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전 2회전 이세돌vs구리 4패빅 무승부가 나와 세계바둑팬을 놀라게 했다.
▲생각 중인 구리
9월 5일 베이징에서 벌어진 삼성화재배 32강 2차전.
영원한 맞수 이세돌과 구리가 연출해 낸 승부는 압권이었다.
이세돌은 초반부터 선전포고를 날리고 침공해 들어갔다.
구리는 초반 포진(布陣)의 대가라서 급전으로 흔들어야 한다.
그래서 둘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로로 접어들며 치고받기 시작한다.
▲생각 중인 이세돌의 눈매가 매섭다.좌충우돌하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이세돌의 대마가 일순 멈칫한다.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절망적이라고 고개를 흔드는데 이세돌은 바늘귀쯤 되는 빈틈을 찾아내고 거꾸로 구리의 대마를 노린다.
열 받은 구리의 심장도 활활 타오른다.
▲4패빅이 나온 모습다련장 로켓포가 쓩쓩 날아가고 화염의 불바다가 번진 전장에 4패 빅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세계대회에서 유례없는 사례, 그래서 두 사람이 다시 한 판 더 둔 것도 진기록이다. 재대국에서도 이세돌은 시작부터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재대국 중인 이세돌과 구리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뜨겁다.
S#2. 공격은 아름답다
이세돌의 템포에 구리도 스텝을 맞춘다.
주저하지 않는 그들의 공격 본능이 판을 달군다.
그들의 바둑은 입식타격이다.
펜타곤 바닥에 드러누워 꺾고 조르는 유술(柔術)은 얼마나 지겨운가?
암바나 초크 같은 기술은 승부에 유효한 테크닉이지만 제대로 걸리지 않으면 이전투구로 헝클어지기 일쑤다.
하이 킥과 좌우 훅을 교환하는 입식타격이 보는 이들에게는 시원한 게 사실이다.
▲중국의 구리. 역시 초반 급전의 결과는 구리의 탄탄한 그물에 이세돌의 대마가 결려들고 만다.
1차전에 그렇게 시달리고도 같은 코스를 택한 이세돌의 담대함이 비장하게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흔들기를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맞장구를 치는 구리 또한 호쾌한 사나이.
우상귀 대마가 통째로 포획된 상태에서 바둑은 끝이라고들 했다.
▲구리 앞에서 더욱 강완을 바둑을 구사하는 이세돌
그러나 그 순간부터 이세돌의 마술이 시작된다.
죽은 대마의 그물을 폭풍의 연타로 압박하면서 하변에 대제국을 건설한다.
다시 원점, 아니 역전의 전황표가 그려진다.
이후 몇 차례나 엎치락뒤치락 반전이 거듭되다가 하변에 균열이 생기면서 최종 승리는 구리의 몫이 되었다.
모든 사이트의 해설자들이 멘붕이었을 거다.
두 판 해설하는데도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는데 대국자들은 오죽했을까?
이세돌과 구리는 틀림없이 탈진의 밤을 지내고 있으리라.
온몸의 기가 방전되어버린 격전.
그러나 어쩌면 그들은 완전연소를 통한 절정을 맛보고 기분 좋은 숙면을 취할지도 모른다.
큰 승부를 수없이 경험한 그들에게 이런 승리나 패배는 결과보다도 과정의 화음에 만족감을 느끼지 않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최강의 수로 부딪히고 에너지 넘치는 행마를 보여주고 예측이 불가능한 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한 사나이들.
이런 바둑이 바둑을 살린다고 생각한다.
S#3. 명국의 여운
두 영웅이 그린 기보 두 편은 명작이다.
어쩌다 튀어나온 실수와 착각까지도 명작의 조건에 들어간다.
격정이 있기에 균형을 잃을 수 있는 것.
신계(神界)를 넘보는 인간들의 작품이므로 완전할 순 없다.
이세돌과 구리가 최정상의 입지가 아닌 시점이라서 이번 베이징의 뜨거운 승부는 더 의미가 깊다.
그들은 바둑으로 말한다.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라.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영웅들의 서사적 스토리텔링을 만드는데 이세돌과 구리는 환상의 파트너다.
던지는 대사(臺詞)의 궁합이 쫄깃하게 맞아떨어진다.
그저 멍하니 하루 종일 모니터를 통해 뜨겁게 격돌하는 영웅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뜨거웠다.
그리고 오장육부가 찌릿하게 전율했다.
보는 이들에게 뜨거운 영감(靈感)을 주는 바둑.
이런 승부 한 판이 바로 바둑계에서는 '강남스타일' 뮤비와 같다.
영웅들의 바둑이 끝났을 때 나는 대국실로 들어가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마구 누군가와 바둑을 두고 싶어졌다.
어쩐지 바둑 시력이 좋아진 느낌.
이 기분 좋은 여운이 꽤 오래 지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