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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배 관전기 - 아파도 즐겁다

결승 1국 이세돌 vs 구리 관전평

2009-02-24 오전 10:14:24 입력 / 2009-02-24 오전 10:21:45 수정

2월 19일 농심배 결승국에 이어 LG배에서도 타이젬은 김종서 작가의 유니크한 관전기를 게재한다. 작가의 딸 김상아 양이 삽화를 맡아 부녀(父女)가 그려내는 이세돌과 구리의 대결은 타이젬 회원들에게 색다른 관전의 재미를 안겨줄 것이다.

연금술 VS 조각술

지난 주말은 행복했었다. 농심 배의 달콤한 여운이 첫사랑의 두근거림처럼 가슴 어디엔가 흥건히 고여 마냥 즐겁고 뿌듯했었다. 그 순정(純情)의 감흥은 딱 나흘 만에 휘발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세기의 격돌로 전 세계 바둑 팬들의 시선이 집중된 엘지 배 결승전 제1국. 또 한 번 이세돌의 현란한 연금술을 기대했던 우리들에게 백담사 무산장실(霧山長室) 대국은 그 이름처럼 뿌연 안개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세돌의 연금술 대신 장인의 경지에 도달한 석공(石工) 구리의 조각술을 지켜봐야 했다. 2월 19일 상하이에서 역전승을 거둔 이세돌이 기세의 흐름 상 약간 우위에 서지 않을까 싶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구리의 내공이 활화산처럼 분출된 한판이었다.


구리 "농심 배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바둑을 중반에 느슨하게 두는 바람에 역전 당했지요. 그러나 자신감을 잃은 적은 없습니다."

LG배 인터뷰에서 구리는 당당했다. 언제나 그렇듯 구리는 자신만만하다. 세계 최강 이세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이세돌이 미세하게 구리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듯, 그 역시 이세돌의 아킬레스건을 포착하고 있는 느낌이다. 며칠 전에 연금술사가 청동의 균열에 황산을 부어 녹였다면 이번에는 석공이 화강암의 결을 찾아 정(釘)으로 쪼았다고나 할까? 점입가경의 승부, 그래서 이 젊은 고수들의 대결은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환경 영향평가

제1국의 흐름은 돌을 가릴 때부터 구리 쪽으로 기울었는지 모른다. 흑번으로 승률 80%를 상회한다는 선공(先攻) 마왕 구리가 세돌이 쥔 돌의 개수를 맞춰 흑 통을 가져갔을 때 어쩐지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흑을 쥐면 여지없이 펼치는 화점과 소목의 병행포석. 중국기원의 정예군단들이 머리를 모아 수천수만 번 전술지도를 그렸다는 상황도가 펼쳐진다.

중국 감독 위빈에 의하면 구리와 중국기사들이 단체로 세돌의 기보를 완전분석했다고 한다. 중국기원의 분위기는 그처럼 한중대항전에 총력전 태세다. 그에 반해 우리 쪽은 철저히 이세돌 개인의 컨디션만 믿고 지켜봤으리라.

폭주하는 스케줄 때문에 혹사당하는 건 알지만 대국 당일 새벽에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백담사까지 달려왔다는 소식에 유저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우리들의 적개심을 희석시켜버리는 이 한 장의 그림 -

백담사 계곡의 눈길을 어머니와 걷는 구리의 모습에서 할 말을 잃는다.
아아! 저 친구 뭐야?

어머니의 이름 앞에 우리는 한없이 약해지고 만다.
그녀, 구리의 모친은 인자하고 편안한 인상이다. 거기에 홀어머니라는 접두사가 붙어 더욱 애틋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구리의 아버지는 생전에 항상 구리를 따라 다니면서 중요한 대국을 지켜봤다고 한다. 구리의 성공을 위해 산악지대 쓰촨 성을 떠나 중원으로 나오면서 당신의 삶을 아들에게 올인했다.

구리는 작년 후지쯔 배에서 우승한 뒤 그 기보를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소지(燒紙)하며 영령을 위로했다. 가슴으로부터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이야기 아닌가?

반듯해 보이는 청년 구리, 맥주를 즐기고 호탕한 웃음을 자주 터뜨리지만 승부를 대하는 태도는 어쩐지 비장해 보인다.

