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통신
초한지 속에 숨겨진 바둑 이야기
중국 영화 초한지 -전쟁대전 바둑으로 녹여내
2012-02-10 오후 9:34:29 입력 / 2012-02-10 오후 9:51:50 수정
▲중국영화 초한지 중
최근 바둑냄새가 물씬 풍기는 중국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얼핏 보기에는 유방과 항우의 라이벌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보통의 초한지와 같지만 그 속에 있는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둑과 관련된 장면이나 대사가 은은하게 깔려있다. 여명(유방), 풍소봉(항우)과 유역비(우희) 주연의 <초한지-전쟁대전>이 바로 그것이다.
<초한지-전쟁대전>에는 항우와 유방의 영웅의 엇갈린 운명을 결정짓는 연회 홍문연(鴻門宴), 패왕별희 경극의 실제 주인공 항우와 우희의 사랑, 적벽대전 이전의 가장 거대한 전투이며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사자성어를 만들어낸 40만 대군의 해하대전(垓下大戰)등이 한꺼번에 담겨져 있다.
중국 한자성어에 '거기부정(擧棋不定)'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무협지 등에도 자주 등장하는 말인데 바둑돌을 손에 든 채 착점할 곳을 정하지 못하고 주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도 당대의 영웅들이 서로의 지략을 겨루며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다가 패권을 위한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 속에는 이와 같은 선택과 갈등을 표현하는데 여러 차례 바둑과 관련된 장면과 대사가 나온다. 아니 영화 전체가 한 판의 명국을 두어가는 과정이다. 바둑영화가 아닌 영화에서 바둑관련 장면이나 대사가 이렇게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나온 적은 거의 없는 듯하다. 초반에 바둑알이 놓여 있는 바둑판 등이 등장하다가 항우가 그의 군사인 범증과 바둑을 두는 장면도 나온다. 중반에는 장량이 일반 사람 10명과 동시에 다면기를 두는 장면이 나오며, 영화 종반에는 홍문연에서 범증과 장량이 맹기(盲棋,바둑판을 보지 않고 구두로 바둑을 두는 것)을 두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에서 바둑은 중요한 사건을 이야기를 구성해 나가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초한지-천하대전>은 방대한 이야기 중에서 임팩트 있는 사건들 위주로 꾸며 나가고 있다. 홍문연에서 장량과 범증의 바둑대결과 영화 중후반 항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두 사건은 서로의 운명이 결정되는 핵심적인 장면이다. 매우 빠른 호흡으로 긴박감 있게 진행되는 장면이기 때문에 관객들 역시 시선을 때놓을 수 없다.
함양성 입성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던 항우와 유방이 함양성에서 재회한 후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유방의 군사인 장량이 항우의 군사인 범증에게 바둑 한판 두기를 청했다. 이에 범증은 자신이 두 눈이 보이질 않으니 맹기(盲棋)를 두자고 제의했으며, 또한 화끈하게 총 5판을 동시에 두자고 제의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된다. 이때는 덤의 개념이 없을 때라 선착의 효과가 크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먼저 두겠다며 신경전을 벌인다.
범증 : 내가 더 나이가 많으니 내가 먼저 두리다.
장량 : 선배께서 이름도 높으시고 연령서열을 따져보더라도 후배인 제가 먼저 두어야지요.
범즘 : 오늘 대국은 그대가 두자고 했으니 도리로 본다면 그대가 주인이고 내가 객이니 손님인 내가 먼저 두어야 하리다.
장량 : 오늘 홍문연회에 초청하여 주신 분은 항우 왕이시니 저의 주공(유방)과 제가 객이지요. 손님이 먼저 두는 것이 이치입니다(귓속말:바둑은 먼저 두는 사람이 유리하니 놓칠 수 없습니다)
▲범증과 장량의 대결 중에서
이때 유방 쪽의 번쾌가 말했다.
"만약에 내 양손가락에 모두 손가락이 몇 개인지 맞힌다면 그쪽이 먼저 두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는가? "
항우 쪽의 누군가가 말했다. "10개!"
이어 번쾌가 손가락을 하나하나씩 헤아려 나가다가 마지막 10번 째 손가락을 헤아릴 무렵에 항우쪽에서 누군가 말했다.
"번쾌, 자네가 졌네."
그러자 번쾌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 뜯어 하나를 잘라 냈다.
즉, 홀짝을 맞히는 돌가리기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 뜯어서라도 흑을 잡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항우와 유방의 전투에서 한신 장군 등의 공로로 유방이 승리를 거두고 항우와 우희가 죽으면서 영화는 끝나는 듯했다.
정권을 잡은 유방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범증이 항우에게 남긴 비단주머니에 "모든 일이 끝나 천하를 얻은 뒤 한신, 장량 등과 함께 천하를 나눌 것을 약속했습니다. 천하를 얻으려는 이 한판의 바둑을 나는 이렇게 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둑에는 양쪽 모두가 지는 바둑인 양자패(兩敗俱輸)라는 것이 있다."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천하를 다시 나눌 수 없다고 느낀 유방은 한신, 장량 등의 측근을 제거하기에 이르며, 유방의 오른팔인 번쾌는 이 사실을 알고 자결한다. 유방과 양자 모두 천하를 얻기 위해 모두를 잃어버린 패배자가 되는 순간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홍문연의 이름없는 비문 앞에서 장량은 과거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문을 나서려는 순간 범증이 "장량, 너는 꼭 나와 바둑을 두었어야 했느냐?"라고 말하는 환청을 들리자 뒤를 돌아보며 영화의 막은 내린다.
한편,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 범증과 장량이 맹기를 두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맹기는 예전에 바둑TV에서 목진석 9단이 시험적으로 둔 적이 있으나 완전하게 끝까지 두지는 못했다.
중국 아마 바둑계에 바오윈이라는 아마추어는 맹기의 세계 최강자로 불린다. 중국 최고 명문대학인 칭화대학 출신인 그는 안대를 가리고 두면 동시에 3명과 바둑을 둘 수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최대 4명과 눈을 가리고 다면기를 둬 봤다고 하며, 눈을 가리지 않고 텅 빈 바둑판을 보고 둔다면 5명까지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중국, 싱가포르 등지에서 맹기 시연을 보였는데, 맹기도 바둑팬들을 위한 하나의 특별한 이벤트가 될 것 같다.
TYGEM / 김경동