일이다. 徐 9단은 창호에게 꼼짝 못하고 창호는 曺 9단에게 꼼짝 못하는데 徐 9단은
어찌 조훈현을 이길 수 있었을까. 승부는 기술인가. 마음의 조화인가. 자신감이 없이는 바둑을 이기지 못한다. 빈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상대와 마주 앉을 때 승부는 이미 절반은 결정나고 만다. 승부는 물론 기술이다. 그러나 기술이 비슷하거나 아주 작은
차이일 때는 마음이 승부를 결정하게 된다.
[흑도의 소년이 주는 두려움] 1988년 창호는
연간 최고승률, 최다승, 최다대국, 최다연승 등 기록 4부분에서 모두 1위를 한다. 바둑연감을 보면 이때 세운 88.24%의 승률은
아직까지 한국기록으로 남아있다. (김인 9단이 61년 20승 2패로 90.9%의 승률을 기록했으나 규정대국수에 미달되어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창호는 이 88년부터 25연승을 거두는 등 두면 이기는 소년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확실히 새겨진다.
창호는 '지지않는 소년'이었고 '기록제조기'였다. 어린 창호는 마치 마법을 지닌 소년처럼 선배 프로들의 가슴에 공포를 심기
시작했다. 아직 꼬마인데도 노인과 같은 승부호흡을 보여주는 창호에게서 '흑도(黑道)'의 이미지를 느꼈다. 프로들은 창호의
불가사의한 인내와 행적을 지켜보며 저 땅 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볼 때 같은 두려움에 빠져들곤 했던
것이다. 1989년 4월에 창호는 드디어 한국대표로 후지쓰배에 출전하게 된다. 창호로서는 이것이 세계대회 첫 출전이었다. 도꾜
한 호텔의 넓은 홀에서 추첨식이 거행됐다. 사회를 맡은 늘씬한 여성 아나운서는 아직 뚱뚱하고 조그만 꼬마에 불과한 창호를 보고 이런
아이가 어떻게 세계바둑대회에 나왔을까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그녀는 일본 여성 특유의 싹싹한 어투로 창호의 상대자로 뽑힌
왕밍완(王銘琬) 9단에게 "아직 어리니까 살살 좀 다뤄주세요"라고 말했다. 한국기사들과 관계자들은 "그렇게는 안될걸, 어디
혼좀 나봐라."하며 속으로 웃었다. 왕밍완 9단은 최근 일본의 본인방이 되는 등 강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으나 당시만 해도 정상급에겐
한수 처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에 비할 때 창호는 비록 조훈현에겐 졌지만 창호의 저력으로 미뤄볼 때 왕밍완이 크게 고생할
것이고 무척이나 당황하게 될 것이란 확신 같은 것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다.
[어디 한번 혼좀 나봐라 - 세계대회 첫 출전]
그러나 이튿날 창호는 계산의 명수요, 돌부처다운 끈질긴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매우 싱겁게
져버렸다.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창호를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일까. 그렇더라도 국내 강자들이 창호를
동자귀신 보듯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승부가 끝나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반집승부를 내다보고 인내를 하는 그의 계산력과
불가사의한 정신력은 김인 9단도 일찌기 인정한 것이 아닌가. 한데 어찌하여 왕밍완 정도에게 그리 쉽게, 허무하게 질 수 있단
말인가. 王 9단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선 우리가 이창호에 취해 이창호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 반성도 했다. 무엇보다도 창호는 그 여성 아나운서의 말 그대로 아직은 14살 어린 아이였으니까 말이다.
이후로도 창호는 외국무대에 나가면 잘 졌다. 처음 보는 상대에겐 특히 약했다. 1992년 이후, 그러니까 한국에서 1인자가 된
뒤에도 중국의 차택무(車澤武)라는 무명기사에게도 졌고 중국을 떠나 막 유랑을 시작한 여성강자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에게도
완패했다. 이바람에 창호라는 천재 소년을 실컷 자랑하고 그의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크게 놀래주고 싶은 우리의 기대감은 번번히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렇다면 창호가 외국에만 나가면 힘없이 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똑같은 세계대회라도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에선 창호가 강했다)
[창호의 해외징크스]
창호는 비행기 타는 것을 꺼려했고 낯선
곳에서 자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도 거북해했다. 이중에서도 비행기는 창호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창호는 바둑에서 보듯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승부사에게 이런 표현을 하면 믿기지 않겠지만 필자는 창호가 겁이
많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겁이 많은데 어떻게 승부사냐고 되묻는다면 이렇게 답변하고 싶다.
