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라이트]
바둑사에 남을 이창호의 '덜컥수'
마침내 견고하던 '이창호 아성'이 이세돌의 파상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번 결승시리즈의 일관된 흐름처럼 오늘 바둑에서도 이창호는 지나치게 이세돌을 의식한 탓인지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어이없는 실책을 범하며
허망하게 무너졌다.
반면, 상대의 작은 실수를 어김없이 낚아채 승리의 결정타를 꽂아버린 이세돌의 '결정력'과 '찬스포착력'이 새삼 돋보였다.
조치훈, 마샤오춘, 창하오…. 그동안 수많은 일류기사들이 그 '결정력' 부족으로 이창호의 벽을 넘지 못했던 사실을 상기해볼 때
이세돌은 세계정상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리라.
엎치락뒤치락!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승부의 파노라마로 팬들을 열광시킨 명승부의 승부처를 조명해본다.
[제7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4국]
○이세돌 3단 (2승1패) ●이창호 9단 (1승2패) <2003.
3. 27, 294수 끝, 백 7집반승>
장면1(이창호답지 않은 과속)
흑 실리 VS 백 세력으로 갈린 포석. 백1로 품을 넓히자 이창호 9단은 대뜸 흑2로
푹! 들어갔다.
삭감이라기보다는 침투에 가까운 대담한 돌입! 그러나 역시 백세의 위력을 과소 평가한 과속이었다. 백3을 얻어맞아서는
꼼짝없이 '딱지'를 떼인 모습.
이창호가 초반부터 자기 페이스를 잃은 채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과수였다.
참고도1-1(적정한 삭감)
흑1로 한발 덜 들어가는 것이 적정한 삭감선. 그래놓고 A와 B를 맞보는 것이 유연한 태도였다.
실전진행1-1(수렁에 빠진 흑)
흑1에 백2로 사정없이 덮어가니 흑은 답답하지 그지없다.
궁지에 몰린 이창호 9단은 혼신의 힘을 다해 타개에 나선다. 흑21까지 패를 만들어 타개에 성공하는 듯 했는데, 백26으로
쑤욱 나오니 갑자기 얼굴이 벌개졌다.
왜일까?
참고도1-2(백, 대우세)
흑1로 막고 싶지만, 백2로 따낼 때 응수가 없다. 흑3의 팻감 정도로는 빵빵 따낸
좌중앙 백진의 막강 두터움을 당해낼 길이 없다.
이래서는 백의 압승지세!
참고도1-3(흑, 망함)
따라서 흑1로 패를 해소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백2로 몰 때 흑3으로 이을 수 없다는데 있다. 백4면 연단수 아닌가!
바로 이것이 이창호의 착각이었던 것.
실전진행1-2(백, 우세확립)
백2의 단수를 받지 못한 채 흑3으로 돌아섰으나, 백4로 요석 석점이 떨어져서는 흑이
크게 당한 모습(●들도 저절로 폐석화).
백10까지 기분좋게 틀어막고 백12에 선착해 백의 우세가 두드러진다. 결국 흑의 과감한 중앙침투는 대실패로 돌아갔다.
장면2(이세돌의 과속)
초반 좌변에서 이창호가 과속을 범해 대세를 그르쳤다면, 중반에는 공교롭게도 이세돌이 나도
질세라 과욕을 부려 평지풍파를 일으킨다.
백3이 욕심사나운 수. 그렇잖아도 비세에 허덕이던 흑은 백이 스스로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자 고마울 따름이다. 흑14로
강력히 반발해 점입가경!
참고도2-1(백, 무난한 승세)
중앙이 두텁고 형세가 넉넉한 백으로선 굳이 이 좁은 곳에 뛰어들어 고난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백1 정도로 지켜 충분했던
것.
그러나 강렬한 기풍의 이세돌 3단에겐 이 그림이 너무 밋밋했을까.
실전진행2-1(백, 무리수 연발)
응수가 궁해진 이세돌 3단, 이번에는 왼쪽에서 수단을 부린다. 그러나 흑6까지 받아주자
백 별무소득. 내친걸음, 백7로 강력히 몰았는데, 이 수가 졌으면 패착이 될 뻔한 과속이었다. 흑8로 따내자 백 응수두절!
