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새해벽두를 화려하게 장식한 빅이벤트 제7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결승3번기는 예상을 깨고 '영원한 바둑황제' 조훈현의 완승으로 끝났다.

조훈현 9단이(오른쪽 두번째) 삼성화재배 2연패에 성공한 뒤 우승상금 증서를 수여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조훈현 9단의 이번 '베이징대첩'은 지난 대회 '상하이대첩'에 이어 2년 연속 적지(敵地)에서 중국 최강들을 격파하고 이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난 연말연시 폭주하는 대국일정 속에 과로와 몸살을 앓으며 조한승, 송태곤 등 새까만 후배들에게 연패를 당하면서 기사생활 사상 최대 위기를 맞이했던 조9단으로서는 체력의 핸디캡, 연패에 따른 슬럼프조짐, 그리 | 고 어웨이 경기의 핸디캡이라는 최악의 역경을 딛고 또다시 세계제패에 성공함으로써 불세출의 승부사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특히 거센 중국돌풍 속에도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중국세를 정면돌파하고 한국바둑의 자존심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그가 한국바둑을 세계정상에 올려놓은 89년 '싱가포르대첩(초대 응씨배 제패)'에 견줄 만한 '쾌거'로 꼽히고 있다.
조훈현 9단의 이번 우승은 기록적인 면에서도 여러가지 기록을 양산해냈다. 먼저 개인적으로는 삼성화재배 2연패, 통산 9번째 세계제패, 157번째 타이틀 획득의 위업을 이뤘다. 이창호 9단(통한 15회)에 이은 두 번째 최다 세계대회 우승 기록. 특히 돋보이는 것은 세계대회 결승에서 외국 기사에게는 단 한번도 진 적이 없는 '불패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조9단은 지금까지 모두 11회 세계대회 결승에 올랐는데, 국내 후배인 유창혁 9단(93년 후지쯔배, 2002년 LG배)에게만 패한 바 있다.
이번 조9단의 우승으로 한국은 지난 2000년 후지쯔배 이후 계속해온 국제기전 우승행진을 '18'로 늘리며 세계최강의 입지를
한층 강화했다. 아울러 곧 다가오는 농심배와 도요타덴소배에서도 우승이 유력시되는 데다 올봄에 열릴 예정인 LG배에서는 4강 싹쓸이로
이미 우승을 확정지은 상태여서 한국의 V 질주가 과연 어디까지 계속될지도 관심거리가 되었다.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지난 6회 대회 결승에서 중국의 에이스 창하오(常昊) 9단을 꺾고 우승한 데 이어 이번 베이징(北京) 결승전에서도 현 중국 랭킹1위 왕레이 8단을 제압함으로써 2년 연속 적지에서 중국 최강자들을 연파했다는 점도 조훈현 9단의 괴력을 새삼 실감케 한다.
오랫동안 조9단을 수행하여 승부현장의 취재를 해온 중앙일보 박치문 전문기자(삼성화재배 관전필자)는 "조훈현 9단은 한국팬들의 기대가 집중된 승부, '반드시 이겨야 하는 승부'에서는 한번도 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조9단의 승부근성을 높이 평가했다.
조훈현 9단은 이번 대회에서 중국 기사들에게만 5연승을 거두었다. 본선 1, 2회전에서 신예유망주 왕시(王激)와 펑첸(彭筌) | 
조훈현 9단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승부'에서는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놀라운 승부근성의 면모가 있다. (사진은 삼성화재배 결승2국에서 승부한 후 복기하는 장면) | | 을 연파한 데 이어 8강전에서 뤄시허(羅洗河)에게 기적같은 역전드라마를 일궈내며 기사회생한 후 4강에서도 최대돌풍의 주역 왕위후이(王煜輝)마저 2대0으로 일축했다.
이창호, 유창혁, 이세돌, 박영훈 등 한국의 간판스타들이 모조리 중국돌풍에 휘말려 전멸한 가운데 중국돌풍의 주역들을 모조리 꺾고 우승까지 일궈냈기에 그의 분전은 더욱 돋보인 것이다. 이같은 '중국킬러'로서의 면모 때문에 중국 현지에서는 조9단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눈부신 활약에 매료된 팬들이 급증하고 있기도 하다. 찬스를 살리는 '결정력' 차이가 승패 갈라
큰 승부 경험부족 왕레이, 지나친 긴장이 패인
이번 결승3번기는 당초 조9단의 힘겨운 싸움이 점쳐졌던 것이 사실이다(국내 바둑팬들을 의식하여 비관적인 전망을 삼갔지만).
조9단이 국내 특급 신예들의 연합공세에 시달리며 과로와 몸살, 그리고 컨디션 난조 속에 연말연시를 보낸 반면, 지난해 중국 랭킹1위로 떠오른 왕레이 8단은 중국리그 승률왕까지 차지하며 절정기를 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국 장소도 왕8단의 홈링인 베이징임에랴.
조9단 스스로도 대국 전까지 "왕레이 8단은 승부의 3대 요소인 실력, 기세, 컨디션 등이 모두 최상인데 반해 나는 최악"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상당수 전문가와 팬들은 "이번만은 정말로 위험한 것 아닌가"하는 우려와 걱정의 시선을 보냈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조9단의 2대0 완승으로 나타났다.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예상 밖의 결과를 연출한 괴력의 원천은 위기일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승부근성과 투혼이라고 할 수 있다. 조9단의 승인(勝因)에 대해 현지 취재 차 동행한 박치문 중앙일보 전문기자는 "큰 승부일수록 불붙은 기차처럼 돌진하는 기세(氣勢)"라고 꼽았고, 이홍렬 조선일보 전문기자는 "위기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투혼"을 꼽았다.
| 우선 기(氣)싸움에서 조9단이 한 수 위였다. 대국 전날 기자회견까지도 "이기는 것을 잊어먹었다" "한판 건져 3국까지 가면 다행"이라며 겸손해하던 그는 정작 1국이 시작되자마자 초장부터 싸움닭처럼 달려들었다. 그의 쉴 새없는 인파이팅에 침착하고 전투력 강하기로 소문난 왕레이는 위축된 모습을 보였고, 그것이 승패와 직결되었다. 2대0 스코어가 나왔다고 해서 이번 결승이 조9단의 일방적인 압승이었던 것은 아니다. 왕레이 8단에게도 찬스는 많았다. 1국에서도, 2국에서도 조9단은 줄곧 대세를 리드하면서도 중후반 접전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수를 거듭했고, 그 때문에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하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왕레이 8단은 찬스를 살리지 못했다.
조훈현 9단 스스로 수 차례 토로했듯 "실수를 계속 하는 바람에 왕레이 8단에게도 여러 번 찬스가 있었는데, 놓친 것 같다"면서 "이창호 9단이나 요즘 잘 나가는 국내 신예정상급한테 이런 실수를 했다면 어김없이 목이 달아났을 것"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말하자면, 찬스를 '골'로 연결시키는 '결정력'-이 차이가 이번 삼성화재배의 주인을 결정한 셈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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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서 타이젬의 인터넷 생중계 해설을 맡았던 양재호 9단은 "큰 승부의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평소 끈기가 강하고 침착하기로
소문난 왕레이가 매우 긴장한 것 같았다"고 왕8단의 패인을 분석했다.
기사로는 환갑, 진갑 지났다고 치부하는 오십줄에 들어서도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집념으로 세계 무대를 호령하고 있는 불세출의
승부사, 조훈현- 그의 세계제패 행진은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TYGEM/김창호 gigung@tyge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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