"본래 하수의 특징은
겁이 없다는 점이다. 두려움을 모르면 일류 승부사가 아니다. 두려움을 알되 그걸 뛰어넘는 자가 최고의 승부사다."
아무튼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창호에게 비행기라는 존재는 매우 싫고 불확실한 존재였다. 창호는 비행기를 꺼렸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면 스트레스를 받아 배탈이 나곤 했다. (창호는 외국을 자주 다니는 지금도 국내 지방대국에선 무조건 기차를 타고 다닌다)
이런 고약한 컨디션에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나면 창호의 그 무서운 집중력도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창호가 외국에 가서 유일하게 찾는 곳은 전자오락실이었다. 아버지 이재룡씨가 항시 동행하며 돌봐줬지만 이재룡씨 역시
사람들과 어울리는 형이 전혀 아니어서 두 부자는 조용조용 방에 있거나 전자오락실에 가거나 했고 식사도 여럿이 어울리는 곳을 피했다.
(나는 창호가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 힘든 성격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물론 잘못됐다. 창호는 머지않아 누구보다
팬들과 잘 동화하고 후배들과도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게 됐으니까.) 외국에 가면 배탈이 자주 나서 처음엔 창호의 식성이
몹시 까다롭구나 짐작했으나 본인에게 물어보니 의외로 "라면이건 뭐건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했다. 배탈의 원인은 비행기와 낯선
시선, 즉 '외국'에 대한 스트레스였다. 부동심(不動心)의 달인이라는 창호에게도 이렇게해서 하나의 장애물이 생겼으니 그것이 곧
'해외징크스'였다.
[전략가 이창호]
창호는 이무렵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처음 보는 외국
기사에겐 거의 졌다. 그러나 두번째 만나면 거의 이겼다. 창호에게 '전략가'란 별명이 붙게 된 것은 이때문이었다. (창호는 한번 지면
약한 상대라도 내가 왜 졌고 상대의 강점은 무엇인가 면밀히 연구한다. 화가 나서 진 바둑을 쳐다보기도 싫어하는 기사도 있는데 창호는
정반대였다. 창호는 이윽고 상대의 장점과 약점, 자신의 실책들을 확인하고 그걸 머리 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가 다음에 만나면 여지없이
깨뜨렸던 것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창호를 전략가라 부르게 되었지만 사실은 프로기사라면 누구나 이런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훈현 9단에게 지고 일본에서도 졌으나 창호는 다시 줄기차게 승수를 쌓고 있었다. 밤이 되면 선생님의 바둑을
연구했다. 선생님은 그의 마음속에 거대한 장벽으로 가로막고 있었고 강한 승부심을 지닌 창호는 반드시 선생님을 뛰어넘고 싶었다. 창호가
曺 9단의 바둑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리하여 창호는 드디어 조훈현이란 거대한 벽을 넘어서게 되지만 그때가
되서도 일본은 이창호의 바둑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평했다. "이창호가 일인자라 하지만 아직은 이른 감이
있다. 이창호의 바둑은 조훈현만을 이기기 위해 만들어진 느낌이고 그것이 다른 기사에게도 유용한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창호의 바둑엔 분명 그런 요소가 있었고 또 일본에서의 전적이 영 나빴기에 일본이 그런 의심을 하는 것은 일면 타당한
점이 있었다.
[생애 첫 타이틀은 KBS 속기에서]
1989년 8월 8일, 창호는 드디어
KBS - TV가 주최한 바둑왕전 결승전에서 김수장 9단을 2대 0으로 꺾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만 14세에 세계최연소 타이틀홀더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승부세계에는 "우승해본 사람이 우승한다."는 말이 있다. 우승 문턱에서 아깝게 좌절하는 기사들은 많다.
바둑 내용만을 보면 이긴 것과 전혀 다름없는 패배로 인해 아깝게 우승을 놓친 기사들이 많다는 얘기다. '도전5강'이 바로
그렇고 김수장 9단도 그중 한사람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도전5강이란 조훈현 1인체제, 나아가 曺 - 徐시대를 제발 좀 끝장내 달라는
팬들의 염원으로 탄생한 이름이다. 그 5명의 이름은 장수영 9단, 서능욱 9단, 김수장 9단, 강훈 9단, 백성호 9단등이다.