내설악의 오지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걸음을 부축하는 구리의 효심에 우리는 차마 주적(主敵) 설정을 하기 어렵다.


한 수만 삐끗해도

이세돌과 구리의 격돌을 보고 있노라면 바둑의 틀이 확실히 바뀌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속력행마 조훈현, 우주 류 다케미야, 실리의 고바야시, 대마킬러 가토, 미학의 오다케, 이중허리 임해봉 등 기풍으로 별명을 붙일 수 있었던 낭만파의 시대가 저 멀리 흘러가고 나도 한 수 당신도 한수, 상생의 조화를 이뤄가며 치밀한 계산의 힘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이창호의 전성시대와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신세대를 대표하는 이세돌과 구리의 바둑은 초반부터 기세를 잡기 위한 샅바싸움이 시작돼 시종일관 첨예하게 부딪힌다.

흑 17. 구리가 새롭게 선보인 신수에 세돌이 백 18로 5선의 파격적인 고공압박을 감행한다. 이어서 백 28까지 세돌의 돌이 훨훨 날아다닌다. 해설자들이 입을 모아 백의 포석이 좋아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판에도 어김없이 세돌에게 애국 베팅을 해놓고 지켜보는 유저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흑이 실리가 너무 단단한 것 아냐?"

흑41.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짜디 짠 구리의 문단속. 그리고 서서히 백진 속으로 들어가 야금야금 경계를 지워나간다.

의연하게 실리를 내주고 세력을 구축해가던 이세돌이 참고 참다가 슬쩍 백88로 허술한 흑진에 포신(砲身)을 돌린다.

"아, 흑의 응수가 어려운데요!"

해설자의 평에 유저들이 그렇지! 맞장구를 치며 다음 장면을 기대하는데 구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좌하 쪽을 찔러버린다.

구리 "어려운 싸움이었는데 백88이 방향착오였습니다. 그 덕분에 하변을 먼저 둘 수 있어 우세를 점할 수 있었지요."

그렇게 한 차례 삐끗하는 바람에 바둑은 급격히 흑에게 기울었다. 최대의 요충지인 하변에서 기동력이 딸려 그대로 대마가 잡혀버린 거였다.

그 이후 수순은 철저하게 흑의 페이스. 구리는 흑백 행마의 방향타를 독점하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수순의 관장(管掌)을 완벽하게 보여준 것.

꿈을 찾아가는 순간이 아름다운 것

이세돌과 구리의 바둑은 너무 강렬하다. 심장이 떨리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한 수 한 수 판을 나눠가는 조화로운 낭만이 보이지 않는다. 백척간두에서 생사를 건 검객들의 혈투거나 열 걸음 뒤로 걷다 휙 돌아서 총을 뽑는 서부의 결투처럼 '올 오어 낫씽'으로 판을 가른다.

쎈돌과 구리의 이름이 희한하게 광물질이어서 '연금술'이니 '조각술'이니 비유했지만 그런 풍자들이야 바둑을 재미있게 표현해보려는 시도일 뿐일 터.

두 영웅들이 펼치는 운명의 승부는 그 과정 자체로 아름다운 완성의 의미를 지닌다. 어떤 분야에서든 정상에 도달하면 만물과 통하는 궁극(窮極)의 하나에 이르는 법이다. 영웅들은 각자 마음속에서 울리는 속삭임에 귀를 열고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고독하고 험난한 승부사의 길을 한 걸음씩 걸어가면서 두 영웅은 만물과 대화하며 바둑의 언어를 만들고 영혼의 상을 세운다.

그 발자국이 찍히는 매 순간이 진리와 만나는 순금(純金)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세돌과 구리가 펼치는 세기의 대결은 한중 바둑의 생사가 걸린 게임이 아니라 바둑의 진화를 위해 동행하는 2인3각 경기로 따뜻하게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가공할 수읽기와 풍부한 상상력, 냉철한 판단력, 균형 잡힌 공간지각력 등의 힘과 지혜는 우리들마저 바둑의 우주로 안내하는 은유와 통찰의 표지판이 아닐까?

두 영웅이 연출하는 일희일비의 드라마는 그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바둑에 대한 꿈을 간직하려는 우리 모든 이들의 것이기도 하다.

바둑은 이렇게 진화하고 생명력을 획득한다.
장하다 구리!
괜찮다 쎈돌!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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