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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쯔배

바둑은 필요할 때 天才를 낸다

박정환의 제24회 후지쯔배 세계바둑선수권 우승을 기리며

2011-08-15 오후 1:11:46 입력 / 2011-08-15 오후 4:14:44 수정


S#1. 등용(登龍)의 시간표

왠지 더딘 느낌이다.
만 18세의 청소년이 세계를 정복하며 최연소 챔프의 기록을 세웠는데도 우리의 기대는 좀 더 앞쪽에 깔려 있었다.

박정환.
2011년 8월 14일에 비로소 완성된 천재의 이름.
언제부턴가 왕십리 바둑동네는 물론이고 세계무대를 휘젓는 강자들 사이에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름으로 통했었다.
세계 랭킹 1위 이세돌이 주목할 인물로 항상 거론하는 이름이 박정환이었다.

금방이라도 날개를 달고 훨훨 비상할 것 같던 천재 소년 박정환이건만 이상하게 그 동안 큰 무대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 했다.
게다가 올해 봄에는 7연패를 기록하며 우리의 눈을 의심케 했다.
지나고 보니 ‘성장통’이라는 말이 정확했지만 그때는 鐵의 소년 박정환의 내면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한 것은 아닌지 안타까웠다.

그때 놀라운 직관의 소유자 이세돌은 한 마디로 평했다.
“정환이에게 슬럼프가 너무 늦게 찾아온 것 같다.”
그 말에는 후배에 대한 애정과 승부사들만이 알 수 있는 통찰이 녹아있다.

실제로 14세에 입단한 박정환의 행보는 눈부셨다.
오직 바둑 공부에만 집중해 기사들 사이에서 걸어 다니는 포석 백과사전으로 통하는 박정환은 단기간에 타이틀 홀더가 되었고 입신의 반열에 올랐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2관왕이 되어 체육진흥공단으로부터 평생 연금을 받게 되었다.
그 기세로 보아 금방이라도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비밀병기로 맹활약하리라 싶었는데 뭔가 2%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4월부터 6월 사이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그러나 모두가 우려했지만 박정환 자신은 의연했다.
강자들의 수준이 고르게 향상되면서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질 수도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늘 하던 대로 공부를 했다.
세계대회에 출전하면서 공항의 대기석과 여객기의 좌석에서 바둑 책과 기보를 외우고 또 외웠다.
부동심으로 부진의 강을 건넌 것이다.

그 이후 박정환은 12연승을 올렸고 세계대회 우승컵까지 안았다.
박정환이 후지쯔배를 획득한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면 묘한 운명의 흐름을 읽게 된다.
3월로 예정되었던 후지쯔 배 대회가 쓰나미로 연기되었던 점.
그리고 8월에 32강부터 결승까지 단숨에 진행된 방식.
이런 요소들이 기막히게 박정환의 챔프 등극을 위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 스케줄의 공백에서 박정환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한 고통을 겪고 날개에 힘을 비축할 시간을 벌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후지쯔의 여신은 박정환을 위해 멋진 이벤트를 준비한 셈이다.

▲ 박정환(왼쪽), 이세돌

S#2. 그에게서 이창호와 이세돌이 보인다

박정환의 기풍은 끈적끈적하다.

이창호의 부동심과 계산력, 이세돌의 가공할 전투력이 모두 섞여있다.
고수들의 기풍은 상대적이어서 언제나 前代의 스타일을 거스른다.
일본에서 면돗날과 화려함, 지하철 실리와 우주류 등의 기풍이 그렇게 부딪히며 정반합의 바둑 사를 이어왔고 국내에서도 실리의 조남철, 중후한 김인, 속력행마의 조훈현, 잡초류의 서봉수, 돌부처 이창호, 폭풍의 이세돌로 변화해왔다.

그 다음의 주역으로 박정환을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박정환의 기풍은 전대의 고수를 거스른다기보다 모든 고수들의 장점을 흡수한 종합병기로 조립되고 있다.
나이는 어려도 성격은 강인하고 무엇보다 바둑 외길에 포커스를 맞춘 영혼의 응집력이 놀라울 정도다.

그리고 주변 환경 또한 승부에 매진하는데 괜찮아 보인다.
어려서부터 매일 아들의 손을 잡고 도장에 나와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모정이 남다르고 바둑 명문도장 권갑룡 사단의 지원사격이 든든했다.
권갑룡 사범은 소년 박정환의 내공을 길러주기 위해 중국을 자주 데려가 저우루이양을 비롯한 차세대 주자들과 대국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또 박정환의 둥지라고 할 수 있는 신사연구회는 한국랭킹 10위에 이르는 거의 모든 기사들이 모여 있어 최신정보와 승부감각을 익히는데 도움이 된다.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가 깎는다고 했듯이 박정환은 주변의 많은 선배들이 깎아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터넷 바둑이다.
박정환의 인터넷 대국 판수는 엄청나다.
그 자신이 고백하고 동료들이 증언하기로 무지막지하게 많이 둔다고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박정환의 아이디는 인터넷 대국실에서 영웅으로 알려져 있었다.
바람처럼 입실해서 중국 최강자들과 난타전을 벌이며 유저들을 열광시켰다.
그에게 베팅하는 그래프가 항상 길었다.
그의 힘을 믿는 팬들이 많다는 증거였다.

이제 박정환이 18세의 나이로 고봉(高峰) 하나를 정복했다.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바둑 팬들 모두 흔쾌한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다.

▲ 조훈현.

▲ 이창호.

한국 바둑은 참 희한하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꼭 일정한 주기로 천재를 배출해 세계바둑의 중심 추를 거머쥐곤 한다.
이제나 저제나 천하통일을 꿈꾸는 중국은 후지쯔 배에서 또 한 번 쓴 입맛을 다신다.
“아! 박정환 저 친구는 또 앞으로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박정환의 투혼으로 세계바둑 타이틀의 지형도가 다시 바뀌었다.
중국 우세에서 한국 우세로.




S#3. 새로운 천재의 출현을 위하여

재능과 천재의 차이는 석공과 조각가의 차이일 것이다.
재능은 반복하고 천재는 창조한다.
재능이 저수지라면 천재는 샘물이다.
바둑 사를 관통하는 천재들은 모두 바둑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몰랐던 가치를 찾아내거나 승부의 아름다운 속성을 보여주었다.

그 창조행위가 계속 반복되며 바둑에 생명력을 준 것이다.
돌은 무수히 우리들 주변에 나뒹군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 돌멩이를 빛나는 투명의 결정체로 변화시키는 불이다. 그 불이 바로 천재의 소질이다.

조훈현은 흑백의 돌에 돛을 달아 반상을 질주했고 이창호는 흑백의 돌에 닻을 달아 심해 깊숙이 들어앉았다.
이세돌은 돌에 바람을 실어 자유롭게 유영하며 상대의 예측을 거부했다.
이런 천재들의 계보가 곧 한국바둑의 경쟁력이다.

박정환을 천재의 계보 다음 주자로 지명하는데 망설일 사람은 드물다.
18세로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 했어도 바둑을 대하는 자세가 단단하고 바둑만 바라보는 시선이 올곧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믿고, 자신에게 진실인 것을 믿고, 자신의 선택으로 만인이 자신을 믿게 하는 힘이 바로 천재의 조건이다.

바둑은 필요할 때 반드시 천재를 낸다.
박정환은 바둑이 과연 이 시대에 어떤 가치를 필요로 하는지 통찰해야 할 것이다.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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