백성호 9단 대신 정수현 9단등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튼 이들은 무수히 결승전에 올라갔고 도전기를 치렀다. 그러나 큰형에
해당하는 장수영 9단은 준우승만 8회, 서능욱 9단은 준우승만 무려 13회를 했다. 김수장 9단도 준우승만 3회, 정수현 9단도
한번의 준우승. 강훈 9단은 준우승을 7번 했지만 우승도 딱 한번 했다. 이것이 바로 도전5강의 유일하고도 귀중한 우승이다.
바로 1986년 박카스배에서인데 그러나 결승전 상대가 조훈현 9단이 아니고 이미 정상에서 밀려난지 오래된 김인 9단이라서 조훈현을
꺾는다는 '도전5강'의 정신과는 거리가 있었다. 강훈의 단 한번의 우승을 끝으로 도전5강은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져갔다.
그들은 조훈현과 서봉수라는 두 장벽을 넘는데 끝내 실패했을 뿐더러 뒤를 치고 올라온 유창혁과 이창호라는 두 강력한 신예에 쉽게 덜미를
잡혔다. 김수장 9단이 이창호 9단에게,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김수장 7단이 이창호 4단에게 속기바둑 결승전에서 패배한 사건은
말하자면 '도전5강'의 완전한 퇴진을 의미하는 이정표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또한 이창호가 세운 '14살, 타이틀획득'의 기록은 다시는
깨지기 힘든 전무후무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바둑계를 흥분시켰다.
[이창호라는 불가사의, 그리고 살인적인 대국수]
창호가 주는 또다른 이미지 즉, 뚱뚱하고 말이 분명치않고 눈빛이 흐릿하고와 같은 바둑 고수답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뭔가 분명치 않은 기색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4살 우승'은 창호가 진정 놀라운 천재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시켜줬다. 어느 누구도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 '14살'이란 나이가 바둑에
종사해온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던져준 것도 사실이다. 필자 역시 "바둑은 진정 도(道)나 예(藝)라 할
수 있는가. 바둑이 예도라면 어떻게 세상 경험도 전무한 14살 소년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단 말인가."하는 격렬한 의구심에
휩싸이곤 했다. 필자는 이무렵 곧잘 불가사의(不可思議)란 단어를 사용하곤 했다. 사실 창호는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하지만
창호는 불가사의란 네글자로 덮어버리기엔 너무도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1988년에 최고승률, 최다승, 최다대국에 연승부문마저
휩쓸었던 창호는 1989년에는 전반 6개월동안에만 무려 67국을 두어 53승 14패라는 발군의 기록을 세운다. 이창호는 이해에
모두 111국을 두어 84승 27패의 전적을 거두는데 이 111국은 연간최다대국 부문에서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다. 4단시절인지라
창호는 거의 모든 기전에서 1차예선부터 참여했고 계속 이겨 타이틀전까지 치렀기 때문에 대국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던 것이다.
어린 소년의 이같은 '살인적인 대국'은 '기사생명 단축'과 결부되어 바둑가의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창호는 그러나 이듬해인
90년에도 109국을 두었고 오늘날에도 매년 70국 이상의 많은 대국을 소화하고 있다. 주위에선 작은 기전엔 나가지 말라고 하고
본인도 그랬으면 하는 눈치지만 대회를 주최하는 측에선 최고 인기기사인 이창호를 반드시 출전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거절을 못하는
이창호로서는 힘든 강행군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본인이 힘들게 출전을 거절하는 경우 선배기사를 통해 출전 교섭이
들어오고 그러면 창호는 결국 굴복하여 대국에 나서곤 했다. 다행히 어렸을 때 우량아 상을 받았던 타고난 체력이 창호에겐 큰 도움이
되어왔으나 1989년에 기록된 연간 111국이란 이 살인적인 대국은 앞으로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기록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젠 창호가 알아서 하겠지"]
이창호가 '기록제조기'란 새로운 별명과 함께 바둑판
361로(路)의 난제들을 일직선으로 돌파해가고 있던 1989년 9월, 싱가포르에선 한국의 최강자 조훈현 9단과 중국 최강 네웨이핑
9단의 제1기 잉창치(應昌期)배 결승전 최종국이 벌어지고 있었다. 2대 2에서 벌어진 마지막판. 서울과 베이징(北京)은 이 한판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결과는 曺 9단의 불계승. 한국바둑계에 전대미문의 대사건이 벌어졌다. 서울의 매스컴은 만화와 사설까지 바둑으로
뒤덮혔다. 조훈현의 집에 TV 카메라 부대가 들이닥치고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처럼 조금은 유치하고 조금은 감동적이기도 한 가족들의
만세 장면과 손가락으로 'V'자 그리기 장면을 촬영했다. 그날 밤 늦은 시각, 曺 9단은 불도 켜지 않은채 호텔방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우승컵이 한쪽에서 웅크리고 있었고 테이블엔 40만달러짜리 수표가 든 하얀 봉투가 뎅그렇게 놓여 있었다. 曺 9단은
말이 없었다. 고요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가 방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신문기사를 위해 曺 9단의 심정을 들어보려 들렀던 나는 바다 밑
같은 분위기에 동화되어 함께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있던 曺 9단이 어둠속에서 침묵을 깼다.
