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계일인자가 된 꼴찌 소년 - 커제 스토리②
커제 스토리 2편 - 7세 꼴찌 소년 커제의 파란만장 성공스토리
2016-01-17 오전 10:16:25 입력 / 2016-01-17 오후 5:39:16 수정
1편에 이어 2편에선 천재기사 커제의 성장 과정과 정상에 서기까지의 고난과 역경, 커제의 진솔한 속마음을 다뤄본다.
지난 1편에서도 질문했던 내용이지만, 승산95% 발언이 너무 크게 화제가 되어 여기에 대해 몇 가지 더 질문을 해야될 것 같다. 95% 발언은 상대방의 사기를 누르려고 하는 말인가?
그런 부분도 없지 않다. 내 생각에, 결국 프로기사는 성적으로 말해야 한다. 성적이 뒤따르지 않는 발언은 허세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63세 녜웨이핑이 계속해서 몽백합배 결승5번기를 지켜봤다. 검토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연구했고, 결승 기간 중 두 번이나 cctv생중계 해설자로 나섰다. 특히 최종 5국 생중계 해설 당시엔 중국 검토실에서 커제가 졌다고 판단할 때, 녜웨이핑만은 끝까지 커제에게 믿음을 줬다.
▲ 커제의 스승 녜웨이핑. '철의 수문장', '대륙의 반달곰' 등 많은 별명을 갖고 있는 중국의 바둑영웅이다.
녜웨이핑이 결승5국 해설을 끝낸 직후 커제가 오면 때려주고 싶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어쨌든 이겼으니 봐주실 거라 생각한다(웃음). 아마 선생께서도 마음 속으론 굉장히 기쁘실 것이다.
녜웨이핑이 커제에게 유독 잘해주는 것 같다.
시합이 끝난 후 선생께서 제 손을 잡고 "내 심장이 좋지 않다. 네가 알고 있느냐. 사실 cctv에서 혹시 내 건강 때문에 사고가 날까봐 앰뷸런스 차량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만일 생중계 과정에 너의 실수에 내가 열받아서 심장이 안 좋아졌다면 의사가 바로 입장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얘기하셨다(웃음).
녜웨이핑이 잘해주는 이유는 어렸을 적 제자이기 때문인가?
내 느낌은 녜웨이핑 선생이 젊은 기사들한테 다 잘해주는 것 같다. 7살 때 베이징에 있는 녜웨이핑 도장으로 바둑유학을 왔지만, 사실 녜웨이핑 선생과 대면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당시 어렸기 때문에 멀리서 쳐다볼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랬다. 녜웨이핑 도장엔 프로가 될 때까지 3~4년 정도 있었으나 정말 녜웨이핑 선생을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그 당시 토요일에 오셔서 강의를 한 번 하셨다. 강의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볼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키가 작았기 때문에 사람들 틈에서 보느라 힘들었다. 그래도 그 때 배운 것이 참 많았다.
며칠 전에는 택시를 타고 중국기원에 가는데 택시기사가 "혹시 프로기사 아닌가? 어린 나이에 벌써 9단인데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당신과 녜웨이핑 선생이 바둑을 두면 누가 이기나?" 이런 질문을 했다. 녜웨이핑 선생이 지금은 바둑을 두지 않지만 모든 중국인들은 역시 바둑 하면 녜웨이핑 선생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녜웨이핑 같은 기사가 되고 싶나?
당연하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면 좋겠다. 중국에 젊은 기사들이 많아졌지만 그만큼 프로기사의 얼굴을 기억하는 일도 함께 어려워졌다.
그래서 나는 더욱 노력해서 바둑을 새로운 느낌으로 팬들에게 전달하고, 재미있는 말들도 많이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을 하려면 실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성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어떤 재밌는 말을 해도 허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절강성 리쉐이 출신의 바둑신동 커제.