공연한 손찌검의 연속으로 백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
참고도2-2(백, 냉정한 태도)
지금이라도 백1로 잇는 것이 냉정했다. 흑2때 백3~7로 살아두었으면 그런대로 수습한 모습.
이 정도로는 양에 차지 않았을까.
참고도2-3(백의 차선책)
A로 되몬 수로는 백1·3으로 처리하는 것이 지금이라도 차선. 그랬으면 ▲을 싸안으며 수습해서 여전히 백 우세.
그런데,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탓일까, 이세돌은 여기서 좀처럼 브레이크를 밟지 못했으니….
실전진행2-2(형세역전, 흑 우세)
백1로 굴복할 수밖에 없어서는 조짐이 심상치 않다. 흑2·4로 뚫리자 백의 실패가 드러나고
있다.
백5로 패를 걸어 좌변과 바꿔치기했으나, 흑10까지 하변 백대마가 몰살당해서는 백의 대실패! 좌변과 하변은 집수로는
비슷하지만, 문제는 중앙 백의 두터움이 모두 지워졌다는 데 있다. 더구나 흑으로선 흑▲까지 거저 얻은 셈 아닌가.
당연히 형세역전. 이제는 오히려 흑의 필승지세로 돌변한 것이다.
장면3(이창호, 덜컥수 연발)
우상과 상변에서 저돌적인 추격전을 벌였지만, 양쪽 흑이 깨끗이 수습해버리자 완연히 흑의
승세.
'결국 최종국까지 가는구나.'
흑의 주인이 다름아닌 종반의 달인 이창호인지라 이 무렵 모두들 흑승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는데….
백1·3이 이세돌의 마지막 노림수. 그런데, 천하의 이창호가 이 수에 그대로 걸려들 줄이야.
흑6·8이 잇달은 덜컥수! 백9로 죽었던 것처럼 보이던 미이라(○)가 꿈틀하자 국면이 다시 요동치고 있다. 문제는
백A의 뒷맛!
참고도3-1(흑의 필승코스)
A에 치받은 수로는 흑1로 늦추어야 했다. 그랬으면 백B의 뒷맛이 완전 소멸되면서 ○들도
확인사살된다. 그리고 아마도 몇 수 안가 백은 돌을 거두었을 것이다.
흑A와 1은 불과 1집 차이. 지금 1집 정도는 인심을 써도 흑승에는 지장이 없다.
참고도3-2(흑의 차선책)
기회는 또 있었다. 백1로 끊었을 때라도 흑2로 내려섰으면 그만. 그랬으면 A의 부담이
남아 하변은 별 이상이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조심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돌다리를 두들겨보고도 건너지 않는다'는 '신중' '안전'의 대명사 이처럼
덜컥수를 연발했다는 점이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상대가 계속 긁어오자 그토록 잘 참는 이창호도 발끈했을까.
실전진행3-1(대형사고 발생)
흑1·3으로 틀어막고 보았으나, 백4~8로 간단히 수가 났다. 결국 흑11까지 패 발생!
죽었던 대마에서 꽃놀이패가 났으니 당연히 흑이 망한 결과. 더욱 더 문제는 백에겐 우상·좌상쪽에 팻감이 많은 반면,
흑에겐 이렇다할 팻감이 없다는 사실. 경천동지할 대형사고가 터진 것이다.
참고도3-3(흑, 수부족)
△로 이었을 때 흑1로 내려서고 싶지만, 백2~6이면 역시 수가 난다. 흑11이하의 수상전은
흑의 1수 부족.
흑의 수수(×)는 7수인 반면, 백은 흑A, 백B를 가정해 5궁도화이므로 8수.
참고도3-4(역시, 흑 망함)
그렇다고 흑17로 패를 거는 것은 팻감 부족으로 역시 흑이 안된다. 이 패를 지는 날이면
좌중앙 흑까지 모조리 사망이므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실전진행3-2(백, 승세확립)
하변에 패가 났지만, 백에게는 우상쪽에 절호의 팻감이 여러 개 있다. 결국 흑20까지
바꿔치기가 일어났으나, 흑으로선 도저히 채산이 맞지 않는 결과. 이제는 백이 반면으로도 남는 바둑이 되고 말았다.
이 바둑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때 덜컥수 한수(▲)의 폐해치고는 참으로 엄청난 결과였다. 이창호 9단에겐 일생에
길이 남을 통한의 한수이리라.
TYGEM/김창호 gigung@tyge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