"이젠 창호가 알아서 하겠지"
曺 9단의 말은 뜻밖이었다. 그말에 응축되어 있는 뜻은 풀이하자면 이랬다.
"일본과 중국 바둑은 하늘처럼 높아서 우리의 상전 같은 존재였지만 나는 그들을 물리쳤다. 이렇게 물리치리라고는 나 스스로도
믿지 못했지만 기적같이 그 일을 해냈다. 앞으로는 누가 그 힘든 일을 해낼까. ······그 일은 그만 생각하자. 창호가 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曺 9단의 어투는 착 갈아앉아 있어 40만달러짜리 우승컵을 막 따낸 사람치고는 어딘지 우울해 보인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승부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에 뜻밖에도 창호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의 어조는 차분하여 묘한 서글픔마저 띄고
있었던 것이다.
"창호는 믿을만한가" 하고 내가 묻자 曺 9단은 "그럼, 믿을만하지." 했다. 9살 때
프로생활을 시작하여 근 30년간 쉬지않고 달려온 曺 9단은 인생의 정점에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빛나는 성공,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온 오랜만의 휴식에 망연해졌던 것일까. 문득 외로워졌던 것일까. 아니면 이제부터 끝없이 이어질 제자 이창호와의 피나는 승부를 이때
이미 본능적으로 예감했던 것일까.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의 예감]
한국에서 바둑은 3번의
도약을 통해 스포츠 등 다른 분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1980년 조치훈의 명인쟁취가 처음이었고 1989년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이 두번째였다. 세번째가 이창호의 등장인데 이중 가장 화려하고 요란했던 것은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이었다. 그는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장내를 가득 메운 기자들 앞에서 거창한 회견을 했고 꽃다발을 목에 걸고 시내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이런 식의 카퍼레이드는 한국에서
조 9단이 마지막이었다. 曺 9단은 이튿날인가 TV 출연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방송국에 나갔다. 집을 비워둔 채였다. 그날 曺 9단
집에 도둑이 들었다. 절묘하게 허를 찌른 날카로운 도둑이라며 웃고 말았지만 참으로 씁쓸한 사건이었다.) 曺 9단은 서울에
오자마자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를 차례로 무찌르고 3연속 타이틀방어에 성공했다. 응씨배 우승을 통해 曺 9단은 더욱 강해진
느낌이었다. 바둑계에선 '19로의 마술사'라 불리던 그에게 '바둑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선사했다. 바로 이무렵, 그러니까
프로입단 3년째인 89년 12월에 이창호 4단이 다시한번 최고위전의 문을 노크하며 슬며시 나타났다. 어언 4번째 도전이었다. 12월
11일의 첫판에서 창호는 놀랍게도 6집반승. 이창호는 영화속의 로마군처럼 큰 방패를 일렬로 세우고 창날만 내민채 착착 진군해 曺
9단을 쓰러뜨렸다. 바둑이 시작되기 전에 창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특유의 죄송한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바둑이 시작되자
철가면을 쓴 기사처럼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일년 전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4번째 도전 - 철가면을
쓴 이창호]
제2국은 그러나 曺 9단의 불계승. 혼전에 말려들어 손쓸새 없이 져버리고 말았다. 3국에선 다시
이창호의 불계승. 이판에서 창호는 명국이라 할만큼 완벽한 바둑으로 승리를 거뒀다. 창호가 2대 1로 앞서자 바둑계 인사들은 문득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늙은 스승이 제자에게 지고 나서 허허 웃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스승이 정상의 위치에