7살 때 베이징에 바둑유학을 왔는데,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노래 중에 '베이징 천안문을 사랑한다'는 노래가 있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노래일 것이다. 베이징에 올라온 직후엔 이곳이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재밌는 일들로 가득했다. 자금성 등 각종 명소들을 돌아다니면서 매일 놀았다. 하지만, 딱 1년이 지나니까 그 때부터는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베이징에서의 생활이 많이 고생스러웠나?
이를테면 처지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향에 있었을 때 나는 어린이 중에 왕이었다. 바둑도 제일 잘 뒀다. 그러나 베이징에 오니 순간적으로 피었던 꽃이 새싹으로 되돌아간 격이었다. 베이징은 각 지역에서 제일 뛰어난 기재들만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경쟁이 너무 치열했다. 매일 지고 이기고를 반복하는 생활이었다. 그것을 버텨내지 못하면 낙오하고 만다.
커제와 같은 7~8세 어린이들에겐 바둑을 배우는 것이 재미없는 일 아닌가? 자발적으로 공부할 때가 있었는가?
베이징에 와서 바둑을 배우는 목적은 오로지 프로기사가 되겠다는 꿈 때문이다.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공부했다. 그런 각오가 없다면 순식간에 도태되기 때문이다. 이곳은 그런 잔인한 승부세계다.
녜웨이핑 도장의 숙박조건은 괜찮았는지?
생활 스승이 신경써주셔서 괜찮았다.
옆에 계시던 커제의 어머니가 보충설명에 나섰다. "일년 학비가 5만위안(약900만원)이었다. 8명이 한 방 생활했고, 이층침대에서 잤다."
당시 한 클라스에 몇 명 정도가 있었고 커제는 몇 위였나?
2~30명 정도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꼴찌가 되었다(웃음). 당시엔 내 기초가 약했고 그때 천재가 너무 많았다. 예를 들어 판팅위가 있었는데, 나보다 기재가 앞섰다. 같은 도장에서도 바둑이 약하면 무시를 당했다. 그래서 당시엔 다른 친구들이 다 나를 깔봤다. 그 땐 여자 학생한테도 졌다(웃지 마세요).
커제에게도 그런 비참한 경력이 있었다니, 재미있다.
사실 아픔을 많이 겪었다. 처음 입단대회 나갈 때 당시 200위였다가, 그 다음 해엔 257위였다. 정말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괴로웠던 점만 얘기하고 있는데, 사실 2011년 국가소년팀에 들어간 이후엔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2009년부터 3년 연속 국가소년팀 선발전에 참가했는데, 성적이 너무 형편없었다. 당시 고수는 리친청이었다. 첫 번째 선발전에서 뒤에서 2등을 했다(웃음). 두 번째 출전해선 꼴찌를 했다. 그러나 2011년 세 번째 출전에서 드디어 1위가 되었다.
정말 견뎌내기 쉽지 않은 과정이었겠다.
내가 나이는 어리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않았겠나. 어떨 때는 정말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때 바둑을 한 번 졌어도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마음을 먹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매일 바둑을 지고 꼴찌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고향에 돌아가면 가족과 친척들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다. 힘을 내서 이겨내자고 생각했다.
▲ 어린 시절의 커제(오른쪽).
프로가 된 직후에도 바로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때 혁성(타이젬)에서 만들어 지금까지 4000판을 대국했다고 밝힌 ID가 바로 '잠복(潜伏)'이었다. 그런 ID를 만든 계기가 있나?
2011년 당시 중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드라마 제목이 바로 '잠복(潜伏)'이었다. 잠복이라는 드라마는 1940년대 국민당과 공산당의 첩보전을 담고 있다. 사실 ID 대표 이미지도 잠복 드라마 포스터다. 당시 아버지가 그 드라마를 즐겨 보셨고, 그래서 '잠복(潜伏)'이라는 ID를 만들어 주셨다.