있을 때 제자가 진검승부를 펼쳐 그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바둑이건 스포츠건 다른 분야에선 본 적이
없다. 스승이 제자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는 모습은 이것도 인연이요, 운명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낯설고 이상하여
상상하기조차 힘든 모습이었다. 바둑계 밖에선 이창호라는 정체불명의 소년과 스승 조훈현의 맞대결을 놓고 벼라별 얘기가 다
떠돌았다. 몇몇 팬들은 제자가 어떻게 스승을 이길 수 있느냐, 바둑계는 예의도 없느냐고 한국기원에 항의했고 그럴 때면
한국기원은 "일본 바둑계에선 제자가 스승을 이기면 은혜를 갚는 것이 된답니다."고 대답해줬다. 그러나 일본에선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얘기는 늙그막의 스승이 제자와 만나 대국을 벌이고 제자가 힘없는 스승을 꺾어 잘 배웠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을 두고
은혜를 갚는다고 말한 것이다. 정면 승부를 펼쳐 제자가 이기는 것을 말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스승과 제자가 피나는
승부를 벌인 경우는 조훈현 - 이창호가 바둑 사상 처음이었다. 용호상박의 싸움끝에 최종국인 제5국이 1990년 2월 2일
관철동의 한국기원에서 열렸다. 포석에서 뒤진 이창호는 시종 비세에 몰렸으나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인생역정을 무수히 겪어본
장년의 승부사처럼 자리를 꽉 차고 앉아 괴이하고 줄기찬 승부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창호는 결국 자신의 능기인 '장구(長久)한
기다림'과 '완벽한 계산력'을 십분 발휘하여 역전 반집승을 거두게 된다.
[4번째 도전 - 철가면을 쓴
이창호]
그렇다. 반집이었다. 이창호가 이후 무수히 엮어낼 반집의 드라마. 수많은 초일류 기사들을 악몽 속으로
몰아넣었던 반집 역전승의 드라마는 이렇게 첫번재 테이프를 끊었다. 창호는 이리하여 생애최초로 신문기전에서 우승했다. 공교롭게도
최고위(最高位)는 20년전 曺 9단이 타이틀 사냥을 시작할 때 최초로 손에 넣었던 바로 그 타이틀이었다. 이튿날 매스콤은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이창호 보은(報恩)의 타이틀획득']
1990년에 접어들자 신문의 바둑란에 '4인방시대'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의 4강시대라는 뜻인데 왜 의미가 좋지않은 '방(坊)'자가 들어가게
됐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정치에서의 오랜 독재가 빚어낸 언어의 굴절현상일까. 높은 사람들이 지겹도록 싫은 나머지 바둑에서 정상에
군림하는 4사람의 강자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일까. 지금까지도 서울에선 이 네사람을 4인방으로 부르고 있지만 한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중국만은 문화혁명시절 악역을 담당했던 4인방과 구분하여 4천왕(天王)이라 부르고 있다. 아무튼 4강시대라지만
타이틀전에 관한한 조훈현의 아성을 여전히 철옹성이었다. 그러나 창호는 만 15살 때인 1990년 2월 27일부터 8월 31일까지
6개월동안 국내기전에서 무려 41연승을 거두어 바둑계를 경악시켰다. 이것 역시 신기록이었다. 그때까지 연승기록은 김인 9단이 25살
때인 1968년에 세운 40연승. 하지만 당시는 강자가 적던 시절이라서 이창호의 41연승은 더욱 돋보이는 기록이었다. (10년후
이세돌 3단이 32연승을 세우며 역대 연승기록 3위에 오른다. 조훈현 9단은 전관왕을 3번이나 해치운 사람이지만 연승기록은
1977년의 31연승이 최고다.) 우물안 개구리 소리를 듣던 창호가 이무렵부터 해외대국에서도 드디어 호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박치문
[중앙일보 전문위원]
윗 글의 전문은 이창호 홈에있습니다. 이창호 9단의 성장기중 가장 인간적인 면이
두드러진 글을 선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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