한편 '중국타이젬' 혁성의 바둑 팬들은 공식적인 드라마 제목인 잠복 대신, 커제에게 스파이(特務)라는 새로운 별명을 붙여줬다. 당시 커제가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작은 스파이(小特務), 중국 발음으로 '소터우'라는 애칭으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소터우(작은 스파이)' 커제는 입단 직후 어려웠던 시절, 혁성(타이젬)에 '잠복' 하며 하루에 5~6판씩 한국 프로기사들과 진검승부를 벌였다. 운이 좋은 날에는 박정환과 같은 고수와도 둘 수 있었다. 이렇게 4년 동안 무려 4000판의 바둑을 둔 끝에 커제는 자신만의 검을 만들었다.
커제는 혁성(타이젬) 대국실에서 유난히 한국 기사와의 대국을 고집하곤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
과거 중국이 한국바둑에 눌려 연전연패할 때 한국을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2004년에 내가 바둑을 배웠고 그 당시엔 구리가 성적을 내는 시기였는데 당시 수 많은 중국기사들이 중요한 승부 때마다 한국에 참패를 당하고 있었다. 비록 공식시합은 아니지만, 제가 혁성(타이젬) 대국실에서 한국 기사를 이긴다면 중국 기사로서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세계바둑의 판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중국이 한국을 확실하게 이겼다는 말은 아직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최근 몇 년간 백중세는 유지해왔다. 그리고 현재 내가 세계타이틀을 3개나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이라면 중국이 한국에 조금이라도 앞서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중국의 '90후' 기사들은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혁성(타이젬) 대국을 즐긴다. 우리는 혁성(타이젬) 대국을 통해 대세감각과 미묘한 부분에서의 처리 같은 것이 아주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바둑을 원하는 만큼 둘 수 있었던 환경 덕분에 중국 바둑의 질적 향상이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향후 바둑 보급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지?
물론이다. 사실 내가 몽백합배에서 승산95% 운운하며 큰소리쳤던 이유 중에 하나가 스폰서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어떤 부분은 스폰서가 더욱 주목을 받기 위해 약간 고의로 한 것도 있다. 바둑대회를 후원하는 스폰서가 많이 생기면 우리 기사들한테 다 좋은 일 아닌가.
지난해 이광배가 폐지되는 바람에 프로기사들이 모두 마음 아파했고 약간의 위기감도 있었다. 과거에는 스폰서들이 돈을 내고 바둑대회를 후원하는 이유가 바둑을 좋아해서였다. 별도의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비즈니스 사회이므로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사로서 스폰서가 어떤 것을 얻기 바라는가?
나는 스폰서가 금전적으로도 많은 이익을 얻기 바란다. 때론 내가 별 걱정을 다하는가 싶기도 하다(웃음). 이번 몽백합배 결승에서도 내가 큰 소리를 좀 치는 바람에 바둑이 크게 주목을 받아 시청률이 많이 높아졌다고 들었다. 구리의 전성기 때도 바둑이 오늘처럼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런 효과를 얻어서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 만약 이번 결승전을 계기로 바둑을 후원하는 스폰서가 많아지면 바둑기사들 생계 걱정도 없어지고 중국바둑계 또한 좋은 방향으로 가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몰랐다.
모든 행사에 열정만 있어선 안 된다. 또한, 한 가지 예술 분야는 그것을 주목 하는 사람이 없다면 금방 사라진다. 바둑도 젊은 사람들의 참여가 늘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려면 더 젊고 더 활력 있는 방식을 누군가는 선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 중국여자1위 위즈잉(왼쪽)과 현 세계일인자 커제. 1997년생 동갑내기인 둘은 모두 타이젬 대국을 즐긴다.
※위 기사는 북경청년보 추펑 기자(北京青年报 褚鹏)가 쓴 "바둑천재 커제의 파란만장 바둑스토리"를 타이젬에서 번역 및 편집했습니다.
TYGEM / 이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